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불가능한 항시 대기, 소화 불가능한 전송속도
허리가 작살난 이후, 괄약근에 힘을 잘못 주다 디스크가 터질지 모르니 큰 일을 치르러 화장실을 갈 때 꼭 핸드폰을 들고 가라는, 후배 S의 진심어린 충고가 있기 전에도, 난 이미 화장실은 물론이거니와 잠깐 설거지를 할 때나 빨래를 널 때조차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치워두지 않았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은 오늘 전화기를 재발명합니다.'였는지 '애플은 이제 컴퓨터 말고 전화기 만드는 회사입니다.'였는지, 아무튼 간에 뭐라 멋지게 말하며, 애플의 기행 정도로 여겨지는 제품을 발표한지 십 몇 년 쯤 흘렀다.
내가 핸드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꾼 순간을 기억한다. 졸업영화 촬영을 열흘 쯤 앞둔 때였다. 핸드폰이 박살났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되살리거나 새 것으로 교체해야 했다. 다행히 할부금은 완납한 뒤였고, 통화요금은 3만원이 넘지 않았다. 콘티와 아역배우 리스트를 프린트하다 말고, 곧바로 학교 바로 앞 핸드폰 대리점으로 갔다. 점원은 뜬금없이 스마트폰을 추천했다. 스마트폰이 아닌 2G폰을 사려면 기계값으로 수십만원을 제 값을 다 주고 사야했다. 스마트폰은 이런저런 할인과 약정을 묶어 그보다 싼 가격에 살 수 있었다. 번호이동을 하면 거의 공짜라고 했다. 그러자고 했다. 나는 제작비도 쪼들려 돈을 빌리고 다니던 참이었다. 나는 공짜로, 그러니까 할인을 받고 수 년 동안 할부 약정에 묶여, 까만색 모토로라 스마트폰을 샀다.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 카톡을 보내면, 그건 공짜야!' '진짜? 그냥 공짜라고?'
인터넷도 와이파이가 있는 곳에선 공짜라고 했다. 모두가 날 의심하고 공격하고 반문하며, '도대체 네가 하고자 하는 그것을 넌 도대체 왜 때문에 굳이 하려느냐.'는 표정으로 날 씹어먹고 싶어한다는 망상에 허우적대고 있던 시기, 그러니까 졸업영화 촬영 열흘 전에, 스마트폰이란 분과 그 분과 관계된 모든 분들은, 잘만하면 다 공짜라며 나를 다독여주었다. 눈물이 다 났다. (그래, 구라다. 자전거를 타고 정문 오르막길을 오르는 동시에, 한 손으로 안 보고도 스텝들에게 분노의 문자를 날릴 수 있는, 내 피쳐폰이 그리웠다. 장갑을 끼면 버튼을 누르지도 못한다니. 이런 바보같은 핸드폰이 어딨어!)
그런데 이 '스마트한 폰'이라는 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파일도 보낼 수 있고, 보낸 파일을 볼 수도 있었다. 찾을 것이 있으면, 인터넷에 접속해서 검색해볼 수도 있었다. 오, 놀라워라, 이것은 그야말로 영화제작 프리프로덕션을 위한 '워크스테이션'이 아닌가! 놀라지 마시라. 아이패드가 없던 때다. 그 시기 네안데르탈인, 아니 X세대, 아니 386, 586...암튼 라떼꼰대들은 아이패드 없이 콘티라는 걸 그릴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애플은 이제 전화기 만드는 회사에서 아이패드와 무선이어폰을 만드는 회사로 시가총액 지구 짱을 먹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아이폰 1세대가 나온지 불과 10여 년이 지났다.
그리고, 오늘날, 나는 핸드폰을 작업 능률을 비약적으로 높여주는 스마트한 기계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인터넷으로 무엇인가를 찾고 싶을 때마다 브라우저를 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눈을 떼서 실재하는 세상의 무엇인가와 마주해야 할 때만 브라우저 창을 닫는다.
이제, 나와 핸드폰이 맺는 관계는 두 가지 상태 뿐이다. '접속중'이거나 '대기중'.
이제, 아무도 핸드폰을 '사용중' 인지 '사용중이지 않은지' 말하지 않는다. 전화기라는 것이 원래 그렇긴 했다. 예전엔 노트북이든 라디오든 사용하고 나면, 전원버튼을 눌러 그 기계를 '껐다.' 다시 사용하고 싶으면 다시 전원버튼을 눌러 그 기계를 '켰다.' 나머지 시간 동안, 그 기계는 '사용되지 않는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전화기만은 예외였다.
