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무엇을 하든, 그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나를 잘 아는 절친한 친구와의 밀도 있는 통화가 끝났고, 나는 그간 목적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왜 이렇게 모든 게 모호해졌지? 회사 일도, 사업도, 내 삶의 목적도. 모든 게 엉켜 섞여버렸다. 좋은 향수도 여러 향이 섞이면 정체불명의 불쾌한 냄새가 나듯이 나의 마음에서는 뭔가 애매한 정체불명의 혼란스러움이 피어올랐다. 나는 분명 좋은 것들이 모여있는 곳을 향해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됐든 정말 열정적으로 잘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고등학교 학창 시절, 나는 정말 성공하고 싶었다. 그때 이 악물고 할 수 있는 것은 학교 성적을 잘 받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그래, 성적을 잘 받으면 좋은 대학 가기도 좋고, 성공하기도 좋고, 부모님도 좋아하실 거고, 스스로 발전에도 도움이 될 거야’ 그렇게 겸사 겸사했던 공부는 막상 원서를 쓸 때가 되니 힘을 잃고 말았다. 공부를 열심히 잘할 줄은 알았지만, 정말 웃기게도 ‘좋은 대학교에 간다’라는 목적은 잊고 말았던 것이다. 전교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내신 성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소개서를 제대로 작성하지 못했고 수능을 망쳤다. 그렇게 나는 간신히 내가 냈던 대학교 중 마지막 순위였던 곳을 갈 수 있었다. 이게 뭐 대수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도 이 자체는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방황하면서도 잠시 멈추고 생각할 시간을 갖지 않고 계속 달리기만 한 데에 있다.
멀리 있는 높은 건물들은 서로 가까이 모여 있는 것만 같다. ‘와 저기는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네. 좋은 게 다 모여 있잖아. 저기가 좋아 보여! ’ 하고 목적지로 설정하고 달린다. 그런데 막상 어느 정도 가까이 가면 서로 멀리 떨어져 각각 다른 곳에 있는 건물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 이제 헷갈리기 시작한다. 나는 어디를 향해, 또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었는지.
내가 했던 큰 결정들을 돌아봤다. ‘취업도 잘되고, 공부도 수월하고, 안정적이고 좋을 거야’라고 생각해 전공을 선택했던 일. ‘이 역량을 가지는 게 앞으로 좋을 거고, 이 산업은 안정적일 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일 거야’라고 생각하며 커리어를 선택했던 일. ‘재미도 있고, 사이드 돈도 좀 벌고, 회사 밖 사람들을 만나면서 우물 안도 탈출하고, 다양한 일을 하면서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작은 사업을 하는 일.
겸사겸사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하고 결정했던 일은 어쩌면 모여있는 것 같은 먼 빌딩들을 향해 달리는 사람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남겼다.
친구와 했던 통화를 통해 내 안에 존재했던 공허함을 말로 표현해 입 밖으로 내뱉어 보았다. 나를 몇 년간 지켜봐 온 그 친구는 나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김치찌개 하나 만드는데 달걀을 풀고 있는 격이야. 음식재료도 정말 잘 다듬어. 근데 파슬리는 왜 다듬고 있는지 모르겠달까?”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네가 가진 곁가지들을 잘 쳐내 봐. 너는 정말 잘하는 친구니까 그럼 훨씬 빠르게 성장할 거야. 네가 뭘 만들고 싶어 하는지, 그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나는 애써 내가 보낸 시간을 보호하고 싶었던 걸까 “너 말이 맞아. 그렇지만 나는 그런 시간도 필요했다고 봐. 그렇지만 지금 내 모든 게 목적을 잃은 걸 보면, 이제 이 방황도 충분히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그렇게 나는 달리기를 잠시 멈추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