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빴던 달리기를 멈추자 이를 축하하기라도 하듯 마음속에서 작은 폭죽이 하나 피어올랐다. 마음속 저 아래에서부터 슈우웅 올라오기 시작한 이 폭죽은 ‘나는 어쩌다 이렇게 모호한 사람이 되었지?’라는 질문으로 터졌다. 한번 터진 폭죽은 고요했던 내 마음을 크고 작은 불꽃들로 번쩍번쩍 밝혔다. ‘언제부터 이랬던 거지?’, ‘정말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더니 내가 그 꼴인가?’, ‘취향이 없어서인 걸까? 왜 나는 이것도 저것도 좋다고 했던 거지?’, ‘우유부단한 사람은 아닌데, 뭐가 다른 걸까?’
며칠간 이 불꽃놀이를 하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그동안 나는 나에게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선택과 집중을 잘하지 못했던 것은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는 데 있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게 여러모로 좋은지는 기가 막히 게 알아내지만,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해본다고 한들 ‘그냥 이것도 저것도 괜찮다’ 정도만이 존재할 뿐 그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런 선택들이 쌓이니 내가 한 선택이지만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나 조차도 말할 수 없는 모호한 지금을 만들었던 것이겠지.
그럼 나는 언제부터 나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멈췄을까?
사실 나는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라지는 못했다. 사람마다 필요한 것들을 담는 바구니가 있다고 하자. 내 작은 바구니를 열어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다. 있어도 쓸만한 게 별로 없는 듯했다. 누군가는 필요한 것들이 가득 담긴 큰 바구니 안에서 자기의 취향에 맞는 걸 골랐을지 몰라도, 나는 누군가 휙 던져준 걸 보고 바구니를 잘 조준해서 맞춰 받으면 그것을 빨리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새 학기에 출판사에서 교사들에게 주는 광고용 교재를 선생님들이 버리면 감사히 가져다가 공부할 때 썼고, 새 옷을 늘 살 수는 없었지만 여기저기 물려받은 옷들을 조합해 입을 수 있었고, 간식을 사 먹을 수는 없었지만 학교에서 나눠주는 햄버거를 집에 와서 동생과 나눠먹던 나였다. 주어진 것들은 모두 감사한 것이지만 애초에 나는 선택할 수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최대한 활용해서 잘 소화하는 것이 중요했다. 또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어떤 대안이 있었으랴..
나는 생존해야 했고 그 습관이 몸에 배였다. 돈을 내야 할 때는 주로 필요에 의해서, 그렇지 않을 때는 주어진 것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살았다. 학창 시절 소풍에서 자유롭게 쓰라고 받은 용돈을 도로 집에 가져오는 이 아이는 자라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기보다는 그나마 고를 수 있는 것들 중 괜찮아 보이는 것을 빨리 집고 그것이 나의 취향이라 믿는 어른이 되었다. 선택을 할 수 있는 순간에도 잠깐 멈춰 고민하지 않다 보니, 취향을 고민하고 알아보는 것을 사치로 여겼다. 선택을 고민하는 것이 습관화되지 않은 나는 이 과정을 쉽게 생략했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는 중요하고 큰 결정들도 쉽게 쉽게 했던 것 같다.
그간 나의 마음을 묻는 물음표도 함께 사치가 된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퍼진 질문의 폭죽놀이에 목이 막힌 듯 답할 수 없었던 질문은 ‘지금의 삶은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맞는가?’라는 것이다. 요즘 참 행복하고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믿던 터라, 나오지 않는 대답에 스스로도 당혹스러웠다. 그렇다면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그것도 나에겐 답할 수 없는 영역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믿어왔다. 겨우 받아 낸 바구니 속 그것이 너무나도 귀해서 그것이 바로 내가 선택한 것이고, 추구하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혹자는 그게 운명이고 그것이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맞다. 아쉬운 건 주머니 속 무엇이 아니다. 원하지 않는다고 다른 대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 숨겨진 진짜 나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나를 이제야 발견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