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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은 Oct 27. 2023

거부

자신과의 관계 #2

앞서 자신을 속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왜 자신을 속이려 할까?

뭐가 득이 된다고.


자신을 속이는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길 어려워한다.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속이면서까지 '왜곡된 자기'를 만들어야만 자신을 볼 수 있다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나'를 아는 것, '나'를 이해하는 것, '나'를 받아들이는 것,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현실을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 현실을 살 수도 없다. 아니, 자신의 과거도 보지 않으려 한다.

왜냐면 그들은 스스로 보지 않으려 했던 과거로부터  때문이다. 지금의 자신은 돌이키고 싶지 않은 과거의 자신이 켜켜이 쌓여서 완성된 실체이기 때문에 보는 것을 금한다. 스쳐 지나갔던 실수, 잘못, 죄들이 똘똘 뭉쳐져서 '나'라는 형상으로 완성된 것처럼. 그들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없으니 아예 모른 척하기로 한 거다. 그 끝의 선택은 회피고 거부다. 그런 부정한 덩어리가 자신일리 없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것처럼. 자신이 한 행동의 선한 것, 깨끗한 것, 완벽한 것만 취하고 싶어 한다. 그러니 더럽고 추악하고 악취가 난다고 하는 것은 깊숙이 묻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종국에 자신을 거부하고 밀어내더라도.


그렇담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누구나 실수한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다.

또한,

누구나 죄를 짓는다.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정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 누구나 갖고 있는 것들이다. 어떻게 없을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완벽하게 하얀색인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를 성자와 성인들과 비교하며 굳굳이 죄를 덧입힌다. 그리고 끊임없이 질책하고 판단하고 벌을 준다.

그들이 부정한 덩어리여서가 아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삶을 살았고 나름의 열심히 견디고 버티면서 힘겹게 살아왔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로하고 쓰다듬고 안아주기보다 자신을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며 밀어내는 것 말고는 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을 벼랑으로 밀어내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건강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스스로를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들은 둘 중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벌주던지, 아니면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속이던지. 억지로 강한 척 궁지로 몰 필요가 없다. 우리 모두가 선함도 악함도 찌질함도 의로움도 모두 갖고 있는데. 그중에서 어느 한 면 만을 보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 부당한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자신을 몰아붙이는 사람들은 행복할 수가 없다.  늘 어딘가 모르게 외롭고, 공허하며,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못마땅한 마음을 가득 안고 살아간다. 쾌락으로 순간을 모면하는 것도, 여행으로 현실을 잠시 도피하는 것도, 술이나 게임으로 환상 속에 머무는 것도, 지속적으로 할 순 없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것. 그것에서부터 불행이 시작된다. 끊임없이 인정하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을 이제는 좀 소화시켜야 한다. 그 순간의 자신은 어리석었을지라도 지금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봐야 한다. 자기 연민에 빠지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과거의 자신도, 지금의 자신도, 인정하라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야 미래가 생기고 숨통이 조금 트이게 된다. 평생 자신을 속이며, 가면 속의 자신이 진짜라고 주문을 외워도. 자신의 내면에서는 결코 소화가 되지 않는다. 자신과의 관계조차 틀어진 사람이 타인과의 관계를 잘 맺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니 사는 것이 답답하고 안 풀리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혼자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거울 속의 비친 자신을 그대로 보고 자신을 잘 정비만 할 수 있어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백설공주의 왕비가 거울 속의 비친 자신의 추함을 인정했더라면, 적어도 자신이 제일 아름답지는 않다는 것을 인정했더라면, 파국이 일어났을까? 거울을 잘못됐다고 탓하고, 거울이 말한 대상을 죽이기 위해 계략을 짜면서, 오히려 왕비는 거울 속의 비친 마녀의 모습으로 더욱더 변해갔을지 모른다.


물론 자신을 잘 모르겠는 사람도 있다. 자꾸만 자신을 숨겨오고 왜곡했기 때문에 이젠 더 이상 진짜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혹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기가 두려워서 다시는 볼 수 없게 검은 천으로 덮어놓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 혼자서만 하려고 하는지. 혼자서 건널 수 없는 다리도 누군가와 함께 한다면 건널 수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절대 혼자가 아니다. 혼자라고 스스로만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스스로를 밀어내지 않길 바란다. 이 세상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다. '함께'를 떠올려보자. 그게 누구라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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