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적인 것에 진절머리가 난다면 해볼만한 생각들에 관하여
요즘 반복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상투성'이예요. 사전에 그 뜻을 찾아보니 이렇더군요.
'상투성 = 늘 해서 습관이 되다시피 한 성질'
제가 개인적으로 나름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려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상투적인 것은 피하자.' 입니다. 그런 생각을 지니게 된 지는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영상을 만들거나, 글을 쓰거나, 종종 누군가를 가르치는 입장이 된 적이 있다보니, 그때마다 역시나 제일 경계해야 하는 것은 '뻔한 소리를 하는 것' 이더라구요.
예를 들어, 순서에 맞게 정확한 용량과 수치를 입력해서 정해진 공식에 따라 무언가를 만들어내거나 답을 도출해내는 일이라면, '늘 하던대로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일 수 있겠지만, 제가 일하는 영역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를 흔히 보아왔습니다. 아니, 좀 더 과장해서 말해보자면, 오히려 '늘 하던대로 하는 것' 이야말로 가장 큰 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엔 저의 그런 생각에 의문을 품게 되는 일들이 좀 있었습니다.
상투적인 것을 피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저의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 저는 소위 '하나마나 한 소리'를 극단적으로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또는, 무언가에 대해 간단하게 말하거나 단정짓는 것에 대해 거의 히스테리컬한 반발심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뭔가를 단순하게 정리해버리거나 단정짓는 것을 피하려고, 그 이면에 있을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이나 변수에 의해 단순해 보이는 명제가 참이 아니게 될 경우에 대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는 말버릇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매우 명징하고 단순해 보였던 논제를 미궁에 빠뜨리면서 대화에 참여한 모두가 이래도 저래도 답이 안 나오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면, 그제서야 생각해볼 수 있을만한 또 다른 답 안 나오는 이야기를 이어가는 걸 굉장히 즐긴 것 같아요.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깨달음이건, 어디선가 접한 새로운 지식이건, 그게 무엇이든, 단정짓듯이 말해버리면, 저는 꼭 거기다 대고 '그게 꼭 그렇지는 않지 않을까요?' 라던가, '이런 경우엔 이렇지 않나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지금 생각에 모순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나요?' 라는 식으로 꼭 딴지를 걸곤 했습니다.
저의 그런, 상투적이거나 뻔한 단정짓는 말들에 대한 반발심이 가장 첨예하게 부딪혔던 대화상대는 바로 저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저의 아버지는 저와의 대화 말미에 항상 이렇게 덧붙이곤 하셨죠.
'넌 네가 제일 똑똑한 것 같지?'
정말로 제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인간이라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신 건 아닐테지요. 그냥, '뭔 놈의 말이 그렇게 많아?' 라는 뜻 아니었을까요? 그럼 저는 또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그건 제가 똑똑해서 잘난 체 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부자지간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의 평행선을 내달리며 마무리되곤 했었습니다.
아무튼, 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리면, 저는 항상 속으로 '아버지는 세상 뻔한 소리, 상투적인 말들을 마치 세상의 진리인 양 가르치려 든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고,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네가 뭔가 새로운 시각으로 어떤 주장을 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세상에는 변치 않는 상식과 순리라는 것이 있는 거야.' 라는 말을 하고 싶으셨던 것 아닐까 싶어요.
제가 요즘, 아버지와의 대화를 다시 떠올리게 된 몇몇 계기가 있습니다. 얼마 전, 영화 업계에서 일하는 지인과 오랜만에 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요. 그는 새로이 쓰여진 따끈따끈한 시나리오를 매일같이 접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가 말하길, 한 번씩 자기가 보기에 너무 이상한 시나리오다 싶으면, 과연 자신이 무언가 놓치는 것이 있는지, 아님 정말로 그 시나리오가 별로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고 하더군요. 보통은 자신의 팀원이나 주변사람들과 자신의 의견이 대략적으로 일치하기에 그럴 일이 없는데, 최근 반복적으로 그렇게 헷갈리는 경우를 맞닥뜨렸다는 거예요. 자기만 좋다고 하는 시나리오라거나, 혹은 자기만 혹평을 하는 시나리오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시나리오를 두고 회의를 하고 피드백을 하다보면, 다들 비슷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의견이 일치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피드백에 사용되는 워딩이 비슷비슷하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캐릭터가 약한 것 같아요.', '갈등이 약한 것 같아요.', '후킹이 잘 안 되요.', '액션이 눈에 잘 안 그려져요.', '서사가 약하다.', '악당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 등등 말이죠. 뭐 충분히 할 수 있는 말들입니다. 제 지인도 피드백을 할 때 그런 말들을 많이 하기도 한답니다. 두루뭉술한 피드백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그러니 이 부분을 이런 식으로 보완하면 어떻겠냐.' 정도의 해결책을 제시하게 된다면 더 좋겠지요.
