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 작은 목소리를 잡아 크기 키워주기

by 렐레

억울함을 느껴봤자 일주일이 지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잠시 멈춰보자고 했지만 답을 내지 못한 채로 가만히 있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이쯤 되니 마음껏 길을 잃기로 허락한 성숙한 자아와 달라지지 않는 현실을 초조하게 바라보는 재빠른 자아가 서로 충돌했다. ‘이쯤이면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아, 이번 주에는 취향 리스트를 한번 작성해 볼까? 그럼 뭔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챗지피티한테 물어볼까?’ 내 머릿속은 온통 답을 찾는 투두리스트를 채우기에 바빴다. 그때 성숙한 자아가 불쑥 나타났다 ‘아니야, 이번에는 그냥 시간을 두고 지켜보기로 하자. 그동안 숨 가쁘게 계속 뛰어와서 이번에는 멈춰보기로 했잖아.’ ‘하.. 그래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엔 성숙한 자아가 이겼다. ‘그래 이번주 휴가기도 하고 머리 식히면서 시간을 좀 가져보자’


그렇게 다시 소소한 일상을 보내기로 했다. 휴가 기간 동안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온라인 사업으로 해야 할 것들이 있어서 일도 하는 그런 별다른 것 없는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과 메시지로 연락을 하기도 했다. 한 번은 단체 메시지 방에서 지인 둘이서 티키타카하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와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네, 난 이 사람 말이 공감 돼’


그 순간 흠칫했다. ‘뭐지?’ 낯선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지금 내 마음을 읽은 거야?’ 자신의 생각을 인식하는 이 평범한 순간이 나에겐 그간 있지 않은 생소한 순간임을 깨달았다. 되짚어보면 나는 어떤 걸 보고도 나의 생각을 떠올리기가 참 어려웠다. 무엇이 좋고 싫은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대부분 ‘그렇네’라는 단조로운 생각들만 할 뿐이었다. 나머지 나의 생각들은 그저 흘러가는 뒷배경의 소음처럼 지나갔다. 그래서 매일 쓰는 일기에도 내가 했던 일정만 종종 나열되었고, 구체적인 나의 생각을 일기에 제대로 담지 못했다. 내 마음과 생각을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생각을 정리해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배경 속 나의 목소리를 붙잡아 소리를 키웠던 것이다. 낯설고 새로운 감각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내 목소리의 크기는 이렇게나 작았구나.’


그러자 이번에는 내 생각을 잡아서 소리를 크게 높이는 오케스트라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앞으로 생각을 잘 붙잡아서 소리를 키우고 한번 찬찬히 곱씹어 보는 시간도 가져봐야겠다’. ‘또 이왕 내 목소리를 갖는다면, 삶을 바라보는 섬세하고도 풍부한 목소리면 좋겠어’ ‘요즘은 같은 걸 보고 말하더라도 자기만의 삶에 대한 시각으로 생각을 풀어내는 사람들이 참 부럽워. 그간 자기 계발서나 실용서적을 읽느라 보지 않았던 에세이를 읽고 싶어졌어.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바빠 죽겠는데 왜 저걸 궁금해하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어. 여러 삶들을 살펴보며 나의 삶에 대입해 생각해 보고 나의 삶은 어떻게 사는 게 좋을지를 깊게 생각해 보는 사람들이었던 거지...’,‘내 삶을 찾고 싶어서 타인의 다양한 삶이 궁금하다니 이게 바로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이 말씀하시던 문학이 삶에 주는 의미인 건가…’


한바탕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끝내고 나는 나의 생각을 조금 더 제대로 붙잡아보기로 했다. 일기를 쓸 때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적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 수강하는 강의를 완강하기로 했으면서 갑작스러운 저녁 약속을 승낙하고 간 것’에 대해서, 예전이었다면 ‘잘한 점 :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낸 것, 못한 점 : 수강하고 있는 강의를 완강하지 못한 것, 시도할 점 : 할 일이 있으면 하고 싶은 게 있더라도 할 일을 어느 정도는 하고 하고 싶은 것 하기’ 정도로 적고 다음에는 시간 관리를 제대로 하자고 다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라고 그리고 그에 대해서 한 번 적어보았다. ‘아마도 연말이라 마음도 뒤숭숭하고 외로운 마음이 들었나 보다. 강의는 다음날까지가 강의 종료일이니 내일 충분히 몰아 들을 수 있겠다는 마음이 불쑥 올라왔었던 듯. 조금이라도 오늘 더 들으면 내일 덜 고생할 텐데, 그건 싹 잊고 바로 신나서 약속에 나갔던 것 같다’


‘아니, 이런 마음이 나에게 있었단 말이야?’


내가 품고 있던 내 마음이지만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은 이랬구나.. 그동안 나도 참 나를 몰라줬네.. 좀 미안하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억울해한다고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씩 알게 모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그 후로 과거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는 걸 느꼈다. 그때의 내 상황과 생각을 글로 적어 몇 번이나 읽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나에게 처했던 상황과 별개로 내가 느꼈던 마음이 절로 공감이 되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었다. ‘그래, 그 상황 속에서도 참 열심히도 살았네. 나의 마음을 누르고 여러 선택을 하면서도 스스로는 내가 자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으니 내 진짜 마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처음 마음을 열어볼 때만 해도 억울한 감정이 밀려왔는데, 막상 열어두어 바람이 통하자 덮어뒀던 상처들이 빠르게 낫기 시작했다. 그냥 꺼내보고 인정해 주는 것만으로도 쏟아졌던 퍼즐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몇 주간 여러 감정으로 혼란스러웠는데 처음으로 마음이 시원해졌다. 그래, 나의 공허함을 채울 재료는 내 안에 있는 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