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리셋 같은 건 없다.

눈에 띄지도 않는 먼지같은 것들이 쌓이는 시간부터

by cpt

일의 일어나는 순서


낡은 수건들을 버리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당연히, 그 날 이후로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된 것은 아니다. 사실 여러가지가 한꺼번에 일어났고, 그 때 겪고 접하고 생각한 것들의, '바로 그렇게 일어난 순서대로 쌓인 결과'로, 지금의 내가 정확하게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되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일테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고, 생각보다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정리해야 될 것은 물건이 전부가 아니었다.


퇴원할 때 20몇만원인가 하는 복대를 구입했다. 원무과에서 입원비를 낼 때 비닐봉지에 담긴 새 제품이 내 손에 쥐어졌다. 다른 디자인이나 다른 색상은 없는지 물어보기도 전에 간호사가 내게 그걸 착용시켜주었다. 그 복대는 말이 복대지 사실 착용하면 아이언맨이라도 된 것처럼 보이는, 거대하고 견고한, 듣도보도 못한 물건이었다. 지금도 그 아이언맨 복대는 내 책상 옆에 놓여있다. 내가 어느날 득도하여 내가 가진 모든 물건을 모조리 없애버린다 해도, 이 물건은 살아남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물건은 내가 '미니멀리즘'이라는 단어를, 건축이나 디자인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에도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이고 나서, 처음으로 내 인생에 새로 '추가된 물건'이다.



물건을 줄이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물건이 줄어든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줄이고 버리는 행위 자체에 몰입하다보면, 결국 다시 물건을 사게 된다.


그렇게 섣불리 새로 무언가를 사는 행위 중 절반 정도는 '다시 버리게 될 뻘짓'이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결국 다시 사야만 하는 그걸 버렸던 뻘짓의 댓가'다. 개인적 견해로는, '미니멀리즘'이라는 기묘한 체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영역은 확장성이 너무 넓고, 그 과정은 어쩌면 매우 지리멸렬하다. (물론 day1부터 정확히 세기 시작하여 가공할만한 각성과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들도 있다. 어느 특정 영역이나 행위에 관해서는 그런 드라마틱한 변화에 대해 언급할 수 있겠으나, 내 경우엔 경험이 지나고 난 뒤의 복기와 개인적인 의식 변화가 더 흥미롭다. 그러니 이리 주저리주저리 영원히 집필 중인 사소설마냥 말이 많아질 수 밖에.)


말하자면, '미니멀리즘'이라는 개념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거나, 모든 일의 해법인양 '절대반지'처럼 내세우게 되기 쉽고, 또 한편으로는 전혀 눈에 띄는 변화가 없어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일어나는 일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다 보면 지나온 일이 작동한 순서나 상호작용의 결과가 얼핏 보인다. 난 지금 그 지도를 가능한 한 되짚으며 의미있는 이정표들을 찾으려는 중이다.


이 시점에서 그나마 내가 단정해서 말 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이 정리, 혹은 미니멀라이즈, 개선, 성장, 변화, 혹은 허세, 혹은 유행, 혹은 자뻑, 정신승리, 자다 두드린 봉창 등등 뭐라 말하든, 아무튼 이것은 정해진 끝을 향해 달리는 게임이 아니란 것이다. 아마도 목표지향적인 자를 좌절시킬 것이다.


이 게임은, 결국 도달해야할 상태가 아니라 취해야 할 태도에 가깝다. 태도는 상태와 상관없이 지속된다. 아니 지속될 수 있어야 '걸맞는 태도'라 하겠다.

(그럴 수 있는 태도가 목표라면 목표겠으나, 이걸 누가 측량할 수 있을까.)

축구팬들의 입버릇, '폼은 일시적이나 클래스는 영원하다. (Form is Temporary, Class is Permanent.)'랑 비슷하려나.


좌우지간, 이 매거진은 끝이 정해져 있다. 안심하시라.



눈 뜨고 오래 누워 있으면 보이는 것


다시 수건을 버리고 난 직후로 가보자. 나는 2주는 누워있어야 하고, 2주 뒤부턴 살살 걷기 시작하라는(당연히 그 '복대'를 차고, 아이언맨 마크 1처럼 뻣뻣하게) 의사 선생님의 명령 탓에, 죄책감 없이 무릎 아래 쿠션을 받치고 누워, 지금은 거의 구음진경에 버금가는 무림비급의 지위에 오른 문제의 그 책,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하게 산다'를 읽었다.


