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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향기 Jan 21. 2024

엄마는 앉아 있어. 내가 할게

사과 깎는 남자중학생

남자 중학생의 3일간의 수학 학원 방학이 끝났다. 엄마도 쉬고 있으니 치과 진료, 한의원 방문, 다른 과목 학원 면접 등을 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시작 전에는 모든 것을 다하겠다고 호기롭게 덤볐으나 마음만 한가득이었을 뿐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지나 보냈다. 시간이 주어져도 똑같은 행동이 되풀이되는 걸 보면 어떤 일을 수행한다는 건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인 건 다분히 수긍 가능하다. 

삼일 동안은 특강 하나만 가고 있어서 수강 후 점심 식사가 끝나면 스타벅스에 가자고 했지만 피시방 가기 바쁜 아이와 계속 늘어지고 싶은 엄마 모두 막상 그 시간이 다가오면 언제 그런 말 했냐는 듯 입을 다물어버렸다.

하지만 마음 속에 남은 약속은 계속 마음에 걸리기 마련인데, 아들도 삼일 동안 계속 깨져버린 약속이 맘에 걸렸나 보다.

"엄마, 오늘은 영어 없으니까 수학 끝나고 스타벅스 가자."

마음의 짐을 덜어야겠기에, 기한이 다가오는 스타벅스 쿠폰도 써야겠기에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학원 끝날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아 전화도 했지만 받지도 않는다.

'또 피시방 갔구나. 그런데 왜 결제 내역이 안 오지. 충전해 놓은 게 있었나 보네.'

준비랄 것도 없지만 외출복을 입고 기다렸는데 아들의 소식조차 들리지 않아서, 엄마의 권위가 무시당한 것 같은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고, 약속의 중요성을 생각하지 않는 아들의 모습도 걱정되었다.


아들이 학원 끝나고 2시간이 넘어서 들어왔다.

"너, 왜 이제 와. 스타벅스 가자던 약속은 어떻게 됐어? 거기다가 엄마가 전화해도 받지 않으면 어떡하니? 걱정되잖아. 무엇보다도 피시방 가면 간다고 해야지, 출필곡 반필면 몰라? 엄마가 맨날 이야기하는데도 자꾸 잊어버리니?"

"엄마한테 피시방 결제 내역 가잖아?"

"시스템에 문제 있는지 이상하게 오늘 안 왔어. 엄마는 준비 다하고 기다리고 통화도 안되고 얼마나 걱정됐겠어?"

"아, 엄마 미안해."

남자 중학생은 이럴 때면 목소리가 더 나긋해진다. 표정은 눈물이라도 떨어질 듯한데 실상은 눈꼬리가 웃고 있다.

'녀석, 큰 인물은 없지만 얼굴 하나는 조막만 하니 성형이라도 시켜서 아이돌 시켜야 되나. 연기 잘하네.'

"다음부터 이러지 마. 엄마 속상해."


아들은 잔뜩 미안해한다. 

"엄마 내일은 꼭 스타벅스 가."

내일이라는 말에 머릿속 시뮬레이션이 시작된다. 학원 사이에 두 시간 여유뿐이니 특강 갔다 오면 밥 먹이고 챙겨서 나가고, 가는 거리 있으니 몇 시 몇 분이면 도착할지 예상이 된다. 애들 음료랑 케이크 먹는데 삼십 분이면 차고 넘칠 터이니 먹고 다시 학원 가면 되겠구나라며 시간 강박증이 다소 있는 엄마는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엄마, 뭐 해줄까? 미안해서 그래."

"엄마 사과 먹고 싶네."

"그래? 내가 사과 깎아줄게."

예상치 않은 전개다.

휴대폰 하나면 모든 게 해결되는, AI가 인간 같은 최첨단 시대에 살고 있는 남자 중학생이 뭘 해봤겠는가. 사과를 껍질째 입에 베어 물어본 적도 없는 녀석이 덥석 하는 제안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아무 기대 없이 응이라는 대답을 했다.

막상 사과와 칼을 찾는 아들을 보니 불안하기 그지없다.

"아이고, 네가 뭘 해. 엄마가 깎아 먹을게."

"아냐, 엄마는 앉아 있어. 내가 할게."

칼날이 무딘 과도라 걱정은 되지 않고, 기운 빠진 엄마는 방법을 가르쳐줄 생각도 없다.


아들은 사과 껍질을 밤 치기 하듯이, 생선 비늘 벗기듯이 조각조각 벗겨내기 시작했고 반쪽인 사과를 다시 반쪽으로 쪼개려고 칼을 쑥 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엄마, 이것 봐."

특유의 눈웃음과 미소로 무슨 전리품이라도 되는 양 사과를 들어 보인다.

나는 글을 쓸 테니 너는 사과를 깎거라 하며 앞으로도 계속 시키고 싶다. 어설프지만 결과적으로는 예쁘게 깎인 사과다. 적어도 엄마 눈에는.

"고맙다. 잘 먹을게."

이제 또 사과 깎기를 시켜야겠다. 야무지게 시켜놔야 나중에 장가가서 예쁨 받을 것이다.

"대체 당신은 어머니한테 뭘 배워 온 거야?"

내가 입버릇처럼 남편한테 내뱉는 말을 아들은 듣지 않길 바라니까. BUT 맘 약한 이선생이 아들한테 이것저것 시키는 게 과연 가능할까? 거기다 엄마의 성정을 속속들이 다 아는 남자 중학생이 엄마 말을 들을 것인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소득도 없는 쓸데없는 상상을 한다.


아들이 처음 깎은 사과라 영원히 박제하고 싶지만, 맛있게 먹고 브런치에 글 써서 박제하기로 마음먹어 본다.


사랑받는 건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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