그런데, 그 지인의 고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런저런 비슷비슷한 피드백들이 오가다가, 결국은 수정, 보완되어서 개선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은 그 기획이 엎어져 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뭐, 단점과 고칠 부분이 많은 데 그것이 개선이 되지 않고 제자리를 맴돌면 엎어질 수도 있지요. 그런데 이 친구가 요즘 느끼는 갑갑함은 조금은 다른 지점에 있었습니다.
자신이 보았을 때엔, 잠재력이 분명히 있고, 소위 지금 핫하게 진행되고 있는 다른 아이템들보다 기본기가 더 탄탄해 보이는데, 회의 때 나온 표피적인 것들, 누구나 말할 수 있는 단점들을 말하다 보면, '이건 진행되지 못할 아이템이다.' 라고 결론지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왜 여기서 멈춰버리는지, 비슷한 보완점이 있는 다른 아이템들은 비슷비슷한 회의 내용과 피드백의 반복임에도 계속 나아가는데, 이 아이템은 어떤 차이가 있길래 이런 것인지, 곱씹어보게 되겠지요. 뭐, 문제가 많은 시나리오라면 당연히 그 차이가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가 말하는 시나리오는 누가 봐도 별로인 시나리오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엔, 자신을 제외한 대부분이 여기서 멈춰야한다고 의견 일치를 보는 것에 대해 그가 느끼는 찝찝함의 이유를 그는 찾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긴 대화를 통해 우리가 도달한 결론은 이러했습니다.
소재가 참신하거나 새롭거나 뭔가 신박해보이는 것들은, 도입부에서 어떻게든 후킹을 하고 나면, '그래, 한 번 해보자. 왜냐면, 이건 적어도 뻔하진 않잖아.' 라며 탄력을 받아 진행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지인이 봤을 때 잠재력이 있고 장르적인 재미에 충실하고, 클리셰가 있다지만 그것은 그 전형적인 장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장치로써 적절히 잘 배치되어 있다 여겨짐에도, 자기가 좋게 평가한 몇몇 '전형적인 시나리오' 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않는 이유는, 단 하나의 이유로 귀결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바로 '전형적이다.' 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좀 뻔한 거 같아요.' 라는 피드백을 받는다면, 그 기획은 가장 빨리 중단될 가능성이 높다는 거예요. 예전 같았으면, 전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여러 가지 단점 중에 가장 안 좋은 단점이 바로 뻔하다는 거야.'
그런데, 요즘의 저는 생각이 좀 바뀌었거든요. 그래서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뻔해서 안 된다는 말은, 마치 실내클리닝이 되어 있지 않으니 이 중고차를 사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아.'
중고차를 파는 분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반짝반짝 윤기가 흐르도록 잘 닦여진 차체의 외관과 깨끗한 새 타이어를 보고 속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눈에 잘 보이는 실내의 상태와 버튼들의 작동상태만으로는 그 차량이 정말로 오래 탈 수 있는 좋은 상태의 차인지 충분히 알 수 없다는 말이지요. 물론, 그런 것들도 중요합니다. 그조차 제대로 관리되어 있지 않은 차라면야 더 할 말이 없겠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차량의 하체에 부식이 있는지 없는지, 부싱류가 마모되어 주행시에 잡소리가 올라오지 않는지, 멀쩡해 보이는 엔진이 혹시라도 한번쯤 해체되어 오버홀한 이력이 있는지 등등 입니다.
제게는 이 이야기가 이렇게 들립니다. 다소 여러 단점이 있더라도 그 차량의 엔진과 하체와 프레임이 괜찮은 상태의 차량이라면, 나머지는 그냥 잘 손보기만 하면 지금까지 달린 주행거리보다 훨씬 오래도록 문제없이 잘 탈 수 있는 차량일수도 있는데, 그걸 잘 모르는 사람이 차를 살 땐, 겉보기에 깔끔하고 깨끗해보이고, 블루투스 연결이 잘 되고, 큼지막한 사제 네비게이션과 하이패스 단말기가 옵션으로 달려있고, 통풍시트 옵션이 있는지 등으로 구입 여부를 판단하는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야 말로, 없으면 새로 달거나, 고장나 있으면 손쉽게 고쳐 쓰면 될 문제인데 말예요. 그런 것들이 아무리 깨끗하고 잘 수리되어 있다 하더라도, 엔진에 문제가 있거나 부식이나 누유가 생기기 시작한 차량이라면, 그 차는 아무런 옵션이 없는, 수십년 된 골동품 취급 받는, 하지만 부식과 누유가 없고 주기적으로 엔진을 점검받은 무사고 차량보다 문제가 많을 확률이 훨씬 높지 않겠어요? 그러니, 중요한 체크 포인트는 언제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겠지요.