핸드폰이 있기 전, 집에 하나씩 있던, 소위 '집 전화기'는 통화를 끝내면, '끊을 수'는 있지만 '꺼둘 수'는 없었다. 그럼 안 되는 것이므로. 언제든 벨이 울려 내가 그 소리를 듣고 받을 수 있어야 하니까. 물론, 아주 간혹, 부득이한 경우나,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로 전화기의 선을 뽑아 놓곤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상황이었다.
요즘엔, 노트북이나 데스크탑도, 전원을 끄지 않고 '잠자기 모드'나 '절전모드'로 잠시 멈춰두는 기능을 자주 사용한다. '잠자거나', '절전중'인 노트북을, 우린 껐다고 하지 않는다. 굳이 완전히 끄지 않고 그렇게 두는 이유는, 언제든 클릭 한 번으로, 잠시 쉬고 있는 이 컴퓨터들을 바로 깨우기 위함이다. 완전이 끄고 난 뒤 다시 켜서 재부팅하는 데는 시간이 들고, 우린 그 시간이 아깝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나에게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가 돌아오는 것이 탐탁치 않다. 그들이 사용중이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게 하고 싶지 않다. 우린, 그들을 실제로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 때'에도, 그들을 '대기'시키고 싶다. 배터리만 채워져 있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우리를 위한 최신 기기니까.
손에 쥔 핸드폰을, 쓰지 않을 때 꺼두는 사람이 있을까? 스마트폰을 통화에 이용하는 빈도가, 다른 모든 용도의 빈도보다 압도적으로 적게 된 지금에도, 결국 스마트폰은 전화기이므로, '연락을 위한 항시 대기 상태'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기능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린 사용하지 않는 순간에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우린 전화기가 탄생한 이래로 줄곧, 무엇인가가 내게 신호를 주면 일단 그에 응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길들여져 왔다.
그리고, 그런 인류를 보며, 모든 인류에게서 돈을 벌고 싶은 인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한다. "스마트폰을 쥔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사용중이지 않게 만들고 싶지 않다. 우린, 그들이 실제로도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때'에도, 그들을 '대기'시키고 싶다."
이 영역은 새로 개척된 항로다. 한번도 가 본 적 없는 새로운 바다가 열렸다. 대항해시대가 다시 도래했다. 이 다재다능한 스마트한 분을 대부분의 시간 동안 '대기상태'로 가만 두기엔, 이제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다. 손에 쥔 컴퓨터, 라디오, 사진기, 비디오 카메라, 텔레비젼, VTR 플레이어, 게임기, 메모장, 노트, 녹음기 등등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조합의 총합으로서의 '핸드폰' 이라니! 그러니까, 그 모든 것들을, 현관문을 두드려 노크해서 직접 배달하고, 그 예측불가능한 불시의 방문배달에 응할 수 밖에 없도록 할 수 있는, 각 개인의 성역을 보호하는 유일한 성벽이자, 항상 열릴 준비가 된 단 하나 뿐인 문이라니!
배터리만 채워져 있다면, 스마트폰은 전원을 끄지 않고 얼마든지 '켜진' 채로 즉시 접속 가능한 대기 상태로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방전이 아니라, 우리가 문제다.
우리가 핸드폰의 놀라운 고해상도 최신 디스플레이를 통해 만나고 향유하는, '공짜'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은, 우리를 대기상태로 만든다. 그 모든, '의도를 가지고 제공되는 공짜'와 '내가 요구하지 않았지만 내 관심을 끌어 나와 교류하고자 하는' '흥미로운 콘텐츠' 와 '유용한 정보'들은, 항시대기 중인 우리에게 언제나 접근할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기꺼이 허락했다.
우리는, 우리를, 우리가 만든, '다시 켜는데 오래 걸리니까, 멀리 떨어뜨려놓고 싶지 않아 계속 켜두는' 물건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혹은, 우리는 서로가 그 물건을 통해 서로의 아바타로서만 만날테니, 실재하는 우리는 화면 뒤에서, 각자의 물건을 때에 따라 충전케이블에 잘 연결해주는 존재 쯤으로 간주한다.
상상해보자. '집 전화기'가 있던 시기를 살아온 이들은 쉽게 머리에 그려질 것이다. 그 때를 모르던 이들도 그저 한 번 머릿 속에 그려보라.
