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4. 나는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까?

"직장과 부서와 직책이 없는 나"

by 박원규

Chapter 4. 나는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까?


"직장과 부서와 직책이 없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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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하기 1년 전, 나는 한 가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회사 밖에서 나는 누구에게 필요한 사람일까?'

23년간 나는 K금융그룹의 이름으로 일했다. 프로젝트를 추진하면 50억 예산이 움직였고, 제휴사와 미팅을 하면 상대방은 K라는 간판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제 그 간판이 없다. ○○금융그룹 팀장 Jason이 아닌, 그냥 Jason.

나는 누구에게 필요한 사람일까?


사회적 정체성의 붕괴


전기보 작가는 『은퇴 5년 전에 꼭 해야 할 것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자아정체감의 구성비를 보면 전체를 100점이라고 가정할 때 사회적 정체성의 점수가 70점 이상이고, 개인적 정체성의 점수가 30점 미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퇴직이라는 사건을 통해 은퇴를 경험하고 나면, 사회적 정체성의 점수는 급격히 낮아진다. 20~30점의 점수만 남게 된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회사 다닐 때의 나:

사회적 정체성 90점: K금융그룹 팀장, FUTURE9 총괄

개인적 정체성 10점: ...나는 누구지?

합계: 100점


퇴직 직후 예상되는 나:

사회적 정체성 20점: 전 K금융그룹 팀장...?

개인적 정체성 10점: 여전히 모르겠음

합계: 30점 �


50점도 아니고 30점. 70점이 한순간에 증발하는 것이다.

나는 두려웠다. '내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내가 사회에 존재할 수 있을까?'가 진짜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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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이름으로 했던 기여


대기업에 다닐 때, 나는 내가 '가치 있는 일'을 한다고 믿었다.

2022년, FUTURE9 프로그램을 5년 연속 1위로 이끌었을 때. 130억원 규모의 전용 스타트업 펀드를 만들었을 때. 업계에서 Unique하게 스타트업 협업+투자 연계 모델을 만들었을 때…

'나는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퇴직을 앞두고 깨달았다.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었다. K금융그룹이라는 조직의 이름으로 한 일이었다.

나 혼자서는 00억 프로젝트를 할 수 없다. 나 혼자서는 FUTURE9를 1위로 만들 수 없다. 나 혼자서는 업계를 움직일 수 없다.

조직의 힘이었다.

그렇다면 조직을 떠난 나는?


2024년, 작은 연결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2024년 봄, 나는 아직 K금융그룹 팀장이었다. 그때 고고팩토리 대표님을 만났다.

"팀장님, 알뜰폰 사업자가 너무 많아요. 차별화를 통한 성장이 필요한데... 키즈폰이나 시니어폰 같은 틈새시장을 공략하고 싶은데, 개발할 IT 인력이 없어요."

그리고 6개월 후 가을, 정부지원 프로그램에서 디오랩스를 멘토링으로 만났다.

"팀장님, 기술은 자신 있는데 판매가 안 돼요. 대형 통신사는 이미 자체 앱이 있고... 중소 통신사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순간, 문득 떠올랐다.

'6개월 전에 만난 고고팩토리 대표님.'


새로운 정체성의 발견


"고고팩토리 대표님, 제가 괜찮은 앱 개발사를 알고 있는데, 한번 만나보시겠어요?"

일주일 후, 디오랩스 사무실에서 첫 미팅이 열렸다.

나는 중간에서 조율했다. 투자 구조, 수익 배분, 개발 일정, 마케팅 전략.

8년간 수없이 봐왔던 협상 테이블.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K금융그룹의 이름이 없었다. 00억 예산도 없었다. 팀원 10명도 없었다.

그냥 나, Jason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이게 기여일 수 있겠구나.'


일의 새로운 의미


전기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일은 개인에게 정체감을 심어준다. 일을 통해 자신에 대한 가치와 자존감을 형성하기 때문에 일은 다분히 자아실현적인 의미를 지닌다. 은퇴 후에는 얼마든지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 또는 자신이 원하는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다."

2025년 10월, 전화 한 통이 왔다.

"팀장님, 2개월 만에 매출 15억입니다! 키즈폰 226대 판매, 신규 가입자 700명 넘었어요!"

전화를 끊고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대기업 시절, 프로젝트로 연간 00억 비용을 절감했을 때. 당시엔 뿌듯했지만, 1년 후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팀장님이 없었으면 저희는 지금도 투자자 찾아 헤매고 있었을 겁니다." "팀장님 덕분에 우리 직원들이 이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됐어요."


자아정체감의 재구성


퇴직 후 1년이 지난 지금.

나의 자아정체감은 이렇게 바뀌었다.

Before (직장인 시절):

사회적 정체성 90점 (K금융그룹 팀장)

개인적 정체성 10점 (???)

합계: 100점


After (지금):

사회적 정체성 30점 (벤처투자자, 컨설턴트, 멘토)

개인적 정체성 80점 (연결하는 사람)

합계: 110점 �


어떻게 가능했을까?

준거집단을 바꿨기 때문이다.


회사 동료들 사이에서는 '팀장님'이었지만, 스타트업 생태계에서는 '연결해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회사를 떠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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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는 숫자가 아니라 깊이다

나는 이제 알았다.

조직의 이름으로 한 기여:

2,000명 조직의 시스템 개선

00억 프로젝트 성공

연말 평가서 한 줄: "프로젝트 완료"

1년 후 아무도 기억 못함


내 이름으로 하는 기여:

6명 스타트업 1곳의 생존 및 성장

40명 중기업 1곳의 신규 매출 50억원 달성

20명으로 확대 예정인 일자리

"팀장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평생 기억될 인연


어느 쪽이 더 큰 기여일까?

기여는 숫자가 아니라 깊이다.


"지금 알았더라면" ④: 개인적 정체성을 일찍 키웠어야

만약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사회적 정체성 70점, 개인적 정체성 30점 상태를 유지하지 않을 것이다.

10년전: 적극적인 멘토링 및 네트워크 확보 (개인적 정체성 +10)

5년전: 스타트업 생태계 참여 (개인적 정체성 +20)

1년 전: 네트워크 연결 활동 (개인적 정체성 +30)


소프트랜딩 시점:

사회적 정체성 60점 (회사 의존도 낮춤)

개인적 정체성 60점 (연결하는 사람)

합계: 120점


이렇게 준비했다면, 퇴직 후 정체성 붕괴는 없었을 것이다.


당신도 기여할 수 있다

"나는 특별한 재능이 없는데..."

괜찮다.

전기보 작가의 말을 기억하라.

"일은 개인에게 정체감을 심어준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냐가 아니다. '누구를 위한 일'이냐다.

회사를 위한 일에서, 진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한 일로.

조직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내 이름으로.

그 전환이 당신을 흔들리지 않게 만들 것이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이 사례가 한국경영기술지도사회 '비즈니스지원단 현장클리닉 우수사례'로 선정되었다.

심사평: "6명의 개발팀이 5개월 만에 전국적인 유통망을 확보하고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만들어낸 성과는, 올바른 매칭과 지원이 있다면 작은 스타트업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읽었다.

"한 사람의 개인적 정체성이 진짜 기여를 만든다."

당신도 할 수 있다.

사회적 정체성 70점에서 개인적 정체성 70점으로. 조직의 이름에서 내 이름으로.

숫자에서 깊이로.

그것이 진짜 기여다.


다음 장 예고: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퇴직 준비의 골든타임. 10년 전, 5년 전부터 무엇을 준비했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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