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는 왜 자랑할 것이 못 되는가.
우리가 일상에서, '완벽을 기한다.' 라는 말을 자주 쓰잖아요? 그런데, 완벽이라는 건 불가능한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 완벽을 기한다는 말은, 사실 불가능을 지향하는 것이 됩니다.
완벽이 불가능한 개념인 것을 누가 모르냐거나, 그건 그런 뜻이 아니지 않냐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쓰는 완벽주의라는 말에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이 당연한 함정이 있습니다. 이걸 짚고 넘어가고 싶었어요.
완벽주의를 다른 말로 하면, 실패를 원치 않는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거나, '한 치의 실수도 없이 해내야 해.' 우리가 보통 완벽주의를 언급할 땐, 이런 의도로 하는 말일 겁니다. 혹은 이런 의미로 완벽주의를 내세우기도 합니다. '어떤 목표를 이루려면 그 목표보다 높은 기준을 잡거나, 꿈을 크게 가져라.'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꿈을 크게 가지라는 말과 완벽주의는 얼핏 뜻이 통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가능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높은 목표를 상정하고 지향하는 사람, 그러니까 소위 목표를 이루기 위해 꿈을 크게 가지는 자는, 목표를 이룰 의지가 전제되어 있잖아요? 하지만 놀랍게도, 완벽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목표를 이루지 않게 하기 위해 불가능한 목표를 상정하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보자면,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완벽을 기하라.'는 말을 이렇게 바꿔보면 뉘앙스가 많이 달라집니다. '철저하게 준비해서 과정 상의 어떤 변수가 생겨도 그것에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하라.'
우리는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잘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퉁 쳐서, '완벽을 기해라.' 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저 말이 더 정확하고, 맞는 말이고, 심지어 가능성이 더 높은 방법을 제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실수를 하거나 변수가 일어나도 그것에 유연하게 대처해서, 성공적으로 목표에 다가설 수 있게 하자는 뻔하디 뻔한 말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완벽 대신 이렇게 잘 말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완벽이 더 짧고 간단한 단어라서 말하기 편하니까? 뭐,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그 말은 좀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완벽을 기한다는 말은, 희한하게도, 뭔가 받아들이기가 오히려 쉽습니다. 왜? 완벽은 불가능하니까. 여러분들이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완벽을 기한다는 말을 하는 순간, 우리는 사실, 은연 중에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완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목표 앞에 서서 완벽을 기한다고 말하는 순간, 마음 속의 그 불신에 기댑니다. 잘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맘을 가진 적이 정말 없는지 말예요. 적어도 저는, 완벽을 다짐하며 숱하게 그런 식으로 도망갔습니다.
누군가가 완벽을 기하라고 다그치지 않더라도, 스스로가 '준비가 되면, 그 후에 시작하겠다.' 라거나, '목표에 근접했지만 아직 완벽한 건 아니야.' 라고 얘길하며 하던 일을 멈추거나, 망설이거나, 도중에 그만두거나, 실패로 간주합니다.
그러고 있는 우리를 누군가가 보고 있다면, 그렇게 완벽을 기하고 있다는 우리에게 뭐라 할 말이 없게 됩니다. 당연하죠. 한마디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아주 작은 그 어떤 흠도 용납하지 않겠다며, 이미 충분하고 이제 그만 끝내도 되는 일을 끝까지 부여잡고 자기 눈에 보이는 작은 티끌을 하나하나 확대해서 보여주며 이게 왜 눈에 거슬리는 티끌인지 열변을 토하고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자신을 스스로 갈아넣고 있는데, 그걸 보며 누가 딴지를 걸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 완벽주의의 태도로 임하는 일의 결과는 항상 같습니다. 어떤 결과일 것 같으신가요? 흠 하나 없는 매끈하고 빛나는 완벽한 엔딩이 기다릴까요? 네, 뭐, 끝이 나긴 합니다. 이제 더는 계속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멈추면, 무언가에 미치지 못한 결과이기 때문에 실패로 간주되겠죠. 이게 바로, '대충 하느니, 안 하는 게 낫다.' 라는 말의 진짜 숨은 의미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완벽주의라는 개념에 매료되는 이유는, '절대적인 가치' 에 대한 일종의 로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왕 내가 하는 일이라면 매우 의미있는 일이어야 한다거나, 혹은 이러나저러나 전혀 리스크가 없는 전혀 의미 없는 일이거나. 내 앞에 놓인 선택지를 이렇게 딱 떨어지게 나눠놓고, 나의 선택을, 쉽고도 완벽한 상태에서 내리고 싶은 욕망 말입니다. 그래서, 완벽주의는 종종, 이런 극단적인 이분법과 같은 뜻일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완벽해야만 하는 일, 혹은 아무 의미 없는 일. 정말 그럴까요? 세상의 일은 그 둘 사이의, 무수히 많은 적당하고 애매한 일들이 대부분인걸요.