이후에 처리해야 할 실무, 그러니까 어떤 수건을 새로 살지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Y의 선택에 의지했다. Y는 기다렸다는 듯 이미 작성한 '수건 관련' 몇 개의 후보군 (수건 두께에 꽤나 여러 규격이 있다는 걸 아시나? 나는 처음 알았다. 이 항목에 관한 여러 후보군을 이미 리스트업 해놓은 Y에게 놀라기엔, Y는 좋은 물건에 대한 알찬 리스트를 무척 많이 가지고 있다.) 을 제시했고, 이후엔 일사천리로 새 수건들이 입주했다.


책은 생각보다 빨리 읽혔고(반나절...), 남은 2주는 생각보다 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은 없는 커다란 TV가 큰 방 한 벽을 차지하고 있었던 터라, 나는 리모콘을 무심하게 눌러보며, 머리 속 한 켠으로는 갓 완독한 책의 내용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어느 채널로 돌려도 다섯 번에 세 번 정도는 드라마 '도깨비'의 재방송을 해주었다. 내가 처음 본 것은 4화 정도였던 것 같은데, 그 화를 다 보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보니, 그 날이 다 가기 전에 1,2화가 방영되는 채널을 발견하는 기적을 체험했고, 나는 결국 며칠만에 재방송 랜덤플레이를 통한 '도깨비' 전 회차 랜덤주행(모든 화를 순서대로 볼 수 있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을 끝마칠 수 있었다.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다. 아, 그 며칠간, 바닥과 가까운 눈높이로 내 방을 구석구석 살필 기회가 주어진 것 말이다.


무엇보다, 구석구석의 먼지들이 눈에 띄었다. 일부러 그걸 보려고 한 건 아니다. '도깨비'를 시청하며 간혹 바닥을 손바닥으로 쓸면 어디선가 굴러온 먼지나 머리카락 따위가 달라붙어, 그 때마다 운동삼아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손에 붙은 먼지를 쓰레기통에 털어넣는 짓이 반복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살아온 동안 가장 깨끗하게 유지한 집 상태였다. 그럼에도 한 번 눈에 띈 먼지는 계속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 먼지들의 쌓임, 그리고 그렇게 위태롭게 한데 모여 있다 미세한 공기의 흐름에 마지못해 떠밀려 그늘 밖으로 흘러나와 내 눈에 띄고야 마는 현상은, 허락없이 자릴 잡은 그 먼지들 자체의 탓도, 어디서 구한 건지도 기억나지 않은 거대하고 오래된 진공청소기 탓도(작동엔 아무 문제가 없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필터도 멀쩡하고 흡입력도 나무랄데가 없다. 나는 물걸레 기능을 겸비한 무선청소기 LG코드제로를 너무 사고 싶다. 다이슨은 비싸다. 물걸레질도 안 된다. 차이슨이라 불리는 중국제도 좋다고 한다. 유튜브에 저장한 청소기 리뷰가 스무개가 넘고 있다. 이 글은 미니멀리즘에 관한 글이다.), 내 탓도 아니라는 것(물론 내가 전적으로 결백하진 않겠지. 거 빡빡하게 굴지 맙시다. 그래도 밤에 코를 골며 자다가 목이 아파올 때쯤엔 꼭 환기를 하고 대청소를 했다고. 머리가 간지러워지면 머릴 감는 것과 비슷한 빈도 정도로.)을 깨달았다! 그 때의 기분을 여러분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괄호 속에 써 넣은 삼천포로 빠지는 헛소리가 너무 길어 이 문단은 가독성이 최악이지만, 아무튼 요는, 내가 뭔가 깨달았다는 게 중요하단 것이니 이를 주지하고 나서 다음으로 넘어가 주시면 좋겠다.)