다시 '전형적인 시나리오' 이야기로 돌아와 봅시다. 장르적 재미에 충실해서, 다소 전형적으로 보인다는 평가가, 과연 그 시나리오의 단점일까...라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악당이 굉장히 자극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이 감각적으로 전시되어 우리의 울분을 끌어올리고, 주인공이 내뱉는 대사들이 하나같이 신박하여 우리의 예측을 아득하게 뛰어넘거나, 사람들이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배경과 소재가 다뤄진다거나, 뭐 그런 것도 분명히 중요한 요소가 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저와 제 지인이 반복적으로 느끼곤 했던 왠지 모를 갑갑함은, 그런데 정작 특이한 소재와 눈길을 끄는 장면들과 독특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많은 시나리오들 중에, 그래서 그 장르가 마땅히 가져야 할, 전형적인 플롯, 기본적인 기승전결, 깔끔한 엔딩과 여운, 이런 걸 잘 해낸 시나리오는 오히려 극히 드물단 사실에서 오는 피로감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수많은 시나리오들을 검토하고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도, 어쩔 수 없이 눈에 쉽게 띄고 기억에 잘 남는 피상적인 것들에 집중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새롭기 위해 새로운 것', '남과 다르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한 것', 더 나아가서, '남과 다르다는 것' 자체가 과연 중요한 걸까... 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이쯤에서, 저의 이런 생각에 물꼬를 틀어준 예를 하나 들어야겠어요. 올해 개봉해서 전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탑건 : 매버릭' 이라는 영화입니다. 도대체 언제적 '톰 크루즈'가, 언제적 '탑건'이라는 헤묵은 영화의 후속편을 내놓은 것이지요. 내용은 제가 따로 설명할 것도 없이, 인터넷에서 '탑건' 1편의 내용을 찾아보시면 됩니다. 걍 그 1편의 내용과 똑같습니다. 물론, 톰 크루즈는 늙었고, 그런 그가 여전히 주인공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된 내용 상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구조적으로는 완벽하게 동일한 서사입니다.
그래서, 무려 37년 만에 만들어진 이 속편을 보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게 됩니다. '우와, 이렇게 뻔할수가...!'
하지만, 그렇게 내뱉는 말은 욕이 아니라 감탄사가 됩니다. 해줘야 할 것들은 마땅히 다 해주고, 예상을 벗어나면 안되는 순간에는 정확하게 관객의 예상대로 진행되면서, 37년 전의 전작과 똑같은 감동을 선사하면서도, 동시에 37년 뒤에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성취할 수 있는 기술적, 미학적 완성도는 관객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줍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이들이 만든 결과겠지요.
그 반대의 예를, 우리는 수도 없이 봐왔습니다. 엄청난 기술력과 당대의 화제성을 내세워 공격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폭망한 영화들. 기본적이고 전형적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갖춰야 할 것들을 마땅히 갖추지 못하고, 화려한 볼거리와 시의성을 등에 엎고 섵불리 완성된 이야기를 접하고 나면 실망을 금치 못하는 이유는, 보고나서 다소 뻔하다고 할지언정 없어서는 안될, 이야기의 기본적인 완성도, 전형적인 이야기에서 기대하는 장르적 재미, 이런 것들을 가볍게 여겨서이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예전에 제가 아버지와 논쟁을 벌이면서, '저렇게 뻔한 얘길 내게 계속 하다니...' 라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말들이 떠오르면서, '그건 필요한 말들이었구나. 뻔하다고 속으로 욕할지언정 틀린 말은 아니었구나.' 싶은 것이지요.
얼마 전에도, 그렇게 뻔하지만 절대 틀린 말이 아닌 이야기를 접한 또 다른 경험이 있었습니다. 어느 여행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온 한 대화였습니다. 젤라또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어느 소도시에 도착한 출연자가, 사람들이 줄지어 선 젤라또 가게 앞에서, 이 가게의 주인장이 젤라또 세계챔피언이며 그가 여전히 이 가게를 직접 운영한다며 소개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말의 주인공, 그러니까 젤라또 세계챔피언인 그 가게의 주인장 영감님이 장을 보러 나서다가 출연자와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출연자는 운 좋게도 그 영감님과 동행하며 한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었지요. 그를 따라 나서서, 그가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곳을 견학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옛 이야기도 들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더군요. 그러다, 그 대화의 말미에, 출연자가 영감님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에게 젤라또는 어떤 의미인가요?'
이 얼마나 깊고 광활하며, 동시에 뻔하고 황당한 질문입니까? 저는, 무려 젤라또 세계챔피언인 그 영감님이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도대체 어떤 말을 할지 너무 궁금해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운을 뗐습니다.
