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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차려, 정신!' 모멘트

헤드샷 맞은 듯이

by cpt


안 보이면 그만


중학교 2학년 아님 3학년 때. 중요한 건 아니다. 그 친구 이름도 기억나지 않으니. 아무튼 느긋한 인상에 언제나 여유가 있는 풍채 좋은 친구가 있었다. 말도 느릿느릿, 행동도 느리지만 웃으며 언제나 자신이 하는 말을 정확한 문장으로 끝내는 친구. 은근 곰돌이처럼 생겨 사뭇 귀엽기까지 한 그 친구를 다들 좋아했다. 점심시간이었다. 그 친구와 함께 복도 한 쪽에 기대 서서, 테이프로 칭칭 감은 우유곽을 공 삼아 축구를 하는 애들을 보고 있었다.


햇살이 워낙 좋아 기분 좋게 살짝 졸리는 그런 날. 유일한 흠이라면 우유곽 축구를 하는 애들의 몸놀림 때문에 복도 곳곳에서 먼지가 피어올랐고, 햇빛을 받은 먼지가 반짝이는 것이 너무 눈에 잘 보인다는 것 정도. 그러다 군데군데 반짝이며 스모그처럼 퍼지는 먼지가 복도를 거의 채우고 우리 눈이 매워질 지경이 될 때 쯤, 그 친구가 복도가 꺾이는 곳까지 걸어갔다. 나도 당연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아래 층으로 내려가 매점에라도 갈 요량이었는데, 그 친구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어두워진 중앙계단의 창가에 다시 자리를 잡고 말했다.

"이제 안 보이네."

"뭐가?"

"먼지."
뭐야 그게."


우린 웃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계속 그 자리에서 아이들을 구경했다. 나는 창문을 열며 기침을 했다. 바깥 운동장도 바글바글하긴 마찬가지였다. 전형적인 90년대 남자중학교의 점심시간이 끝나야 비로소 가라앉을 매캐한 공기.


"오늘 먼지가 너무 심하네."

"괜찮은데? 안 보이잖아."


실로 그러했다. 어두운 복도의 공기 중엔 티끌하나 비치지 않았다. 정말로 기침이 잦아드는 것도 같았다. 뿌옇던 복도가 마치 리셋이 된 것 같았다. 존재하지 않는 그 리셋...


하지만 난 그 당시에도 그 친구의 농담에 웃지 않았다. 참담한 기분이랄까, 아니면 뭐였을까. 아무튼 묘했다. 저 아래에서 뭔가 치밀어오르는데 차분해지는 기분. 다소 갑갑하다가 이내 익숙해지는 기분. 아니, 익숙해지지 않으면 억울할 것 같아서, 그런 셈 치자고 마음 먹지 않고선 넘어갈 수 없는 상태. 몸서리를 치며 도망치다 억지로 떠밀려 들어간 목욕탕의 열탕에 앉은 기분. 처음으로 체념 비슷한 뭐시기를 체화한 기분이었을까.



스코프는 확대가 아니라 조준하려고 쓰는 것


삐져나온 척추 4번 5번 사이의 추간판을 살살 달래며 몇 주를 방바닥에 누워 있을 때도, 난 기억 속의 저 중학생들의 대화가 어리석다는 생각을 할 정도만큼은 충분히 나이를 쳐 잡수신 상태였다. 그런데 왜 저 기억이 떠올랐을까?


처음 저 기억과 그 당시의 내가 느낀 감정이 떠올랐을 때, 나의 해석은 이러했다. ‘내가 언제 어디선가 혼자 창문을 열고 맹렬히 손부채질을 해도, 뿌연 연기가 아랑곳않고 들이닥치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단 걸 시사하는 경험이었던 거야. 혹은 내가 먼 훗날, 그러니까 지금 같은 순간이 왔을 때, 왜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 거냐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짜증을 내면, 안보이니 괜찮지 않냐며 느긋하게 웃는 누군가들은 너처럼 자주 짜증내는 일이 없다고 타이르는, 하늘의 개소리를 미리 들은거지.’


그런데 나이에 걸맞게 허리가 작살난 나는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지금에 와서 소환된 저 기억의 진짜 의미는 이거다 싶었다.

‘이제 체념도 느끼지 않잖아. 그럴 필요가 없지, 너도 그냥 그게 편하잖아?’