방의 곳곳에, 먼지가 내려앉을 자리는 너무 많았다. 누워서 보면 보인다. 높낮이가 너무나도 다양한 방 안의 등고선. 깨알같이 펼쳐지는 수많은 깊은 골짜기와 봉우리들. 멀티탭과 콘센트, 전선과 못이 이루는 거대한 협곡과 교각, 옷걸이와 커튼, 블라인드와 책장, 각기 다른 책의 높낮이, 좌식 테이블과 입식 책상의 경이로운 공존, 러그의 굵은 솔기, 쿠션과 의자, 의자에 달린 바퀴, 상자 아래 놓인 쓰레기통과 그 옆에 자리한 화분, 제 멋대로 뻗은 각기 다른 모양의 가지와 이파리와 그 옆의 물조리개, 액자, 선반, 복잡하고 정교한 모양으로 그 짜임새를 자랑하는, 레고 모형의 작은 창틀 하나하나의 틈새와 공간 모두!


먼지는 어느샌가 어떻게든 나타나 '마련된 자리에' 안착한다.


'도깨비'를 다 본 후, 다음 정주행할 콘텐츠를 찾지 못한 채 여전히 누워있던 나는, 방의 각 방향을 좌상단에서부터 우하단에 이르기까지 눈으로 찬찬히 훑어보다가, 급기야 이런 환상을 목도하기에 이른다.


< 내가 누운 방이 마찰계수 0의 유리벽으로 이루어진 정육면체라고 생각해보자. 유일하게 마찰력을 지닌 바닥에 먼지가 소복히 쌓인다. (물리학 저널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 치고.) 나는 바닥 전체에 먼지가 쌓일 때까지 기다린다. 바닥에 징그럽게도 골고루 도포된 먼지를 보고, 마스크를 쓰고 빗자루와 쓰레받이로 방을 시원하게 쓸어제낀다. 한가운데로 모인 먼지는 쓰레받이 절반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다. 쓰레기통에 탁 털어 넣는다. 다시 티끌 하나 없는 방이 된다. 이렇게 방을 되돌리기까지 30초가 걸리지 않는다. >


이 환상에 희열을 느끼던 나는, 그러나 곧바로 의아해졌다.

'니가 언제부터 그렇게 청소를 좋아했니?'


차라리,


< 아, 난 책이 너무 많아. 예쁘게 꾸민 저 집들 사진 봐봐. 그래, 저렇게 몇 권 안되는 책을 이쁘게 쌓아놓고, 넓은 테이블에선 밥만 먹고, 작고 단아한 빈티지 테이블에선 아이패드로 블로그 글을 쓰고, 커피를 많아야 아침에 한 잔 내려먹는 정도면 저렇게 드리퍼 세트만 아일랜드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둬도 자리가 많이 남겠지. 집에서 영상 편집도 하고 글도 쓰고 레퍼런스가 될 책들을 일단 구입해서 읽고 되팔아야 하고, 사진집과 화보집을 언제나 꺼내보기 좋게 잘 보이는 곳에 둬야하고, 베란다는 고사하고 다용도실엔 드럼세탁기와 보일러만 놓아도 발 디딜 틈이 없어 언제나 펼쳐진 빨래건조대가 풀옵션보다 견고한 관습법적인 옵션인데다가, 몇 년전 찍은 알바영상의 소스를 클라이언트가 갑자기 연락해서 내놓으라고 할지 모르니 두 군데 씩 백업해서 외장하드로 쌓아놓는 종류의 인간에겐 불가능한 인테리어지. 집에서 일하고, 집에서 쉬고, 집에서 아웃풋을 내고, 집에서 인풋도 채워야 하는 삶을 살면서 밥도 지가 해먹는 싱글 프리랜서로 살아보라지, 저게 되나. '이번 달에 수정이나 일정 연기 없이 무사히 페이가 지급되어야, 할부로 지른 컴퓨터 값 걱정없이 밤새 편집을 기꺼이 할텐데...' 따위의 생각 안해도 되는 저들은 좋겠다. 존경합니다, 성공한 분. 하아, 그러면서 넌 또 오늘 교보문고에 들러 스티븐 킹 신작 쇼핑을 하고 온 거냐. 책 좀 팔아야지, 담배값이 모자라네. >


라는 식의 의식의 흐름이라면 이미 질릴만큼 익숙하겠지만, (실제로 방금 저 문단은 생각하는 시늉도 하지 않고 실실 쪼개며 단번에 썼다. 찌질하고 수다스런 놈.)


< 먼지 하나 없는 방, 청소가 제일 쉬웠어요. >

따위를 꿈꾸는 나는 도무지 낯설었다.



