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같은 삶을 위해서
2015년 6월 어느 날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가기 위해 운전 중이었다. 운전 중에 어머님께 전화를 받았는데, 목소리가 상당히 긴장되고 떨리는 듯했다.
"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아버지가 폐암.. 폐암 3기 라는데.."
순간, 운전대를 놓칠 뻔했다. 마침 신호대기로 멈출 수가 있었다. 가슴이 떨리고 눈 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한 동안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아버지께서 뭐라고요?"
"폐암 3기.."
"아니.. 왜.. 폐암이.. 그게 무슨 소리인데요? 갑자기.."
화도 나고, 진정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통화를 하고 난 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멍 한 기분.. 옆자리에 있던 아들과 아내도 아무 말하지 못했다. 가슴이 답답해서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운전을 하는 내내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 싫어 참고 참았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막을 길이 없었다. 6살 된 아들이 내게 물티슈 한 장을 주었다.
"아빠! 할아버지 많이 아프시데요?"
"응.. 많이 아프신가 봐.."
'아직은 안되는데.. 아직은..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는데..'
마음속으로 똑같은 말만 반복하면서,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변해버렸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뒤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있었다.
어릴 적 나는 아버지가 싫었다. 일도 늘 바쁘셨지만, 술과 친구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어려운 살림 형편에 어머니께서도 늘 맞벌이로 바쁘셨고 동생과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둘이서 보내야 했었다. 중학교 때 유명 메이커 신발을 신고 학교에 오는 친구들을 보면 쳐다보기도 싫었던 만큼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불만도 날로 커져만 갔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야! 절대로..'
어머니는 늘 책을 좋아하셔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일을 하시면서도 책을 보느라 손님이 왔는지도 모른다며 아버지께 늘 핀잔을 듣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죄지은 사람처럼 부랴부랴 일을 하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더 커졌다. 저녁이 되어 영업이 끝나면 아버지께서는 약속이 있으시다며 나가셨고 어머니는 우리 두 형제의 끼니를 챙겨주기 위해 다시 집안 살림을 시작하셨다.
"엄마! 힘들죠?"
"괜찮아.."
"나중에 제가 커서 어른이 되면 엄마 꼭 서점 차려 드릴게요! 그때 엄마가 좋아하시는 책 많이 읽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말만이라도 고맙네.. 아들.."
나는 십수 년 전에 어머니와 그렇게 약속했던 그 약속을 여전히 지키지 못하고 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나갔다. 지금도 어머니를 뵐 때마다 그 약속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만 십수 년째 반복하고 있다. 어머니께서는 64세의 연세에 노인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근무하시는데, 벌써 그 일을 하신지 10년이 넘으셨다. 척추측만증이 심해 쉬는 날이면 물리치료를 받거나 한의원을 다니시지만 호전되지 않고 있다. 그 허리 건강상태로 노인들을 돌보고 야간 당직근무까지 서신다. 정작 자식들에게 돌봄을 받으셔야 할 분이..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찾아주는 사람 없는 가게를 운영하시며 늘 손자와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살아가신다. 여전히 부모님의 가슴 한편에 서운함과 그리움을 안겨드리고 살아가고 있다. 자식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이제 부모님께서는 우리 두 형제에게 다 내어주시고 내 자식을 위해 살아가는 나를 한발 뒤에서 바라 봐주시고 계신다.
어느새 나는 평생 닮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삶을 닮아가고 있다. 아니,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두 형제를 이만큼 키워 오기까지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좁아 보이는 아버지의 어깨가 너무 원망스럽다. 부모가 되니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한다고 할까? 성공을 꿈꾸어 왔던 나의 모습은 그저 평범한 삶과 평범한 가장이길 바라며 애쓰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왜 이렇게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도 고된 것 임을.. 왜 말씀해주지 않으신걸까..
나는 다만, 아버지의 폐암이라는 문제가 생기면서 나의 생각이 이토록 간절하게 바뀐 것은 아니다.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자식을 낳아 키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러한 생각들을 가지게 된 것 같다. 행복과 불행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른다. 삶은 이런 것들의 반복이고 연속이다.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준비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맞이하게 된다.
아버지께서 폐암 투병생활을 하신지 4년이 지나간다. 처음 6개월 정도라고 했던 의사의 말에 너무도 간절하게 아직은 안 된다고,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하며 보냈던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다. 그때와 나는 무엇이 바뀌었을까? 부모님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부모님을 찾아뵈었고, 함께 여행을 가고 맛집을 찾아다녔다. 조금 더 시간을 주면 많은 것을 해드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못한 것 같다. 언젠가는 좋지 못한 상황에 또다시 준비되지 못한 상태로 맞이할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것을 계속 잊고 살아간다. 생각하기 싫어서다. 누군가 그랬던가 '인생은 태어나면서 부모에게 빚지고, 살면서 은행에 빚지고, 죽으면서 자식에게 빚지고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웃픈 말이다. 부정하고 싶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버지로 살다 보니 아버지라는 위치가 얼마나 외로운 것인지 생각을 하게 된다. 아파도 티를 못 낸다. 힘들어도 힘든 척 조차도 사치다. 아들에게 아빠는 슈퍼맨이다. 그런 아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 것이 안타까워 그러지 못한다.
아빠도 힘들 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걸 알게 하고 싶지 않다. 난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가끔씩 힘들어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아버지가 생각난다. 내가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어느 날부터 내 주변에 누군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결혼 소식보다 많아지면서부터이다. 좀 더 담담해지고 침착해져야 한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마음속으로 삼켜야 할 말들이 더 많아진다는 의미인 것 같다.
삶은 항상 동화처럼 아름답지 못해도 동화 같은 행복한 삶의 시작은 오늘 하루에서 시작될 수도 있고 끝날 수 있다. 나의 행복한 동화 속 삶의 주인공들은 나의 가족이며, 나는 그 동화를 써 내려가는 작가이다. 작가가 펜을 내려놓는 순간에 동화는 끝이 난다. 그래서 나는 그 펜을 내려놓을 수 없다. 동화 속 이야기는 내 삶의 이야기가 될 테니까.. 언젠간 나의 동화 속 이야기에 어머니의 책방 이야기가 꼭 나올 수 있었으면.. 그리고 나의 못났지만 글 같은 않은 글 한 조각에 누군가 행복한 맛을 느꼈으면 좋겠고, 내가 써 내려가는 동화의 마지막은 "그래서, 동화 속 친구들은 모두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데.."라고 하며 동화책을 잘 마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19.02.04 / Am 01:17 바람이 많이 부는 새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