선을 뽑아버려서 내가 전화를 걸 수도 받을 수도 없게, 완전히 '꺼' 버리지 않는다면, 그러니, '연결'만 되어있다면, 연락이 오면 그 즉시 벨을 울리는 집 전화기가 있다. 그리고, 내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들이 내게 연락을 하는 것 이외에도, 누군가가, 내 통화내역을 통해, 어떻게 했는지 알지 모를 방법으로 내 관심사와 집안 대소사를 알아내어, 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온다. 전화를 받으면 TV를 켜보라고 한다. 채널을 맞추면 내가 보고싶어할 것만 같은 것을 공짜로 틀어주겠다고 한다. 전화만 받으면 카탈로그도 보내주겠다고 한다. 카탈로그를 보고 어떤 물건을 한 번 주문하고 나면, 그와 비슷한 업체에서 계속 전화를 한다. 집으로 공짜라며 우편물을 보낸다. 전화를 받기 싫고, 중요한 전화는 받아야하니, 우린 벨소리를 진동으로 대체한다. 하나하나 번호를 차단한다. 이제 우편물이 도착하면 우편함에서도 벨소리를 낸다. 우린 우편함의 벨소리를 없앤다. 하지만 우편함이 터지기 일보직전일 때마다 슬리퍼를 신고 내려가 현관문을 열고, 온갖 우편물 중 공과금 납입통지서 같은 중요한 우편을 분류해야 한다. 우린 전선을 뽑지 않는다. 중요할지도 모를 것들이 아예 없진 않기 때문이다. 집은 어수선하고 소란스럽고 집중이 하나도 안되고, 집 앞엔 온갖 선량한 얼굴의 방문판매객과, 지나가다 멈춰서서 내가 오픈하우스 기간 동안 오픈해두었던 거실이 맘에 든다며 오늘도 거실을 볼 수 있냐는 관광객과, 나랑 말이 잘 통할 것만 같아 서로의 집 주소와 우편 사서함과 전화번호를 교환하자고 했던 누군가가 찾아와 북적인다.
비약이 심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뭐 그럴 수 있다.
그럼, 또 다른 짧은 예.
초창기 MMORPG 게임들이 유행을 얻기 시작할 때, pc방 죽돌이들이 만렙을 찍기 위해 몇 주씩 pc방에서 기거하는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두고 사람들이 우려를 표했을 때, 길드의 수장이거나 서버의 저명 인사가 된 캐릭터의 본캐, 그러니까 실제 유저의 인터뷰를 해보면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오히려, 제 삶에서 여기 접속 중인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고, 일어나는 일도 이 곳이 훨씬 많거든요. 중요한 건 여기 다 있어요. 저라는 사람은 여기 이 캐릭터랑 이 캐릭터가 한 일들로 더 정확히 설명되는 것 같아요.'
'실제 자신은요?'
'밥도 먹고 잠도 자야되죠. 제 캐릭터가 잠을 자거나 밥을 먹을 수는 없으니까.'
식음을 전담하는 본캐.
배터리 충전을 담당하는 본캐.
알림에 즉시 화답해야 하는 본케.
앱을 지울 수는 있지만 다시 까는 본캐.
가상의 아이덴티티를 가꾸기 위한 계정 생성을 위한 본인인증을 해주는 본캐.
스마트폰과 포털사이트와 sns를 잘 활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며, 이것은 게임이 아니라 실제 삶과 교류와 소통이므로, 게임 폐인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본캐.
우린 접속중, 대기중이다.
우린 게임에 중독된 것이 아니다.
우린 우리 자신으로서, 스스로의 의도와 선택에 따라 시간을 할애하여 스마트폰으로 창의적 활동 중이다.
맞나?
ㅇㅋ 그럼 여러분 대다수는 중독이 아니라고 치고, 뭐 하나 묻고 싶다.
업무 중에, 1:1의 소통을 넘어서는, 처음 알게 된 십 수명의 사람들과, 몇 달에 걸쳐 전쟁 같이 치뤄 낸 프로젝트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종료되었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자신에게 주고 싶은 가장 손쉽고 간단하고도 짜릿한 보상은?
나는 답을 알고 있다. 내가 그랬고, 나와 같이 일한 사람들이 항상 그랬고, 내가 만나는 선배, 후배, 동기 모두 그 간단한 행위로 입꼬리를 올리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단톡방 일괄 탈퇴!' "나!가!기! 버튼 눌러버리기"
여러분은 나처럼 스마트폰 중독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ㅈ같은 알림소리에 관한 단상을 시로 쓸 수는 있겠지.
노이로제 유발을 줄이려 까똑음을 보신각 종소리나 목탁 소리로 바꿔보았자 부처가 싫어지게 될 뿐이란 걸 나만 아는 건 아니겠지. ㅇㅋ 그 정도로 합의하고, 내 경우, 그러니까 중독이라 스스로 여기는 경우로 넘어가자.