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있지만, 손바닥을 든 나를 속일 수는 없다. 눈이 그칠 때를 기다려 한 번에 모조리 없앨 수도 있겠지만, 눈이 계속 내린다면 그 눈을 맞으며 길을 내고 그 길에 쌓인 눈을 그냥 아무런 다른 생각말고 계속 쓸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먼지가 없을까. 먼지는 쌓인다. 먼지를 덮어두는 방법은 없다. 먼지는 치워야 한다.


안다! 나도 안다고. 그래서, 청소를 좀 더 자주 하면 되겠니?

물건이 좀 많네, 그래서 먼지가 많이 쌓였네, 이제 청소를 자주 하자, 그래. 그러자. 됐냐?

근데 내가 쵸큼 아프거든? 디스크에 난 스크라치가 다 아물면 물티슈로 싹싹 닦아줄게, 창틀들아, 새삼 깔끔 떨지 말아 줄래?


아니, 그게 아니다. 지금 그런 결론을 내려는 게 아니다. 알고 있었다. 몸져 누운 김에 생각을 더 해야했다. 뭐에 대해? 나에 대해. 나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하고 있거든? 다행인지 불행인지 꼼짝않고 생각할 시간은 충분하단 말이다. 나의 무엇에 대해? 내가 왜 아픈지에 대해? 하루 세끼, 탄.단.지를 골고루 맞춰 밥 잘 챙겨먹고 유산소 위주로 주3회 조지자, 됐냐? 생각을 좀 하라니까. 뭘?! 니가 가리고 싶어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맨 땅이 흉하게 말라붙어 다 갈라져 있다고, 그걸 가리려고 먼지로 덮어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안 그래?


허리를 다치니 몸 속 장기를 감싸는 이름 모를 근육들의 존재가 죄다 느껴졌다, 하루 종일 누워있으니 시간의 흐름에 따른 벽에 닿는 햇살의 변화가 민감하게 느껴졌다.. 등등. 끝도 없이 이어 말할 수 있는 소소한 깨달음의 순간(처럼 느껴지는 '좋은 생각'류의 휘발되는 사념들)의 향연. 조각조각 건져올려지는 디테일들. 그것들이 모인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는다.


난 디테일이 훌륭하다는 평이 전면에 나서는 영화를 신뢰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서 그 '디테일'이란 건 대사의 욕이 찰지다거나, 취재해서 직접 들은 얘기가 영화에 그대로 재현되어 그 쪽 업계 사람들이 진짜같다고 말하더라..는 뜻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그 유명한 문장도 있지만, 그건 미세한 디테일로 성패를 다퉈야 하는 경지의 전장에서나 유효한 말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때까지도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는 말이다. '인생을 통째로 바꿔야겠는데?' 라거나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나.' '리셋이 아니야, 전인격적인 대전환이 필요한 게야.' 따위의 말을 혼자 중얼대면서도, 각 사안의 디테일에 매달려 있던 것이다.


이를테면, 수건 교체. 예를 들면, 먼지를 치우는 사람이 되자. 예컨데, 운동을 하자.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풀지 말자. 나를 좀 더 아끼자, 맘이 허하다고 sns를 보며 밤새지 말자, 남이 가진 것 중 멋져 보이는 걸 나도 가지는 것이 나를 더 그럴싸하게 만든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 조금은 간소해지자... 이런 생각들. 다 맞는 말. 하나같이 다 맞는 말이라 모아놓으면 아무 것도 아닌 말.


요는 이렇다. 나에겐 고배율의 스코프가 달린 스나이퍼 총이 주어졌다. 스코프를 통해 각 지점의 취약점, 혹은 문제점이 또렷하게 확대되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도 저것도 모조리 쏘아맞출 수 있을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든다. 아마 정말 다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고 이치에 맞는 말처럼 쉬운 표적은 없다. 그 말을 대뜸 믿고 의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스나이퍼에겐 무한대의 총알이 지급되지 않는다. 행여 자리 잡은 위치에서 탄창 하나 가득 들어찬 총알을 모두 쓸 수 있다 해도, 스나이퍼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첫 발에 실패하면 자신의 위치를 완벽히 은폐, 엄폐한 그 곳에서 신속하게 벗어나 다른 완벽한 장소를 찾아 거기로 무사히 이동해야 한다. 익숙하지 않나? 리셋.


나의 위치가 발각되고, 내가 사격에 실패하면, 표적은 위협을 느껴 그 곳에서 사라진다.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리셋이 영원히 반복될까? 그 반복을 통해 나는 과연 나아질까? 아니, 내가 과녁이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가능한 단 한 발로 가장 효과적인 지점을 정확히 타격해야 한다.


