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천안문 사태와 중국 대학생
중국을 곤궁에 빠뜨린 영화
지난 2006년 열린 59회 깐느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은 홍콩의 왕가위 감독이 맡았었다. 공식 경쟁부문에는 중국 로우예(婁燁)감독의 [여름궁전](頤和園)이 포함되어 있었다. 로우예는 [수쥬]로 평론가의 절찬을 받았던 중국의 떠오르는 6세대 감독. 베일에 가렸던 그의 신작 [여름궁전]이 깐느에서 공개된다는 것은 중국영화 애호가에겐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깐느 상영이 수월하지는 않았다. 중국 당국의 반출허가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2년에 제정된 중국영화법(전영관리조례)에 따르면 중국에서 영화를 상영하려면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할 뿐만 아니라, 해외영화제에 출품될 영화도 당국의 상영허가를 받아야한다고 규정되어있다. 이런 규정이 들어간 이유는 뻔하다. 중국의 어두운 면을 ‘예술적’으로 묘사한 작품이 서구사회에 소개될 때 중국의 국가이미지가 추락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로우예는 어쨌든 필름을 ‘임의로’ 깐느에 보냈다. 중국당국은 발끈했다. 그리곤 규정에 따라 5년간 중국내 작품 활동을 불허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런 소동과는 상관없이 이 영화는 그해 부산국제영화제 때 상영되었고,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다.
천안문의 연인
영화는 1989년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중국 동북부 조선족 자치구의 도문(圖門). 우리에겐 압록강을 건너 자유를 찾아 고국을 등지는 북한 이탈 주민이 지나가는 경로로 익숙한 곳이다. 이곳의 조선족 처녀 위홍(余紅,하오레이)이 주인공이다. 잡화점을 하는 아버지. 벽에는 주석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 처녀. 곧 고향을 등지고 서울(베이징)로 떠나갈 것이다. 대학 입학허가증에 손에 쥔 것이다. 고향을 떠나기 전날 밤, 위홍은 사랑하는 연인 샤오쥔(曉軍,최림)과 별안간 섹스를 하게 된다. 그러곤 다음날 기차를 타고 베이징의 북청(北淸)대학에 입학한다. 질풍노도의 시기. 위홍은 곧 북경의 대학문화에 휩쓸린다. 친구도 사귀고, 애인도 사귀고, 섹스도 한다. 이 여자의 반은 애인 찾기이고, 반은 섹스인 모양이다. 대학생의 낭만이나 지식인의 고뇌는 그녀의 일기장 한 귀퉁이에서나 찾을 수 있으려나.
여대생의 방황은 1989년의 중국 정치상황만큼 위태롭다. 친구의 애인과도 섹스를 하게 된다. 바로 그 날 말이다. 그날은 북경 대학생들이 천안문광장에서 민주화 시위를 하던 날. 중국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이들을 진압할 때이다. 청춘의 한 시절은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다. 위홍은 학교를 떠나고 친구들은 독일로 유학 간다. 그 후 10년의 세월은 그렇게 흘러간다. 소련이 붕괴되고, 독일 장벽이 무너지고, 홍콩이 ‘영예롭게’ 중국의 품에 안긴다. 기록필름만큼 급박한 정세 변화에도 불구하고 위홍은 여전히 방황한다. 변함없이 섹스를 하고 말이다. 그러다가 독일에서 돌아온 옛 친구, 옛 애인, 옛 섹스파트너 쩌우웨이(周偉,곽소동)와 재회하게 된다. 둘은 10년의 세월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모른다. 그들의 길은 엇갈린다. 중국은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영화 [여름궁전]은 원제는 [이화원](頤和園)이다. 이화원은 북경 북쪽에 위치한 관광명소이다. 명나라 때 만들어진 뒤, 그리고 청말 서태후가 나랏돈을 쏟아 부으며 완성시킨 황제, 아니 서태후를 위한 여름 별궁이다. 영어제목 ‘섬머 팔라스’를 그냥 우리말로 [여름 궁전]으로 옮긴 것으로 조금 뜬금없는 느낌이 든다. 차라리 [이화원](이허위앤)으로 했으면 하는 느낌이다. 대학시절 노을이 진 이화원 널따란 호수 위 작은 보트 위에서 중국 연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 영화가 깐느에 진출하는데 중국당국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섹스 장면 때문인지 거친 핸드헬드 카메라가 잡은 천안문 사태 장면 때문인지 모르겠다. 천안문 사태는 중국당국에겐 아킬레스 근과도 같다.