제가 이것을 깨달은 사례가 있습니다. 저는 남들이 평가하기를, 꽤나 남의 말을 잘 경청해준다는 칭찬을 받곤 했습니다. 스스로도 그에 대해 자부하는 바가 있기도 했습니다. 친한 지인들은 그래서 농담으로 고아원 원장의 바이브를 지녔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누군가에게 제 얘기를 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습니다.
왜 그랬던걸까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만약, 살풀이라도 해야겠다며 쏟아놓는 넋두리라면, 듣는 이에겐 중요하지도 의미있지도 않은 말들이니 굳이 내가 떠들 필요가 없고, 그게 아니라 내게 매우 중요하고 시급하고 무거운 이야기라면, 그것을 듣는 이에게 너무 부담이 될 것이고, 만약 듣는 상대방이, 그 중요하고 시급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부담없이 듣고, 대충 듣는 둥 마는 둥, 하나마나 한 조언을 해준다면, 나는 그 상대방에게 실망을 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려면 의미있는 이야길 해야 하고, 그 의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상대방과 나와의 대화는 이상적인 대화가 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나에 대한 완벽한 공감, 문제에 대한 궁극의 해결책이 대화 속에서 도출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저 또한 알고 있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러니,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이렇게 결론이 나는 것이지요. 극단적 이분법. 완벽주의이지요.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가요? 우린 서로 그냥저냥 어찌저찌 내 마음을 대충 전달하기도 하고, 그걸 대충 알아먹은 상대가 그냥저냥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위로와 힘이 되기도 하고, 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은 말들을 쏟아내다 스스로의 마음과 생각이 정리되기도 하고,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시시콜콜 나누다가 누구보다 소중한 관계로 발전하기도 하잖아요? 세상 대부분의 일은, 이렇게 완벽을 기하지 않아도, 실제로 수많은 성과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완벽은 판타지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왜 자꾸 이런 식으로 완벽주의라는 말을 사용할까요? 이렇게 변명하려고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완벽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 도달하지 못했고, 역시나 완벽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니 완벽이라는 불가능을 꿈꾸었다는 것만으로 실패라 할 수 없으니, 이것은 실패가 아니다.'
그러니, 완벽주의자에게, '졌.잘.싸' (졌지만 잘 싸웠다.)야 말로 악몽인 것입니다. '졌.잘.싸' 가 가능하려면 어때야 하죠? 노력을 해야 하고, 과정을 충실히 여겨야 하고, 노력과 과정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그런데, 완벽주의는 정확히 그와 반대라는게 문제입니다.
완벽주의가 심화되면, 부정적인 측면으로 일종의 '자기충족적 예언'을 하게 됩니다. 자기충족적 예언의 일면은 이렇습니다. 자신의 불안을 불식시키기 위해, 그 불안의 증거를 찾고, 그 증거에 따라 행동하고, 그렇게 해서 종국엔 오히려 그 불안이 실현되게 만드는데, 그렇게 되었을때 오히려 그 불안에서 벗어나는 패턴.
스스로가 자신의 불안이 실현되는 쪽으로 스스로의 행동과 사고를 몰고 갔지만, 그런 자신의 의도와 수집된 증거의 결과로써 그 일이 일어났지만, 그 결과 자체가 또 다른 증거가 되는 확증편향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일어나고, 업무나 스스로에 대한 평가에서도 꽤 자주 일어납니다. '거 봐,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뭐랬어? 안 된다고 했잖아.' 이런 식으로요.
그럼 이걸 어떻게 떨쳐낼 수 있을까요? 불안은 여전하고, 망할 거 같다는 나 스스로의 생각을 고칠 수 없다면요. 이 불안을 어떻게 불식시킬 수 있을까요? 완벽을 기한다는 것은 더이상 해법이 아닐텐데 말입니다.
우선, 그 불안한 마음을 지닌 그대로, '그냥'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죠.