내 인생에 핀셋 정책을 영원히 반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미생물의 팔다리 갯수마저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현미경을 지녔다고 자랑하는 것은 해충박멸에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다. 세스코가 와서 집에 해충이 들끓는 이유가 되는 통로를 찾아내야 한다.



저격의 시간


몇 해 전 한 번 읽고 난 후, 또 다시 몇 해를 방치해 둔 도미니크 로로의 책은, 은연 중에 내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방향이 교묘히 틀어져 적용되는 핀셋 정책. 사람은 결국 선택을 한다.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거나 결정을 피하는 것마저 하나의 선택지다. 회피나 안주가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선택은 관성에 따른다. 많은 경우, 이 관성은 우리의 삶을 운전하는데 효율을 높여준다. 혹은 그렇게 착각하게 만든다. 그 결과는 완전히 반대다.


하지만 우리는 굴러 내려가지는대로 아무렇게나 구르면서, 무의식에 휩쓸리면서, 멈추지 않고 꽤나 속도를 내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그것이 나의 선택의 결과이자 성과라고 착각하기 십상이다. 실제로 효율을 높여주는 경우와, 익숙한 패턴 안에 안주하게 하는 서로 다른 이 두 경우는, 멈춰서 구분하려 하지 않으면 분간하기 힘들다.


그래서, 한 번 들인 습관은 바꾸기 힘들고, 반대로 새로운 습관을 어떻게든 생활의 루틴 안에 안착시키면 그 효과는 놀라운 것이다. 외부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자극은 흔히, 빠른 시간 내에 기존에 존재하는 관성을 유지하는데 연료로 사용되고 만다. 쉽게 말하자면, 우린 뭐든 '지 편한대로 갖다붙인다.'


나는 언젠가부터 ‘난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굳이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사고 있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굳이 필요 없었다는 걸 스스로 깨우치는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차라리 그런 경우는 나은 편에 속했다. 몇몇 경우엔 그저 그것을 사기 위해서, 좀처럼 속아 넘어가지 않는 스스로를 교묘하게 설득시키는 과정이 필요했다.


처음엔 흔히들 뿌듯하게 되내이곤 하는 말이 동원된다. ‘야, 어릴 땐 침만 삼키며 구경만 하던 것들을 이제 버젓이 사 모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얼마나 잘 컸니, 나 자식.’ 혼자 어깨를 토닥이며 우쭈쭈하는 듯한 이 말이 좀 겸연쩍으면 다른 방법을 취한다.


지금 스스로를 설득하는 나 자신이, 유별난 경우가 아니라 세간에 통용되는 개념에 속하는 평범한 존재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넌 그냥 흔하디 흔한 키덜트일 뿐이야. 그게 아니면 그냥 스트레스 받는 프리랜서가 자기에게 주는 선물 그런 거 있자나. 아, 진짜 누가 뭐 은행이라도 털래니? 걍 좀 생각없이 뭔가를 더 가지라고.’ 과연 이는 실로 효과가 있다.


그마저 효과가 없을 땐, 교묘하게 죄책감과 당위성을 자극하는,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와 상관이 없는 메시지를 전한다.


‘글 쓴다는 놈이, 영상 만든다는 놈이, 광고밥 먹은 놈이, 지 영화 만들겠다는 놈이...아무튼 딴따라 소리 들으면 황당해하고 예술한단 소리 들으면 당황하고, 나도 사실 예전에 꿈이 뭐였어..하는 분들과는 다신 겸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아무튼 재수없는 너 이 자식아. 그래, 그런 놈이 예리한 취향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없고, 맨날 보던 책, 수백 번은 본 영화, 수천 번은 들은 음악이나 계속 파먹으면서, 트위터 최신 이슈도 제 때 팔로우 못하고, 인스타는 멀리 사는 지인 안부 묻는 데나 써먹어? 핫하고 힙하고 아무튼간에 '새로움을 위한 새로운 거, 뒤쳐지는게 무서워 앞으로 튀어나온 거, 다르기 위해 달라진 거' 따위가 얼마나 많은데, 지금 그걸 다 쌩까, 게으른 쉐키, 넌 직무유기, 임무 태만, 역할 방기, 갱생불가, 인생 포기야! 그래, 그냥 그렇게 살아. 넌 절대 단번에 산화하는 것조차도 못할 팔자야, 그러니 시시하고 사소하게 긴긴 시간 점차 사그러들려무나.'