중독은 그냥 중독이다.
중독을 달리 말해보자. '심각한 중독.'
중독을 돌려 말해보자. '사실은 중독.'
나는 이 외에 다르게 말하거나 돌려 말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담배가, 마약이, 야식이, 알콜이, 도벽이, 모두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사실 중독이야..'라거나, '그거 심각한 상태인 거야..'라고.
요즘 시대에, '나 스마트폰 중독인 거 같아.' 라는 말은, 그냥 관용어구나 인삿말이 된 것 같다.
이런 말들처럼 들린다.
'말도 마, 요새 넘 바빠.'
'아 ㅆㅂ 퇴사하고 싶다.'
'나도 주식 해볼까?'
하지만, 중독은 쉽게 말할 것이 아니다. 본인이 중독이 아니라고 여기면 그에 대해 다른 말을 보탤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난 내가 중독이 확실하다고 느꼈다. 매일 밤, 밤새 스마트폰을 켜놓고 뜬 눈으로 밤을 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느새 방문하는 페이지나 웹사이트, 확인해야할 sns 피드 등을 정해진 시간 동안 한바퀴 둘러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 루틴 속에는 요일별 웹툰이나 알림이 뜬 OTT플랫폼의 새로운 콘텐츠도 속속 추가되었다. 일주해야 할 코스의 거리가 점점 늘었다. 이건 시간단축의 게임이 아니다. 한번이라도 RPG 게임을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게임을 한 번 끝장을 보고 나면, 이제 엔딩까지 달려가 빠른 시간에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이 더 이상 목적이 아니게 된다. 게임의 모든 장소와 모든 경우의 수를 모두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 게임을 관둘 수 없다. 그러니, 인터넷의 바다, SNS의 창공, 콘텐츠의 산맥을 모험해보겠다고 하면, 그 곳 어딘가에서 뼈를 묻겠다는 것 말곤 다른 결론이 날 리가 없다.
식당에서 주문을 시켜놓고 같이 온 사람을 앞에 놓고서, 아님 잠깐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는 중에, 나는 내가 들러야 할 모든 항로를 클리어하겠다며 또 다시 스마트폰을 연다. 그러나, 불과 몇 분 전 봤던 페이지에는 이제 또 다른 최신 정보와 링크가 업데이트 되어 있다. 원하는 정보는 점점 찾기 힘들어진다. 그 대신 헤매이다 곁길로 빠져 애초에 생각조차 않던 것들이 중요한 정보처럼 여겨지는, 새로운 모험의 장이 열리는 경험은 끝없이 계속된다.
나는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 나의 불안과 취약함에 따른 결과라고 지레짐작했다. 그 말은 절반만 맞는 소리다. 지난 글에 쓴 것처럼, 나는 즉각적인 피드백을 구하고 싶은 욕망과 저장하고 싶은 욕망을 떨칠 수 없다. 모든 것에서 뒤쳐지지 않고 싶은 마음과, 외롭게 고립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접어둘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내 탓만은 아니다. 우울증이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듯. (실제로 sns가 우울증을 유발한다는 연구는 이제 놀랄 일이 아니다. 아, 곁가지로 빠지지 말자. 니가 인터넷 익스플로러냐...) 내가 그러한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것은, 바로 나와 같은 다른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마치 자신처럼,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거나 해소하기 위한 것처럼, 나를 위한 마법의 물약을 제조해낸다.
나의 기분이나 느낌, 지레짐작만으로 이렇게 글을 계속 쓰는 것은 의미없는 일일 것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에 관한 것 뿐일테니. 그에 관해서는 글 말미에 다시 쓰도록 하고, 이제 좀 편하게 남의 말을 몇 개 옮겨보자.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딜레마'에 출연한, 미국의 저명한 통계학자가 이렇게 말한다.
"고객을 ‘사용자(user)’라고 부르는 산업은 단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마약이요, 하나는 소프트웨어 산업이에요."
-에드워드 터프티-
구글의 디자이너였고, 구글을 위시한 IT기업들의 디자인과 알고리즘이 사용자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우려하는 보고서를 작성한 뒤 구글의 디자인 윤리학자로 일하다, 지금은 인간을 위한 디자인을 주창하고 있는, 디자이너이자 심리학 전공자이자 이제는 윤리학자이기도 한 누군가는,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전거가 나타났을 땐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았어요.
도구라는 것은 쓰지 않을 때는 가만히 있습니다.
뭔가를 당신에게 요구한다면 도구가 아닌 거죠.
