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조각 - 세상 가장 작은 것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공간과 건축물 사진으로 요즘 가장 활발히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진작가의 사진집을 선물로 받았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책장을 넘기는 데, 신기하게도 사진 속 공간들과 사물들이 말을 걸어온다.
무심한 듯 노란 벽 속 입을 다문 지하철 역 발권기는 그 앞에 섰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고, 말끔히 청소된 오래된 카펫 또한 그곳에 수도 없이 흔적을 남겼을 다양한 인간 군상이 생각나게 했다.
'특이하다! 이 작가는 공간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걸 전달하는 능력이 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미술작품을 보아 왔는데, 작품 속 오브제들이 이야기를 건네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지하철 역 승강장마다 붙어있는 시들을 한편 한편 읽고 있노라면, 시인들은 세상 가장 작고 여린 것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속의 진리를 친절하고 맛깔나게 전해주는 통역자이자 초능력자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청역 승강장 '도토리 묵'이라는 시를 보니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가 정성껏 쑤어 들기름 넉넉히 둘러주는 도토리 묵 한 조각을 입에 넣을 때 느껴지는 부들부들함과 구수함이 입안에 맴돈다. 시가 적힌 승강장 문의 사진을 찍어 엄마한테 보낸다.
끓어오르다가도, 뜸 들이고 식으면 모양이 만들어지는 것이 우리의 삶과 같다는 시구가 화나는 일이 있을 때 엄마 마음을 식혀주면 좋겠다.
지난봄 서점 신간 코너에서 정호승 시인의 '산산조각'이라는 책을 만났다. 책 표지에 쓰인 '더 아름답게 피어나라고 바람이 몰아치는 거란다.'라는 문구가 어려운 상황의 부모님께 위안이 되면 좋겠다 싶었다.
이 책은 정호승 시인이 오랜 기간 우화를 쓰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준비해 온 책이다. 우화란 이솝우화에서 볼 수 있듯 진리를 동물과 사물에 빗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쓴 책이다. 이 책 또한 수의, 부처님 기념품, 나무, 해우소, 종 등 작은 존재들을 의인화시켜 사랑, 인내, 희생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무겁고 고루한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전해주는 '친절하고 배려하는' 문학 장르이다. 이 책의 글 하나하나에서도 오랜 기간 이야기를 관찰하고, 수집하고, 연결했을 시인의 땀과 수고가 느껴진다.
인생이 산산조각 나 버린 한 남자를 향해, 부처 기념품은 이렇게 말한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아픔과 상처와 고난은 우리 삶을 산산조각 난 것처럼 느끼게 하지만 그 산산조각을 가지고도, 우리는 삶이란 멋진 작품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부모님께 힘든 오늘을 버티는 힘이 되어 주기를 기도하며 낭독을 시작했다.
우연히도 그날 설거지하다 간장종지를 깼다. 다른 때 같으면 그저 기분 나빠하며 치우고 말았을 텐데, 글의 내용이 생각나 조각들을 주어 담아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만들어 보니 꽤 괜찮은 미술놀이가 된다. 이제는 그릇이 깨져도 또 어떤 '산산조각 놀이'가 가능할지 생각하게 될 듯하다.
그렇게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힘이 있다.
'선암사 해우소'란 글을 녹음하는 데, 그만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왔다. 끊임없이 인간의 똥오줌을 받아가며 살아가는 해우소 받침돌의 고뇌와 번민을 다루고 있는 그 글은 만 14년 가까이 병상에 누우신 아버지의 대소변 수발을 해 오신 엄마의 삶을 생각나게 했다.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참고 견뎌야 한다. 모든 똥오줌을 받아들이는 너의 마음속에는 이미 부처가 있다."라는 선암사 스님의 위로의 말을 들으니 얼마 전 친구분들과 찍으셨다는 엄마의 사진이 생각났다.
"엄마 그 오랜 기간 고난을 참고 견디시더니 얼굴에서 부처가 보여요!"라는 나의 말에 엄마는 "무슨!" 하고 넘기셨지만, 사진 속 엄마 얼굴에서 박물관 부처상의 모습이 느껴졌다.
엄마한테 카톡이 왔다.
"오늘의 산산조각은 나의 현재의 삶을 이야기하는구려. 마음이 뭉클하고 하나님께서 너 수고했구나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미력하나마 너희들의 뿌리가 될 수 있으니 기쁘고, 따님께서 엄니 얼굴이 부처가 되었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구려.
우리는 고난 속에서 도를 터서 깨달음을 얻었나 봅니다.
오늘도 새벽 6시부터 똥 작업하고 성당 다녀와 목욕시켰다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쓰레기봉투 세 번은 버려야 끝이 난다오.
그러니 자긴들 얼마나 자존감이 떨어지겠는지. 불쌍하지. 측은지심으로 산다오"
그 힘든 상황에서도 엄마는 도리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시니....얼굴에 부처가 보일 수밖에....
이 책에는 "견뎌야 한다. 견딤이 쓰임을 낳는단다."라는 말이 나온다.
엄마와 함께 몸이 많이 편찮아지신 외삼촌의 병문안을 갔다.
"뭐 먹고 싶은 건 없니? 내가 해다 줄게." 라며 동생의 이마를 쓰다듬는 엄마의 마디진 손은 '이 세상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랑의 손'으로서 쓰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