말하자면, '이 모든 게 취향의 문제. 남에게 내보일만한 취향이라고 비춰질만한 것이야 말로 애처로운 너의 전부' 공격이다. 그 안에 든 메시지는 가히 '최후통첩'이라 할만 하다.


이 말을 듣는 나는 참을 수가 없다. 사실 저 공격의 첫 벌스가 시작될 때부터 지고 들어간다. 반칙이라고 투덜댈 뿐, 승패를 뒤집을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 공격은 남용되지 않지만, 굳이 여러 번 사용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성공률이 높다.


물건을 줄이고, 여러 사람들에 섞여들고, 말만 할 뿐 전혀 해볼 생각 못하던 것을 직접 해보고, 지인들을 담백하게 다시 만나고, 산책을 하고, 요가를 하고, 일기를 쓰고, 수영을 하고, 여러 책을 읽고, 상담을 꾸준히 받고, 급기야 이 글을 쓰기에 이르러서야, 이 ‘최후통첩’이 모든 것의 원흉임이 판명되었다. 저 최후통첩에 겁을 집어먹지 않는 것, 아니 더 나아가 저 최후통첩이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일종의 비문 임을 진심으로 아는 것이, 내가 타격해야 할 과녁의 정중앙인 걸 깨우쳤다. 그걸 알게 되는데 몇 년이 걸렸다.


뭔가 아는 것은, 납득하고 이해하고 동의한 후에 행동을 돌이켜 다시는 모르던 때의 행동을 반복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혹은 실수를 반복하더라도 자책하지 않고 다시 돌이키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둘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앎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안다고 생각한 무수한 것들은 그저 억지로 동의하거나 겨우 납득, 애써 이해하는 수준에 그쳤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저것 하나를 겨우 '안다.' 라고 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 같다.


내가 이룩한 먼지의 제국을 둘러보며, 최후통첩이 그저 못 본 척 피해가길 바라는 내 누운 모습이 보였다. 유체이탈된 내가 직부감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나는 혈색이 창백했다. 머리통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헤드샷을 얻어 맞았던 게지. 추간판 탈출은 위력 사격의 공포탄 한 발처럼 느껴졌다. 이건 경고야.



은폐, 엄폐물이 없는 개활지


물론 단번에 저걸 다 깨달은 건 아니다. 시쳇말로 한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을 뿐이다. 나는 은폐, 엄폐할 돌무더기 하나 없는 개활지에 발가벗고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자랑스런 물건들 전부를 한 데 모아 견고하게 벽을 쌓아도, '진실의 탄환'은 그것들을 쿠킹호일 만큼의 장애물로도 여기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었다. '다음엔 디스크가 아니라 머리통이 터질 거야.' (물론 이 사고는 비유적 표현으로 내게 작동했다. 하지만 정상은 아니지. 점점 머리가 부풀어 오르다가 눈부터 튀어나오고 그 다음엔 이마, 그리고 끝까지 부풀다 겨우 멈춰서 풍선이 터지기 직전의 기분나쁜 긴장감이 내 평생을 따라다닐 거라는 상상이 계속 되었으니까. 아,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 상담 선생님한텐 이 비유를 말한 적 없었는데..젠장, 선생님도 내 브런치 주소를 아나. 이거 지울까. 아니, 그냥 두자.)


나는 납작 엎드려보기로 했다. 어차피 일어나 앉기도 힘드니까, 핑계 좋잖아?

나는 무엇인가를 소비하는 행위에 있어서는 도미니크 로로의 말마저 제 멋대로 갖다 써먹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질이 좋은 담요가 하나 있다면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던가, 울 100%의 목도리나 스카프 하나면 겨울 악세서리는 충분할 거라는 문장들은 내게 좋은 핑계가 되었다. ‘혹시 누군가 집을 방문하면 꺼내 줄 필요가 있으니’(새로 이사 간 집의 주소를 아는 이는 가족을 포함해서 한 손에 꼽을 수 있음에도) 오래된 침구는 버려지지 않고 그대로 공간박스에 들어가고, 그 위엔 새로 산 비싼 담요 하나가 얹혀졌다. 목도리의 경우엔 그나마 제 효과를 발휘했는데, 살 때 스스로 미친 짓이라고 여기며 산 10만원이 넘는 울 목도리는 언제 어디서 났는지 모를 수많은 목도리를 단번에 대체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준, 혹은 누군가가 놓고 간, 몇 년 째 손에 집히는 대로 목에 감기곤 하던 두세개의 목도리는 여전히 옷장에 걸려 있었다. 선반과 공간박스는 더 필요했다. 예전에 쓰던 못생긴 박스들은 새 것으로 다시 대체되었다. (새하얀 brute box, 무인양품...) 자신이 좋아하는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좋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말에, 훈옥당 향 스틱, 아로마 디퓨저, 온갖 에센스 오일을 침대 옆에 디스플레이 해두기 시작했다.