요즘 제가 매우 과몰입해서 즐겨 보는 예능프로그램이 하나 있습니다. 연예인들이 축구팀을 결성해서 리그전을 치르는 '골 때리는 그녀들'입니다. 거기 출연한 선수들은 모두 축구에 진심입니다. 때론 월드컵보다 더 재밌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튼, 거기서, 배우들로만 구성된 팀의 주장은 최여진 배우입니다. 최여진 배우가, 매주 중요한 경기에서 패널티킥을 차게 된 순간이 있었습니다. 반드시 넣어야 하는 골이었지요. 그 순간, 모든 팀원들은 마치 그런 순간이 오는 것을 미리 예행연습이라도 한 양, 자신들의 주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괜찮아. 어차피 못 넣을거야.' '우리 주장은 패널티킥 못 넣어.' 주장도 스스로 그렇게 말합니다. '응, 나 안 넣을 거야. 못 넣어. 못 넣으려고 내가 차는 거야.'
불안했겠지요. 혹시나 못 넣으면 경기에 질 거라는 예감이 감돌았을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긴장한 티가 역력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의 불안을 내보이고,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차야 하니까 찼습니다. 최여진은 골을 넣었습니다. 못 넣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괜찮았을 겁니다. 다음 기회를 노렸겠지요.
그러니, 제 생각엔, 어떤 일을 잘 해내려고 죽기살기로 노력하거나 사활을 거는 것이, 오히려 불안을 더 높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은연중에 자신이 실패할 거라는 암시를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아요. 그렇게 사활을 걸면, 그 일은 실패하면 절대로 안되는 일이 되어 버리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완벽을 기해야하니까, 어떠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상태에 자신을 몰아넣는 겁니다. 정말 그 상태가 성공률을 더 높여줄까요? 아니면, 어떠한 실수에도 대처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가지는 것이 더 성공률을 높일까요?
그래서, 중요한 일이라면, 완벽을 기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걍 대수롭지 않게 해치워버리는 것이 차라리 더 좋은 방법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뿐하게 해치워 버리려면, 일단 그냥 시작해버려야 되는 것 같아요. 언제나 시작이 어려운 법이니까요.
일단 그냥 시작해버리고, 어떻게든 꾸역꾸역 마무리를 지어놓고 보면, 누가 방법을 알려주거나 등을 떠밀지 않아도, 저절로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고치게 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몸상태가 어떻든, 매일 원고지 20매 분량의 글을 쓴다고 인터뷰한 것을 본 적 있습니다. 글이 아무리 안 써져도, 오늘 그렇게 쓴 분량을 내일 다 고친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오늘의 20매를 쓴다... 이건 매우 일리있고 지혜로운 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글이 너무 잘 써지는 날은? 그 날도, 20매를 채우고 나면, 오늘 분량 끝! 이러면서 걍 멈춰?
놀랍게도, 하루키는 그런 날에도, 20매를 쓰면 즉시 멈춘다고 하더군요. 그 이유는 이러했습니다. 글이 술술 풀려서 순식간에 20매를 다 채워놓고 나면, 그 다음날엔 이미 떠올랐던 글을 이어서 쓰면 되니까 그 날의 글쓰기를 시작하기가 매우 쉬워진다고요.
그러니까, 가장 최선의 길, 최상의 상태, 최고의 집중력, 완벽에 가까운 환경, 뮤즈가 찾아온 순간, 궁극에 가까운 문장을 써내려갈 절호의 기회... 이런 건 없다는 거예요. 그냥 매일, 장작을 패듯 하루의 할당량을 채우는 것만으로도, 자기가 원래 목표했던 수준, 혹은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성과를 이룩할 수 있는 능력과 에너지가 생긴다는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할 때 그럴 수 있냐구요? '그냥' 할 때.
그래서, 완벽주의의 이면에 숨은 불안을 불식시키는 방법은, '난 완벽하지 않으니, 걍 하던대로, 일단 해보자.' 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일단 걍 시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잘 해결될까요? 결과까지 항상 성공적일까요? 일단 시작은 했는데 계속 찝찝하고 마음 속 의심이 커지면 어떡할까요? 일단 시작을 한 후에는, 또 다른 하나의 비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택, 혹은 결정을 내렸으면, 계속하는 겁니다. 단, 그 선택과 결정 전에는 어떤 의도를 지니고, 방향성을 가지고 스스로를 진단해 보아야겠지요.