'젤라또는 제 인생입니다. 저의 전부지요.'
네. 그렇지요. 그렇겠지요. 그렇고 말고요. 이 이상 뭐라 말하겠어요? 전 어떤 답을 기대했던 걸까요? 뻔하지만 맞는 말, 그야말로 더할나위 없는 정답 아니겠어요? 실망까진 아니었지만, 기대감은 없어지게 하는 대답이었어요.
그런데, 그 뒤로 대답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 중에, 제가 새롭게 들어 본 단어나, 개념이나, 나의 시야를 넓혀주거나 생각의 저변을 확장시켜준 번뜩이는 통찰의 단어들이 있었다거나, 나의 굳은 머리를 깨부셔주는 엄청나게 새롭고 신묘한 무언가가 있었냐면... 전혀 아니었습니다.
말그대로,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가, 뻔하디 뻔한 단어들로 완성되어 문장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제가 근 몇년 간 들어본 어떠한 연설이나 말보다, 제 마음을 많이 움직였습니다. 그때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
'뻔하지만 맞는 말이 있다. 그리고 그 말에는 힘이 있다.'
이건 내가 37년만에 만들어진 탑건 후속편을 보고 느낀 감정이랑 비슷한 거구나..싶었어요. 전형적인 것. 이를 달리 말하면 클래식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클래식이 가지는 클래스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것은 어쩌면 무언가의 전형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새로운 것에서 오는 놀라움과는 분명히 다른, 깊이에서 오는 감동이겠지요.
젤라또가 자신의 인생이자 전부라는 영감님의 말을 마저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제게 젤라또는 전부입니다.
제 인생이나 다름없지요.
저는 젤라또로 유명해졌어요.
젤라또가 저를 도운 셈이지요.
젤라또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음식입니다.
젤라또는 행복을 만들거든요.
젤라또 한 입이면 모두가 행복해지니까요.
어린아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젤라또를 입에 넣으면 모두가 행복해합니다.
장담하건데,
그러니까 젤라또는 행복입니다.
가장 멋진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다면 저는
행복을 만드는 장인인 셈인데,
그래서 전 아주 행복해요.'
이렇게 뻔한 말을, 진심을 담아 할 수 있는 삶이라면, 이를 너무 전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한테는, 이런 전형적이고 뻔한 진심을 담담하게 내뱉을 수 있는 삶이야말로, 너무 행복한 삶으로 보이는데 말예요.
얼마 전에, 아시는 분의 초대로 반도네온이라는 악기의 공연을 보러 갔습니다. 반도네온은 탱고곡 연주를 들으면 접할 수 있는 악기지요. 하지만, 제가 그 악기의 연주를 직접 보고 들은 것은 그 공연이 처음이었습니다. 정말 멋진 공연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 탱고 좋지. 나 탱고 좋아해.' 라고 말은 하면서도, 탱고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은 터라, 기껏해야 영화 '물랑루즈'의 ost 중 한 곡이 탱고곡이라는 것, 그리고 종종 피아졸라의 음악을 찾아듣는 정도예요. 그러니까 제가 자신있게 듣고 제목을 말할 수 있는 탱고곡은 아마 피아졸라의 '리베르 탱고' 가 유일합니다.
그런데, 공연이 다 끝나고, 연주자가 앵콜곡으로, '리베르 탱고를 연주하겠습니다.' 라고 했을 때, 공연장에서는 그야말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반도네온 공연을 했는데, 그 공연의 마지막으로, 앵콜곡을 연주한다면, 탱고에 미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숨겨진 걸작이 아니라, 뻔하디 뻔한, 저 같은 사람도 제목을 아는, 바로 그 '리베르 탱고' 여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건 너무 뻔한 거 아니냐구요? 네, 맞습니다. 너무 뻔한 앵콜곡이지요. 그래서, 너무 뻔하게도, 너무 좋더군요. 저 뿐만 아니라 그 자리의 많은 사람들이 저처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제가 앞으로 피하고 경계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를 바꿨습니다. '상투적인 것을 피하자.'는 생각은, '클래식의 클래스를 존중하자.' 정도로 바뀔 것 같구요, 그렇다면 내가 피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내가 클래식의 클래스를 지향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는 생각에, 새로운 것을 하는 것.' 이 될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원근법을 알아야 큐비즘도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건 그렇고, 젤라또 세계챔피언 영감님 그림은 망한 거 같아요. 뭐 어떻습니까? 뻔하지 않아 새롭지 않습니까? 물론 걍 뻔하게 잘 그리고 싶습니다만...
아무튼,
굿나잇 & 굿럭.
위의 내용과,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궁금하다면...여기로~
https://www.youtube.com/watch?v=GfAjVWcO9Sc&t=3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