리셋 서사는 그만


맹을 포함한 몇 안 되는 내 동갑내기 친구 G는, 한번씩 밤에 찾아와 다짜고짜 나를 태우고 시속 120km로 달려가 주먹고기나 목살을 15인분 쯤 사이 좋게 조지곤 했다. G가 그럴 때는, 스트레스가 찰 때까지 찼단 얘긴데, 그 때마다 우리는 이런 꿈같은 비유로 셀프테라피하곤 했다.


'꾸덕해진 피와 부식된 뼈와 삭은 근육과 말라가는 뇌를 조립의 역순으로 하나하나 분해해서, 옥시크린에 푹 담갔다가 꺼내서 햇볕에 바싹 말리고, 바짝 깎은 손톱을 지닌 야무진 두 손으로 다시 조립하고 싶다.'


우리 둘만 즐기는 농담으로 뇌까리던 그 문장이, '도깨비' 전 회차 시청을 마치고 목도한 환상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리셋하고 싶다...'를 암시하는 문장. 뭔가 잘못되었고, 바로 잡고 싶다는 욕망. '초기화는 항상 옳지만 우리가 선택하지 않을 뿐이다.'라는 암시.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이곳으로 이사 온 날 아침이 기억났다. 그러니까 맹이 내 이삿짐을 같이 실어나르던 아침, 우연히 길에서 G를 마주쳤다. 우리는 마트 옆, 헌 옷 수거함 앞에서 만났다. 나와 맹은 총 다섯 박스의 옷가지, 이불 따위를 수거함에 쑤셔넣고 있었다. 나는 싹 다 놓고 가고 싶었다. 이문동 에서의 세 번의 이사와 7년의 시간 동안 쌓인 꿉꿉한 냄새를 나와 상관없는 척 하고 싶었다. 곰팡이 냄새가 나지 않고 뽀송뽀송하고 상태가 괜찮은 옷가지들이라 해도, 근 몇 년의 몇 몇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들을 서슴없이 모두 버렸다. 그 때, G가 예의 그 우렁찬 목소리로 반갑게 우리를 불렀다. G는 이삿짐 트럭에 몸을 싣는 나를 보며 이사를 가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했다.


나는 그 날 아침이 오기 전까지 약 1년을 G와 연락하지 않은 상태였다. 극적인 계기랄 것은 없다. 우린 어떤 면에선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만큼 즉각적으로 서로를 잘 이해했고, 어떤 면에서는 절대 서로에게 타협하지 않았다. 내가 가끔, 아니 매우 자주 G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G도 잘 알았고, G도 자신을 절대 굽히지 않을 때가 있음을 스스로 잘 알았다.


우린 서로를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도와주곤 했고, 동시에 놀랍게도 자주 서로의 문제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G는 자주 내게 '네 걸 해야지. 그런 거 말고 네 걸 해야 돼.' 라고 말했고, 나는 G가 자신에게 하는 말을 내게 한다고 느꼈다. G는 내가 그렇게 느낀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이들처럼 듣고 반문하거나 조언하거나 혹은 여타 어떤 리액션도 하지 않는 내게, 정말이지 그의 말을 한 귀로 듣는 족족 한 귀로 흘려버리는 내게 도리어 더 자주 자신을 토로했다.


우린 둘 다 뭔가 잘 풀리지 않았고, 하지만 괜찮다고 자주 입 밖으로 소리내 말했다. 입 밖으로 괜찮다고 말하는 횟수만큼 우린 자괴감에 빠졌다. 그렇지만 우린 괜찮은 척 했다. 남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우리 서로에게도.


그 날 아침에도 우린 마치 그저께 거하게 밤새 달린 술친구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짧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마치 내가 뒤돌아 도망치는 탈영병으로 보이지 않게 해주려는 것마냥, G는 크게 웃으며 멀어지는 트럭 뒤에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삿짐을 싼 직후, 짐을 같이 실어줄 맹을 기다리면서, 텅 빈 집의 까맣게 더러운 방충망 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핸드폰으로 찍었다. (이 글의 커버사진이다.) 나는 그 사진을 내 인스타 계정의 첫 사진으로 올리고 그 곳을 떠나왔다. 후배들에게 돈을 빌리고, 동기들 모임에 오라고 끈덕지게 연락하다 나의 매번 다른 핑계에 질려버린, 대학 동기에게 무턱대고 전화를 걸어 일을 달라고 하고, 핸드폰 주소록을 스크롤해가며 여기저기 전화를 해 뭐든 어떤 일이든 할거라고 언질을 해놓았다. 그리고, 이사를 온 이후 1년이 넘도록 일로 만난 새로운 사람들을 제외하곤 거의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초기화. 쉬이 선택하지 않을 뿐 누구나 원한다는 그것.