나를 지켜주는 건 내 물건이 아니라 나


향에 대한 집착에 대해 재미삼아 얘기할 에피소드가 있다.('재미삼아'가 '재미있음'을 뜻하진 않을 수도..)오히려, 향에 대한 나의 진짜 취향은, Y와 HB와 함께 향수 만들기 1일 클래스에 가서, 조향사와 함께 내가 직접 만든 향수를 몸에 뿌려보고 나서야 생겨났다. 온갖 향, 캔들, 스틱을 되는대로 일단 사고 보던 내가 그 클래스를 들은 건, 향수를 너무 좋아해서라거나 이제 향수 오타쿠 짓을 할 때가 되었다고 여겨서가 아니었다. 그저 며칠째 집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던 우울감에서 벗어나려고 뭐든 하려는 발버둥의 결과로 질러 본 일이다.(사실 끌려간 것도 같다. 아니면 '그럴까.'라는 미온적인 대답으로 대충 뭉게는 내게 거듭 물어봐주어 마음이 동했던가.) 그리고 거기서 내 인생 향수를 내가 만들었다. (이름도 지었다. 'blackstar'. 옛날 TV아동 인형극 '검은 별' 말고, 데이빗 보위의 마지막 앨범 'blackstar'!) 그 때, Y와 HB는 내가 만든 향수를 시향하고 나서, 나 '답다' 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은 정말 많은 힘이 되었다. 조향사 선생님은 그 대화를 나누는 우리를 보며 부러운 사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라는 게 있구나..라는 기분이 들게 해줘 누군가에게 고마워 한 경험이 있으신지? 그건 정말 진짜 참으로 귀한 경험이다.


그보다 몇 년 전, 내 동기 HC는, 내가 날이 추워지면 기분 전환 삼아 꺼내 입는 두꺼운 모 재질의 스트라이프 바지를 입고 학교에 들어서자 이렇게 말해주었다.


"형, 이제 진짜 겨울이 왔나봐."

"응, 슬슬 추워지네."

"아니, 그게 아니라, 난 형이 그 바지를 입은 걸 보면, 아, 겨울이 왔구나..란 생각이 들더라."


난 아직도 그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인격적으로 다른 훌륭한 면이 많지만, 내겐 그 대화가 그 녀석을 평생 편애할 이유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여러분은 가급적 '나라는 게 있긴 있구나.'라는 문장이 필요하게 될 지경에 이르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그렇게 말해줄 것이다. 뭔가를 한다면. 나를 내 맘에 들게 하는 무엇인가를 발견한다면. 몸을 일으켜 누군가와 아무리 쓸데없고 사소한 뭐라도 하기만 하면! 그럴 수 있다. 내가 그 향수를 뿌릴 때면, Y와 HB는 내 향기가 난다고 알아채주었고, 그후로 다른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도, 나는 '나'다운 향, 더군다나 내가 맡아보고 마음에 들어했던 향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나에 대한' 그 향기를 은근히 내뿜는다는 것이 즐거웠다.


보통의 경우, 내가 직접 탐구하는 데 시간을 들여 알아낸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만족감이 커진다.


그런 류의 만족감은 내가 알아내거나 만나거나 취한 물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인간인지 내가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이 늘어난다는데서 생겨난다.


하지만, 이 생각을 갖게 된 것도 한참 후의 일이다.


아닌게 아니라, 난 '1차 물건 버리기 대난동' 정도로 칭할 수 있을 어느 날, 'blackstar'의 성분과 제조 방법을 적어둔 수업노트를 버렸다. '향수 따위, 낭비다!' 란 대찬 생각으로. 하지만, 이제 내가 마음을 빼앗기는 향이 어떤어떤 것들의 조합인지를 대충 안다는 정도만 해도 어딘가. 미니멀리즘은, 다른 말로 '뻘짓의 반복과 점진적 소폭 성장'일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이걸 지닌 나'


납작 엎드려 내 허울이 벗겨지는 과정은 계속 되었다. 잘근잘근 밟혀 가루가 될, 먼지의 제국을 떠받드는 물건 천지는 아직 차고 넘치니까.