1989년은 적어도 중국역사에 있어서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선포에 비길 만큼 중요한 해이다. 등소평의 개혁개방노선이 가속화될수록, 경제적 측면에서 공산주의에서 멀어지고 자본주의에 경도될수록, 인민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소망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 불을 지르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989년 4월 15일, 호요방 전 주석이 죽는다. 어디든 민주화운동의 선두주자는 대학생이었다. 북경의 대학들에 대자보가 붙는다. “죽을 사람은 죽지 않고, 죽지 않아야할 사람이 죽었다”는 그런 불온한 내용. 그리고 이때부터 대학생들은 목소리를 높여갔고,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천안문 광장은 학생들의 군중집회 장소로 변했다. 중국당국은 (여전히 살아서 중국을 통치하던 등소평, 이붕 총리, 그리고 수많은 군 원로인사들) 학생들이 ‘미 제국주의의 조종에 놀아나고 중국을 붕괴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하고 있다며 시위를 강제진압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6월 4일, 탱크를 앞세우고 학생시위를 진압한다. 이때 탱크진입에 맞섰던 한 남자의 사진이 강인한 인상을 남긴다.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체포되지 않은 민주화 시위 주도자들은 하나둘 중국을 빠져나가야했다. 미국으로, 일본으로, 대만으로 정치적 망명을 해야 했다.
천안문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군중집회는 두 차례 열렸었다. 주은래 총리가 죽은 뒤 발생한 1976년 사태와 문제의 1989년 사태. 1989년의 천안문사태는 6.4천안문 사태라고도 한다. 1989년의 천안문 사태는 중국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민주국가들이 중국의 잔혹한 진압방식에 항의와 비난을 퍼부었지만 중국은 자기들만의 운명을 개척할 ‘숙명’이 있다고 강변했다. 중국이라는 거대제국이 무너질 때 동아시아, 아니 전 세계를 뒤흔들 충격파를 생각해보라. 그 때문인지 천안문 사태의 불가피성을 논하는 이야기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당시 중국 대학생들의 운명도 바뀌었다. 이 영화에서는 천안문 사태의 전개과정과 그 이후 이야기는 거칠고 투박스럽게 그려진다. 격랑에 휩싸인 개별 존재들의 불가항력적 운명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 지도자들에게는 무척 다행스런 일이겠지만 1989년 이후 중국 대학생들은 중국의 민주화에 대한 철학보단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사냐”라는 데만 골몰하게 되었다.
리우예 감독은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는 1989년에 북경에서 대학을 다니던 한 조선족 여자의 방황을 통해 중국인의 사유방식을 보여준다. 대학 캠퍼스이든 직장이든 그들은 여전히 숨을 쉴 것이며, 섹스를 할 것이며, 자신의 돈밖에 보이지 않는 미래에 고민할 것이다.
리우예 감독은 그 후 어찌되었을까. 리우예 감독은 여전히 불만이다. 당국이 왜 자기 영화를 막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뚜렷한 이유조차 알려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영화당국은 공식적으로 필름이 너무 어두워 검열할 수가 없었다고 밝혔을 뿐이다. 내용이 아니라 ‘기술적’인 이유라고 강변했다. 로우예 감독은 영화 <살인연극>(风中有朵雨做的云)은 2020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 중국의 대도시의 도심지 재개발 프로젝트에 얽힌 부정부패, 비리의 적나라한 모습과 치정극을 결합시킨 영화였는데 여전히 그가 중국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 반가울 따름이었다.
<여름 궁전>은 로우예 감독의 날 것 같은 연출에 배우들의 연기가 어우러진 역작이다. 노출 연기를 마다 않은 위홍 역을 맡은 배우는 학뢰(郝蕾)란 배우이고, 주어웨이 역은 곽소동(郭小冬,곽소동)이 맡았다. 투먼의 남자친구 역은 최림(崔林)이고, 독일에서 결국 자살하는 리티(李偍)는 호령(胡伶)이란 배우이다. 다들 굉장한 연기를 했다.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