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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멘트 Sep 18. 2023

괴로움에 창문을 열었다

우리가 수행을 해야 할 곳은 지금 여기, 이 현실. 

악몽 같은 시간이 시작된 것은 몇 주 전쯤부터였다. 매일밤 바깥 어딘가에서 사이렌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처음에는 곧 그치겠지, 외국인인 내가 나서기 전에 분명히 다른 누군가가 해결을 하겠지 했지만 오산이었다. 퇴근하고 와서부터 그다음 날 출근을 하기 전까지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잠을 못 자는 것은 물론이고 그 소음은 나의 모든 신경세포를 타고 흘러가 어느 순간에는 지금 내가 진짜 소리를 듣고 있는 건지 환청을 듣고 있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밤에만 들려오는 이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위험한 밤거리를 헤집고 다닐 수도 없는 답답한 노릇이었다. 경찰서에 전화를 했다. 30분이 지나도록 아무도 받지 않았다. 결국 나는 경찰서로 갔다.


역시 경찰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 소리가 정확히 어디에서 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본인들이 출동을 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소리의 근원지가 개인이 소유한 가게라면 본인들은 그 가게를 열고 들어갈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칠레 경찰들의 얼토당토않은 설명에 어이를 상실해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분노가 차올랐다.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기도 싫었으며, 이런 사소한 일도 해결을 못하는 이 나라와 사람들이 그렇게도 무능해 보일 수가 없었고 이런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 싶어서 좌절스러웠다. 사이렌 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지만 집에 창문과 커튼을 꼭꼭 닫고 마음은 더 꼭꼭 닫아버렸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바깥세상과 철저하게 단절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내게는 처음에 낯선 이곳에 왔을 때 호기심으로 빛나던 총명한 눈빛과 정신,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던 따뜻한 마음은 사라졌고, 좌절과 실망이 가득했던 현실세계는 나를 냉소적이게 만들었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서 항상 그들은 틀렸고, 개선되어야 할 존재들이며, 나는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는 지성인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내가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생각나 등골이 서늘해졌다.  

칠레 화가 Catalina Abbott의 <Jardin Secreto (비밀의 정원). 나만의 '완벽한' 세계와  정글 같은 바깥세상의 단절. 

#1

종교학에 대해 깊은 학식이 있던 그분은 해외유학을 거쳐 국내 유수의 대학에서 교수로 있다가 은퇴 후 공부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의 책을 감명 깊게 읽었던 나는 그분의 강의를 들으러 간 적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나이가 지긋한 교양 있고 멋스러운 중년의 어른들이 앉아있었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 교수는 본인의 화려한 이력을 한 줄 한 줄 꼼꼼히 소개하더니 이윽고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도 소개를 부탁하며, 그 사람들의 직업을 자세히 물었다. 갑자기 그 고상한 강의가 정체 모를 비즈니스 모임 비슷한 무언가로 바뀌는 요상한 순간이었다.


#2

또 다른 사람도 있다. 동양철학과 불교철학에 조예가 깊었던 한 선생님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간 적이 있었다. 집안에는 온갖 분야의 심오한 책들이 가득했다. 그분의 깊은 내공은 이 책들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문밖에서 그분이 본인의 아내에게 사소한 집안일로 잔뜩 짜증을 내며 그녀를 구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듣고 있는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3

20대 초반 내가 가장 동경했던 이 친구는 아버지가 대기업 주재원으로, 10년이 넘게 유럽의 총 4개 국가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 나이에 저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많은 것을 배웠을 그 친구가 너무 부러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친구는 팀과제에 너무나 무책임하고 잘난 척만 한다고 동기들 사이 기피대상 1순위였다.

칠레 화가 Giancarlo Bertini의 작품. 빛과 어둠 속 달이 공존한다. 달은 그 둘 모두에 속해있다.


도가의 대표 철학자인 장자(莊子)는 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의 자유의 경지를 이야기하는 소요유(逍遙遊: 자유롭게 거닐다) 편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자기의 본성인 덕(德)에 내맡겨 소요자재(逍遙自在)하려면 무기(無己), 무공(無功), 무명(無名)의 수양공부를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무기 하며, 신인(神人)은 무공하며, 성인(聖人)은 무명하다."     

이를 풀어 보면, "사람이 어떠한 것(기준, 조건등)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 자신에 대한 사리사욕에서 벗어나야 하며, 내가 이룬 공에 얽매이지 않고, 또 자신의 명예와 이름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의미다. 


학식과 인생 경험이 풍부한 이들이 그때 오히려 더 세속적이고 가볍게 보였던 이유는 장자가 말한 높은 경지에 도달한 인간에게는 없어야 할 이 세 가지(개인적 욕심과 강한 자의식, 본인이 성취한 성공의 달콤함에 취하는 마음, 명예로워지고 싶은 마음)가 강해서이지는 않았을까.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않은 것, 똑똑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경험이 풍부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회적으로 성공한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끊임없이 구별하는 그 좁은 마음이 본인의 기준에 '바람직한 것'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은 '고치고 개선해야 하는 열등한 것'의 프레임으로만 보이게 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이들에게 이 세상은 얼마나 한심하고 열등한 곳일까. 그런 세상에서 사는 것은 얼마나 괴로울까.


칠레 화가 Felipe Castro의 <El Observador (관찰자)>. 우리가 보는 세상은 총체적일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나도 세상을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는 좀스러운 마음을 갖게 같아 가슴이 덜컹하고 내려앉았다.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구분하고 무시했던 마음은 나의 세계에 분열을 가져오고 분열은 나에게 많은 경우에 괴로움으로 발현되었으니 최근 이곳에서의 나의 삶이 윤기 없이 바삭거리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았다.  


지난 글에서 '나는 우울할 때 공부를 한다'라는 조금 재수 없는(!) 말을 한 적이 있다. (https://brunch.co.kr/@thebluenile86/51) 실제로 공부는 모호한 많은 것들을 명쾌하게 한다. 이론적으로 탁월한 사상가들의 이야기는 짜릿한 지적 쾌감을 준다. 그런데 이런 공부와 세상 경험이 나를 우월하고 특별한 존재로 만들고 이것이 나와 세상을 단절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았나. 


온갖 심오한 공부를 하고, 세계를 여행하며 멋진 경험을 한 사람도 막상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내가 세워놓은 기준에 맞지 않는 상대를 무시하거나 퉁명스럽게 대하고, 내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일에서는 슬쩍 빠지고 나중에 남 탓을 할 수 있다. 반대로 해외유학은커녕 정말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존재만으로도 주변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특별한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학식의 깊이를 떠나서 이 현실세계의 진정한 수행자이며 철학자다. 그래서 많은 경우 어떤 이의 인간적 깊이는 그의 학식과 경험과는 무관할 수 있다. 진정 자유로운 인간은 정글 같은 이 세상과 멀리 떨어진 그 어떤 고상한 곳에서 노니는 사람이 아닌, 철저하게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을 잊은 사람이라고 했던 장자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바깥세상과 나를 단절시켰던 커튼을 다시 열고 나를 괴롭게 하는 저 소음부터 해결해 봐야겠다.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이 나라 화가들의 그림들과 중국의 장자까지 간걸 보니 소음이 나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긴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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