제가 고등학교 때, 학교에 잘 적응을 못해 고생을 좀 했습니다. 야간자율학습, 체벌 등이 공공연하던 시기였는데요, 어느날, 급기야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도서관 건물에서 뛰어내리게 됩니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서 도망을 친 건데요, 뭐 다행히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어찌저찌 퇴학은 당하지 않고 끝까지 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그 즈음의 저는, 도대체 학교에 왜 매일 나와야 하는지, 난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나는 왜 이렇게 학교가 싫은 건지, 이런 답 안 나오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멍때리며 시간을 죽였단 말이지요. 어느날, 아예 만족할만한 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보자 맘 먹었습니다. 정말, 수업시간, 쉬는 시간, 자습시간, 친구들이랑 집에 오가는 시간 내내, 그 생각만 했습니다. 친구들에게 그것만 물었구요. 한 일주일 쯤 그렇게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러다 '대학은 가자.' 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일기장에도 그렇게 쓴 것이 아직 기억에 또렷합니다. 대학은 가고 싶었습니다. 좋은 대학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예요. 캠퍼스의 낭만은 실컷 함 느껴봐야죠. 어차피 그러다 곧 군대에 끌려갈테니까요. 대학을 가려면 자퇴는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퇴를 해도 놀아줄 친구들은 대부분 학교에 있을테고, 혼자 학원을 다니며 친구들과 떨어져 지내느니, 학교에 나오는 것이 차라리 나아보였습니다.
학교에 나오기 싫은 이유가 되는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해봤습니다. 다른 반의 재수없는 모 군, 말투부터 수업내용이나 체벌방식까지 도무지 맘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는 담임 등등. 재수 없는 모 군과는 날을 잡고 둘만의 찐한 대화로, 의견을 나눴다기 보단 서열을 정했고, 담임 선생님이 야자감독을 맡은 날, 보란듯이 도서관 3층에서 뛰어내렸습니다.
뭐, 이런 자잘한 디테일은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건, 결정을 내리기 전에, 결정을 위해 시간을 보냈고, 그 동안 그 당시의 최선을 다해 숙고했고, 그 결과로 도출된 것에 스스로 따르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기장에도 그리 써두었습니다. '지금 이 결정을 한 나를 믿고, 그렇다면 결정에 동의하고 따른다. 학교는 계속 다니고, 대학은 가기로 했으니 간다. 단, 여기를 떠나 수도권으로 간다. 어디든 상관없다.' 이렇게 결정하고 그 결정대로 될 것을 상상해보니 기분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매일 등교를 하며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고, 스트레스를 받을지언정 금새 잊었습니다.
물론, 그 이후로도, 그 당시의 결정을 뒤흔들만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면 저의 선택을 재고했을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잘 일어나지 않더군요.
그러기로 결정했으니까 계속 해보는 것. 그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다보면 오르막내리막, 갈림길이 나옵니다. 그런데, 페달을 계속 밟고 있는 동안에는 그 길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갈 길만 보이지요. 그런데 페달을 멈추고 서면, 갑자기 무수하게 갈라진 갈림길들이 눈 앞에 들어오기 시작해요. 그럼, 처음에는 그 수많은 갈림길들이 없었는데, 때 마침 그 순간 눈 앞에 나타나는 걸까요? 아니죠. 처음부터 있었지만, 내가 목적지를 정해놓고 내 갈 길을 가고 있는 동안에는, 그 길들이 고려사항이 아니었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일단 시작하기' 다음에 필요한 것은, '계속 가보기' 인 것 같아요.
부산국제영화제가 지금의 위상을 갖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초대 집행위원장이었던 김동호 위원장의 사례가 생각납니다.
그 분은 그냥 문화부 공무원이었습니다. 어느날, 우리나라에도 국제영화제가 있어야 되지 않겠냐는 시대적 요구와 공공기관의 새로운 업무로써, 부산국제영화제 개최를 담당하게 된 김동호 위원장은, 그 일에도 평소의 태도대로 임했습니다. 그의 평소 태도는 이러했습니다. '주어진 일은, 이왕이면 탁월하게 해내려 노력한다.'
그가 영화인들과 뭔가를 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영화랑은 관련도 없는 사람이었고, 인맥도, 요령도 없는 새로운 분야의 새로운 일을 개척해내야 하는 상황이었겠지요. 그렇다고, 영화인들이라고 해서, 그보다 더 잘 아는 분야도 아니었습니다. 그전까지, 우리나라는 국제영화제를 개최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 이후의 행보는 영화계에는 전설로 회자됩니다. 자신들의 상권이 침해받을 거라 거세게 반대하며 모여든 상인들과 지역 유지 수십 여 명을 한데 모아 잔치를 열어주고, 거기 앉은 모두에게서, 단 한 명도 제외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술을 한잔 씩 받아마셨다던가, 영화제 초창기에는, 유럽에서 어렵사리 초대한 해외영화제 위원장들과 함께 극장 처마 아래 신문지를 깔고 앉아 소주를 밤새 마셨다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 새벽 6시면 해운대 백사장을 뛰는 위원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던가, 생긴지 십 년이 채 되지 않아 아시아 최대규모의 영화제로 발전시켰고, 매년 출품작 수를 갱신했다던가.. 등등. 믿을 수 없는 일화들이 수도 없습니다. 그 분이 위원장으로 계실 동안, 전세계의 수많은 감독들과 영화제 인사들이 부산을 찾아와, 그와 만나 소주를 한 잔 하고 영화 얘길 하려고 한국에 왔다고 농담처럼 고백하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그는, 한국 영화계에 큰 족적을 남긴 어른으로 존경받습니다.
