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대신 서울의 밤
러닝모임방에서 개학 전전날에 한라산을 당일로 다녀오는 일정의 벙개가 열렸다. ‘무슨, 개학 준비해야지.’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런데 두 번째로 든 생각은 ‘개학 전이니까 가능한 건가? 3-4월은 눈코 뜰 새 없이 흘러갈 텐데 이번이 기회일까?’였다. 하던 일만 하면 일어나던 일만 일어나니까, 안 가던 길도 가보며 윤동주 시인이 말했듯 ‘내를 건너 숲으로, 새로운 길’을 가보기로 했다. 벙개를 열어주신 분은 러닝과 등산에 진심인 찐이었다. 지금까지 관찰해 온 ‘찐’들의 특징은 ‘꾸준함, 유튜브로 자습, 관련 이야기를 할 때 느껴지는 은은한 광기’인데 세 가지를 모두 충족했다(그를 K라고 하겠다). 참여 인원은 나와 K 뿐이었는데 제주도 당일치기 일정을 3일 전에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에 인원이 많지 않았다. 우선 3월 2일 새벽에 출발하는 제주행 비행기표는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일 오는 편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K는 한라산 국립공원 탐방 예약과 돌아오는 비행기 티켓의 피케팅을 도와주고, 등산 초보인 나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덕분에 쓰지 못하고 가지고만 있던 룰루레몬 상품권을 등산복을 사는 데 쓸 수 있었다(드디어!).
등산을 할 때는 두껍게 입기보다는 얇은 옷을 겹쳐 입는 것이 좋은데, 특히 가장 안에는 땀 흡수를 잘해주는 ‘베이스 레이어‘를 입어야 한다. 룰루레몬 매장에서 베이스 레이어를 입어보았는데 소재의 질도, 부들부들한 촉감도 좋았다. 베이스 레이어와 경량 패딩을 사 온 뒤 뿌듯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등산 가방에 들어갈 물건들을 챙겼다. 일단 스프레이 파스와 마스크는 가져가지 않았고(K가 필요 없다고 알려주었고 마스크 대신 입, 코, 귀 등을 자유롭게 가릴 수 있는 무언가를 빌려줌), 사진과 같이 준비물을 챙겼다. 사진에는 긴팔이 없지만 최종적으로는 ‘베이스 레이어-얇은 반팔-얇은 긴팔-경량 패딩’ 순으로 네 겹을 상의로 입었다.
출발 전 날, 준비물을 챙기고 잠을 청했지만 잘 들지 못했다. ‘차라리 자지 말까?’ 싶었지만 등산할 때 체력에 지장이 생길 것 같아 감은 눈으로 밤을 새웠다. 4시에 일어나 머리를 감고 말리고 있었는데 두 개의 카톡이 와있었다. 하나는 한라산 국립공원, 다른 하나는 K. 기상악화로 인한 통제라니. 밤새 한라산 CCTV를 보며 날씨를 모니터링했다던 K와 나는 허탈해졌다. 서둘러 당일 비행기표 두 개를 취소했다. 취소 수수료보다 한라산의 날씨가 더 미웠다. 이번에는 갈 운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주도행 비행기를 타기 전에 알게 된 것은 어쩌면 다행이었다.
등산복을 입은 채로 머리를 말리는 새벽 5시, 떠올린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잔다. 두 번째는 다른 산이라도 간다. 후자를 선택했고, 지난해 가을 백운대까지 오르려다 원효봉까지만 찍고 하산했던 것을 떠올리며 북한산 등산을 K에게 제안했고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북한산의 백운대까지 대여섯 개의 봉을 지나는 한라산 관음사 코스만큼 긴 코스로 새벽산행을 하기로 했다. 서울 날씨는 생각보다 추웠지만 움직이니 몸이 데워졌다. 독바위역까지 지하철을 탔고 족두리봉까지 오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일출도 볼 수 있었다.
‘독바위역-족두리봉-향로봉-비봉-승가봉-문수봉’까지 올랐을 때 세 시간 정도가 걸렸다. 생각보다 산의 경사는 가팔랐고 햄스트링과 엉덩이, 오금에 자극이 지속되었다. 고도가 높아지며 눈이 녹지 않은 길이 시작될 때는 아이젠을 착용했다. 뽀득뽀득, 캉캉. 눈길과 바위를 밟으며 콧물을 훌쩍이다 경치를 보고 감탄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내려올 거 왜 올라가냐며 툴툴대던 어린 시절과 달리 지금은 굳이 그런 일을 찾아서 하는 어른이 되었다. 쇠질을 할 때 삶의 무게에 비하면 바벨이 가볍듯, 먹고사니즘의 부단한 고단함에 비하면 산을 오르고 내려가는 일은 일시적인 수련이자 행복한 우주 먼지가 되어보는 경험이다. 수묵화를 그려놓은 듯한 풍경 속에 들어가 피톤치드를 맡으며 안 쓰던 근육에까지 젖산을 꾹꾹 쌓는 일, 한발 한 발에 집중하며 삶의 시름에서 잠시 벗어나는 일, 아득하게 가파른 바위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에 눈물이 찔끔 나기도 하지만 이겨내고 등반에 성공할 나를 믿는 일. 등산화도 없이 등산을 하는 등린이의 소회이다.
백운대는 추위로 인한 체온 하강, 하산 시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음(물론 K가 아닌 나의)을 우려하여 중도 포기하고 하산하였다. 상황을 예측하여 포기를 할 줄 아는 일도 등산에서는 중요한 것 같았다. 모든 루트를 잘 알고, 등산자의 산행 속도와 체력을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의 고수이기 때문에 가능한 진단이었다. 하산길은 짧고 수월했다. 고소공포증을 유발하는 ‘봉’도 없었다. 하산 시 주의해야 할 것은 긴장이 풀려 발목의 긴장까지 풀어버리는 일뿐이었다. 아이젠을 벗고 가벼운 발바닥으로 산을 내려왔다. 4시간 30분 정도가 걸렸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상암으로 돌아와 제주 흑돼지 대신 ‘국내산’을 파는 돼지고깃집에 들어가 오겹살과 목살을 주문하고, 한라산 대신 ‘서울의 밤’을 마셨다. 술의 이름도 절묘했다.
‘오히려 좋아.’에서 나아가 ‘굳이’를 살아보려는 요즘, 굳이 한라산을 가려다 실패했지만 오히려 좋게도 북한산을 굳이 올랐다. 눈물 닦으면 에피소드라는데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쓸 수 있는 소재도 탄생했으니 정말 좋잖아! 일기도 쓰고 브런치도 쓰고 자는 ‘서울의 밤’이 지나간다.
등산 준비물부터 앞으로 사야 할 등산화 모델 후보를 알려주시고, 중간에 패딩도 벗어주신 나의 등산 선생님 K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