'이런 물건을 지닌 나' 가 '나' 보다 더 신경쓰이는 이 기묘하고도 흔한 정신상태에 관한 좀 더 쉬운 예가 있다. 한 때 모두가 한 번쯤은 따라해 본, 세계적 IT 기업의 수장 둘의 패션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검정 티셔츠(걍 티셔츠라기엔 ㅈㄴ 비싼 이세이 미야케 터틀넥이긴 하지만)와 청바지에 회색 뉴발란스 992를 신은 스티브 잡스, 혹은 회색 면 티셔츠를 입은 사이보그, 아니, 마크 주커버그.


이들은 에너지 효율의 법칙에 입각하여, 자기 뇌가 생각할 의제의 양을 줄이고, 중요한 사안에 대한 사고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항상 같은 옷차림을 입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생각할 필요없이 늘 하던대로 하는 그 움직임이 전체적인 자신의 삶의 방향에 비춰볼 때 올바른 방식이라면, 그 '생각하지 않음'으로 인한 효율성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는 꽤 괜찮은 관성적인 선택이 반복되어 습관으로 정착되었을 경우의 바른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의식적 선택과 집중이 아직 내재화되지 않은 누군가가, 그 표면적인 결과값을 자신의 삶에 단순 적용할 때, '삑사리'가 나는 것이다. 일련의 움직임에 관한 스스로의 필요를 고찰하지 않으면, 이것은 결국은 습관으로 정착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또 다른 쓸모없는 움직임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그 움직임을 그대로 모방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과 맞지 않은 비효율적인 움직임이 될 수 있다.


나이키 에어포스 원과 에어맥스 95가 있는데, 왜 또 회색 뉴발란스 992를 사야하는가. 쓸모없는 새로운 움직임. 혹은, 단 한 번도 등산화가 아닌 운동화에 10만원 이상을 써 본 적 없는, 발이 시려운 것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고산지대에 사는 이에게 20만원을 호가하는 매쉬 소재의 신발이란? 비효율적인 움직임. 말하자면, 연료 낭비, 나쁜 연비의 운전습관, 자신의 차체에 대한 이해 부족, 자신의 차로 가고자 하는 길의 부재, 다시 말해 주체적이지 못한 나. 그러니까 모든 난제의 근원이자 총체적 난국.


내가 아직 내가 아닌 것.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것,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는 것,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 그리고 내가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 다 제쳐두고, 아침에 일어나서(아, 이쯤되면 일반적으로 사람이 일어나는 것은 아침이라고 전제하는 말투마저 굉장히 언짢게 들릴 확률이 다분히 높다.) 거울에 비치는 면상(을 포함한 나란 존재 자체)을 참고 봐 줄 수 없는 상태.


그리고 그 상태에 대처하는 여러 최악의 방법 중 위험부담이 상당히 낮아보이므로 지극히 높은 확률로 채택되는 솔루션.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므로 그것을 '이 물건을 지닌 나'로 덮어보겠다는 발버둥. 그것이야말로 나를 가꾸어 줄 '취향'이라고 속이며 '몰개성의 쓰나미에 몸을 싣고 걔 중 가장 튀는 색의 파도'가 되어보겠노라 다짐하는 나.


아. 나는 계속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거구나.


개활지를 벗어날 첫 계단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계단을 딛고 선 '디테일'한 각 행동은, 맥락을 찾기 시작했다.


우선, 먼지의 제국 가장 높은 곳의 가장 뾰족한 첨탑, 다시 말해 진실의 헤드샷이 그 위를 스치기만 해도 기왓장이 내려앉기 시작할 위태로운 봉우리가 눈에 보였다.


'탐정 사무소' '파리의 레스토랑' '팰리스 시네마'

엄선하고 엄선하여 고이 모실 자리부터 터를 닦은 뒤 조심스레 모셔 놓은 존재들. (탐정, 파리, 시네마 라잖아!) 입으로 작게 그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30여년 인생사가 오그라들어 한 점 먼지가 되는 기분을 선사하는,

아, 레고 모듈러 시리즈.


우선 먼지부터 털어볼까?(이럴 때를 예상하고 산 무인양품 고운 털 먼지털이...개소리 마. 2년 동안 커버도 안 벗긴 주제에.) 재미삼아 다시 분해해서 Y와 함께 조립해볼까?(그럴 일 있을까봐 설명서를 안 버렸다고 지껄여보지?)


그 때 번뜩 어떤 생각이 들었다. J에게 연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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