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황제 암살자들
‘붉은 수수밭’, ‘홍등’ ,‘집으로 가는 길’ 등의 문예물을 잇달아 내놓으며 이른바 중국의 제5세대 감독의 선두주자로 불리었던 장예모 감독이 2002년 내놓은 영화는 ‘중화제국’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진(秦) 나라 시황제 이야기를 다룬 <영웅>이다. <영웅>은 역사물인 동시에 지극히도 정치적인 드라마이다. 실제 이 영화가 홍콩에서 개봉되었을 때 작은 소동이 있었다. 주연배우 양조위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진시황은 영웅이다. 중국을 통일시켰다. “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그 말은 중국 당국의 (1989년) 천안문 사태 진압과 오버랩되며 논쟁이 가열되었다. 어쨌든 양조위는 "배우로서 영화 속 캐릭터에 몰입하는 것은 당연하다. 영화 속 ‘잔검’이란 인물은 진시황에게 매료된 인물이다."라고 해명했다.
이연걸, 장만옥, 양조위, 견자단, 장쯔이라는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스타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비장미 가득한 영웅적 행동을 선보인 영화 <영웅>에서 진정한 영웅은 누구일까. 중국 영화감독 장예모의 속셈이 궁금해진다.
영화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명작 <라쇼몽>의 형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무명(無名)' 이연걸이 진시황을 배알 한다. 진시황은 지난 몇 년 동안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3년 전, ‘잔검(殘劍)’ 양조위와 ‘비설(飛雪)’ 장만옥이 3천 호위병을 뚫고 그의 침소까지 난입하여 그를 암살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누구인가. 기원전 221년, 7국으로 분열된 중국을 무력으로 통일한 군주 아닌가. 7국이 공중분해되었으니 도탄에 빠진 백성이 얼마나 많이 생겼을까. 조국을 잃은 각 나라의 무협 용사들이 조국의 영웅이 되기 위해 진시황을 암살하러 하는 시국이었다. 그런데, 무명이 이들 자객들을 전부 해치우고 진시황으로부터 포상을 받게 되는 순간이다.
진시황은 궁금하다. “무명. 자네의 칼 솜씨가 얼마나 쟁쟁하기에 그들을 다 물리칠 수 있었는가?”라고. 그러면 무명 이연걸은 그가 어떻게 이들 천하영웅과 대결하여 승리를 하였는지 세세히 이야기한다. 묵묵히 무명의 말을 듣던 진시황은 그의 말이 거짓이란 것을 알아차린다.
이야기는 무명이 ‘장천(長天)’ 견자단과 대결하고, 이어서 양조위와 장만옥이 대결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관객은 이연걸의 진술과 진시황의 반박 속에서 실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다.
이연걸은 진시황에게 "당신이 과소평가한 사람이 있었다!"면서 그게 누구인지를 말하고, 진시황은 "네가 과소평가한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누구이다."라고 말한다.
이연걸도 결국 진시황을 죽이러 온 자객일 뿐이다. 당시 진시황은 주위 100보 내로 접근하는 사람은 모두 자객으로 여기고 죽였다. 이연걸이 최대의 공훈을 세운다며 - 예를 들어 최고의 자객으로 알려진 견자단, 양조위, 장만옥을 죽이고 그들의 무기를 갖다 바친다면- 진시황은 주위 10보까지 가까이 오도록 하여 알현케 하는 것이었다. 무명 이연걸은 지난 10년 동안 ‘十步殺手'의 절기를 익힌다. 만약, 단 한 번이라도 진시황 근처 10보까지만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진시황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실제 역사서에 남아있는 진시황 암살 사건과 같다. 실존인물 ‘형가’가 진시황의 죽이기 위해 접근할 때 그는 중요한 군사지도와 장군의 목을 지참했었다. 그리고 사기열전에 보면 이렇게 단 한 번의 무력시위로 진시황을 죽이려 하였었다. (커다란 바위를 시황제의 마차에 던지는 것이었는데 마차는 박살이 났었다. 하지만 그 안에 진시황이 없었다.
이런 영웅담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이 그들의 '대업'을 거부한다. 바로, 3년 전 진시황의 목에 칼을 대기까지 했던 잔검(양조위). 양조위는 그날 진시황에게 매료된 것이다. 수십 년, 수백 년 전쟁으로 짓밟힌 백성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천하를 통일시키는 것이고, 바로 진시황만이 그런 대업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의 인정’에 대한 원초적, 아니 정확히는 ‘정치적 판단’의 문제이다. 조나라 칼잡이든, 위나라 검객이든, 초나라 자객이든.. 그들은 결국 중국인이요, 한족인 것이었다.
<영웅>은 장예모의 필모그래피에서 뜻밖의 작품이다. 그가 내놓은 사회주의적 계몽노선의 영화들 속에서 이데올로기를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휴머니즘의 외피를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 <영웅>은 너무나 뻔뻔스럽게 중국만세를 외치는 것이다.
<영웅>에서 장예모는 철저한 대국주의 노선을 걷는다. 양조위가 남긴 글은 '天下'였다. 그것은 곧 진시황의 천하통일 노선이고, 그것은 곧 중국의 정책이다. 더욱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것은 장중한 영화가 끝난 후 올라가는 자막이다. "...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시킨 후 만리장성을 쌓아 오랑캐로부터 백성을 보호한... 護國護民의 영웅이었다...."라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일 때가 있다. 중국에서는 진시황이 죽은 후 줄곧 천하의 폭군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면서 진시황을 죽이려는 수많은 자객 영웅을 만들어왔고 말이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상이 G2급이 되면서 역사책에서나 존재하던 왕년의 폭군, 정복자에 대한 재평가가 계속된다. 그중 진시황을 다시 보는 사람도 있다. ‘조조’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이듯이 진시황을 최고의 C.E.O.로 평가하는 학자까지 생겨났다.
<영웅>은 장예모가 <붉은 수수밭>에서부터 그러해왔던 '색깔'에의 강박관념으로 과잉 치장된 영화로 남을 것이다. 그는 산술적으로 색깔을 분리하여 캐릭터에게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장식을 택했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과도한 CG는 영화를 <와호장룡>의 아류가 아니라 <매트릭스>의 복사물로 만들고 말았다. 관객은 정말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보게 되고, 호수 위를 우아하게 유영하는 절묘한 무술대결을 보게 되지만 그것은 장예모 스타일의 허장성세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배우들의 연기는 개별 팬들이 감상하기에 아깝지 않은 열연이었다.
장예모 감독이 무슨 이유로 무협물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걸어가는 길은 조어대를 향한 보무당당한 행진 같기만 하다. 당신이 과소평가한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장예모 감독인 셈이다.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