온갖 사람들을 만나 설득하고, 관계를 맺고, 처음엔 못미더운 눈빛으로 거리를 두던 영화인들에게까지 결국 존경을 받기에 이르기까지, 그는 자신이 부산영화제를 완벽하게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해낸 것은 아닐 겁니다. 영화제는 수많은 우여곡절과 시행착오 끝에 서서히 자리를 잡아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이 해낸 일에 대해, 그저 운이 좋았다고,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업적은, 제가 앞서 말한 두 가지가 그대로 적용되는 완벽한 사례라고 생각해요. 일단 시작하고, 방향을 정했으면 계속 하는 것. '내게 이런 일을 맡긴다고? 그래, 해보자. 그런데 어떻게 해야하지? 일단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자. 될때까지 계속해보자.'
우리가 살아가는 일생이, 어떤 일을 해나가는 과정이, 하나의 여정이라면, 우리는 흔히, 이 길이 맞는지, 저 길이 맞는지, 이런 고민을 하며 흔들립니다. 하지만, 이 길과 저 길이 있다면, 그건 뭐가 맞고 뭐가 틀린 길인지가 아니라, 내가 가는 길과 내가 가지 않은 길이란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거예요.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만약 저 길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다면, 가보지 않게 되었을 지금 이 길을 궁금해하겠죠. 그건 어떤 길을 선택해도 똑같이 반복될 뿐입니다. 나의 여정이, 나의 선택이, 그 선택의 결과가,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후회와 돌아봄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헤매고 돌아가고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이 문제도 아닐 뿐더러, 이 길이 평탄하고 순조롭게 뻗어 있는 것이 능사만은 아니겠지요. 내가 지금 어떤 의도를 가지고 페달을 밟고 있는지가, 이 길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겠지요.
누구에겐 지금 이 오르막이 필요하고, 누군가는 잠시 쉬어가는 중일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내리막을 세차게 내달리며 다음 오르막을 준비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충분히 내달린 이 길을 잠시 멈추고, 다른 길로 접어들 채비를 하는 것일지도 모르구요.
그러니까, 어떤 길을 가고 있느냐가 아니라,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을 어떤 마음으로 가고 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나의 선택에 대해서 주도적으로 의식하고 있는가? 그것이, 이 길과 저 길 사이에서 나를 흔드는 불안을 불식시켜주고, 완벽해야 한다는 판타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방법인 것 같아요.
일단 시작하고, 의도를 가지고 선택하고, 결정을 했으면 부단하게 지속하는 것.
이것이 완벽을 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가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태도인 것 같습니다.
완벽주의와 불안, 그리고 이분법, 자꾸 망설이는 습관, 이런 것들에 대해 잘 설명하고 해법과 통찰을 주는 책들이 많습니다. 그 중, 한 권의 책이 떠오르는데요, 여러분들은 굳이 그 책을 사실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면, 그 책의 핵심은 단 일곱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제가 그 일곱 문장을 지금 여기 적어둘 거거든요.
책의 저자는 '개리 비숍'. 책의 제목은 <시작의 기술> 입니다.
일곱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의지가 있어.'
'나는 이기게 되어 있어.'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불확실성을 환영해.'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 나를 규정해.'
'나는 부단한 사람이야.'
'나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여.'
결국, 이 일곱 문장이 무언가를 시작할 때 그걸 가능하게 해줄 주문과도 같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들은,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문장이기도 하면서, 결국은 완벽주의를 타파하게 해주는 문장인 것 같기도 해요.
그러니,
저나 여러분이나,
이제 어디 가서,
'내가 나름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
따위의 말을 자랑삼아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굿나잇 & 굿럭.
위의 내용과,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궁금하다면...여기로~
https://www.youtube.com/watch?v=FvgKn8JIJxg&t=754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