새로 산 물건들로, 백지같은 새 집을, 그리고 나를, 리셋하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에 파스텔 톤의 벽에 덤벨과 기타를 기대놓고 찍은 사진을 올렸다. 나는 잠을 잘 자고 싶었다. 암막커튼과 새 침구와 실내용 슬리퍼를 샀다. 사진을 찍고 해시태그를 붙였다.


그리고 2년 후, 복대를 차고 누워있는 거다. 그 사이 먼지 앉을 자리를 빼곡히도 만들어 놨구나. 분명히 다섯 박스의 옷과 침구를 버리고, 캐리어 두 개와 백팩 두 개 분량의 책을 팔고 이사를 왔는데, 이제 책장은 세 개 더 늘었고, 백팩 두개는 커녕, 보스턴 백, 메신저백, 토트백, 힙색까지 널려있다.


그래서? 또 리셋?

그런데 이제 문제가 생겼지.

살림살이가 많아지고 씀씀이가 늘어나니 잠시라도 가만 있으면 잠수가 아니라 익사할 지경이네?

근데 왠걸? 아픈 몸이 되어버렸잖니, 그래서 케어가 필요해, 더더욱 잠수를 못 타네?

왜 이렇게 된 걸까?


'왜냐니? 여기 내가 누운 이 집을 봐라. 월급도 연봉도 계약금도 없이 하루하루 이 일 저 일, 몸뚱아리 하나로 이렇게 버티면서, 말로나마 남는 시간에 내 작업을 지속하며, 1인분 몫으로 사람사는 모양을 건사하는게 니 눈엔 우습냐. 터진 디스크라고 함부로 떠들어.'


짠한 자기 연민. 졸음이 쏟아졌다.



손톱 깎는 것처럼


열댓 시간을 자고 일어나도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하얗고 깨끗한 빈 방과 건강한 허리, 평균체중이 다시 주어져도 망가지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난 그때그때 상황을 겨우 모면하거나 어찌어찌 지나가거나, 그게 아니면 그저 기분전환을 한 것 뿐이야. 모든 일에 그렇게 대처한 거야.'


깔끔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백지상태의 시공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 부족한 뭔가를 채울 수 있는 물건이, 부족하면 더 넓힐 영토가 필요한 게 아니라, 먼지가 쌓이면 치울 마음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영화 '뮌헨'의 대사가 떠올랐다. '손톱은 계속 자라니까 그때마다 깎아주는 거야.' 영화에서의 맥락과는 전혀 다르지만, 나는 긴 손톱을 네일아트로 가리다가, 길어진 손톱이 어딘가 부딪혀 깨지면 그제서야 애꿎은 손이나 좁은 복도를 탓하는 짓 같은 태도를 관두기로 마음 먹었다.


의식적으로 '그럭저럭'에 머물거나 '꼭 그래야만 해?'의 곁길로 새다가, 필연적이고도 스스로 의도한 '어쩔 수 없음'에 가 닿는 삶 말이다. 그러다 그 결과가 못마땅하면?


초기화 따위는 없다. 언제나 지금, 여기, 이 상태에서 다음 순간이 연결된다.


끝도 없이 새로이 발견되는 바닥의 먼지들을 보며 문득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 두근거렸다.

'이건 인생을 통째로 바꿔야 되는 일이겠는데?'


너무 밑도 끝도 없잖아.

그러니까 이런 뜻이다.

있지도 않은 리셋은 서사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필요한 것은 리셋이 아니라 방향전환이다.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될까?'

아니, 사실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런 질문.

'나는 커서 뭐가 될까?'

서른 여덟에 다시 묻는 생뚱맞은 질문.

더 커야된다는 건지, 아직 더 클 수 있다는건지, 아니 사실 '걍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고백.


즐거워서 한 건 아니고, 사실은 무서워져서,

앉는 것도 힘든 몸뚱아리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어느때보다 자주 바닥을 쓸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