소셜 미디어는 사용되길 기다리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만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합니다.
당신을 유혹하고 조종하며 당신에게서 뭔가를 요구해요. 당신의 심리를 역이용해서 말이죠."
- 트리스탄 해리스 -
난 그냥 내가 중독자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나를 중독시키려 한 계획에 따라 중독되었다는 것을 알기로 했다.
지구를 실시간으로 하나로 묶은 만큼의 덩치를 지닌 디지털이라는 골리앗이, 사춘기의 다윗보다 허약한 나 하나를, "고객이라 이름붙인 '데이터와 리소스'"로 쪽쪽 빨아먹는 것에 내가 그런 줄도 모르고 당하고 있다는 것은 쪽팔린 일이 아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ㅆㅂ 진짜 ㅈ됐다'라고 생각하니까 맘이 편해졌다. 나는 전사의 심장을 장착하고 예리한 전략을 통한 반격을 꾀했....던 것이 아니고 그냥 서둘러 하나의 액션을 취했다.
대구 식으로 말하면,
"마, 딱 놔."
그 자리에 딱 놓고 자리를 떴다.
그리하여 내 폰엔 인터넷 브라우저가 없다. 아이폰에는 safari(이하 '사파리')라는 앱이 기본 브라우저로 설치되어 있다. '사파리'는 아이폰의 기본적인 앱 중 하나이므로(문자, 통화, 날씨, 시계 등과 같은), 완전히 삭제할 수 없다. 물론 쉬운 방법으로, 앱의 아이콘을 꾸욱 길게 누른 뒤 삭제 버튼을 누르면 화면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아이폰의 OS가 업데이트가 된 이후, 화면을 오른쪽으로 끝까지 계속 스와이프 하다보면, 비슷한 기능을 하는 앱들끼리 모아서 보여주는 화면이 나오는데, 그 곳에서는 여전히 '사파리' 앱을 볼 수 있다.
하여, 나는 여러 단계를 거치면 화면에서 '사파리'를 완전히 없앨 수 있는 법을 찾아냈다.
[설정] -> [스크린 타임] -> [콘텐츠 및 개인 정보 보호 제한] -> [허용된 앱] -> [safari] '비활성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뭐야, 완전히 없애는 건 아니네.'
맞다. 완전히 없애는 방법은 아니다. 그런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난 그 방법을 모른다. 그러니, 다시 앱을 되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사파리가 너무 그리워 다시 화면으로 불러오려면, 다시 한 번 저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내겐 저 정도로 충분히 귀찮아 미칠 노릇이다.
내 핸드폰에는, 접속하고 접속을 끊기까지, 내가 그 앱으로 어떤 것을 할지 확실히 예상 가능한, 하나의 앱이 하나의 기능만을 담당하는 것들만이 설치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은행, 극장 예매, 네비게이션, 지도, 미세먼지 측정, 걸음수 측정, 사전, 홈텍스 등등이다. 이렇게 되니, 필요할 때 해당 앱으로 그것만 하면 되니까 애초에 무심코 핸드폰 화면을 보게 될 일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의외로 새로 깔게 된 앱도 생겼다. 교보문고와 알라딘 서점 앱이 그것이다. 원래 인터넷 브라우져로 접속하곤 했는데, 브라우저가 없으니 앱을 그냥 깔았다. 오히려, 포털로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 책, 저 책, 신간이 뭐가 있나 기웃거리지 않게 되는 효과가 있는 듯 하다. 책 이름을 외우고 있는 것에 한해서, 앱으로 들어가 검색하고 구입한다.
내가 핸드폰을 붙잡고 가장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각종 포털 사이트의, 내가 사용자 지정을 해놓은 모든 탭의 모든 기사를 계속해서 죄다 살펴보는 것이었다. 필요해서 내가 찾아본 건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급기야, 인터넷 포털을 둘러보는 일에 내 스스로의 당위성을 부여해보고자, 우습게도 댓글들을 쓰던 시기도 있었다.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SNS와 뉴미디어의 폐해라 여겨지는 '분극화'에 나도 일조하고 있었다. 분극화라는 말은 새로운 개념처럼 들리지만, 사실 오래 전부터 우린 '확증편향'이라는 개념을 잘 알고 있다. 쉽게 말해, 우린 각자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는 그 개념. 뉴미디어와 sns는 이 확증편향을 더 공고히 하고, 더 나아가 그 확증편향의 사이즈를 줄이고 줄이고 수를 늘여, 더 폐쇄적이고 자기방어적이고 공격적인 집단들이 형성되는데 일조한다. 그것이 분극화다. 우린 더 좁고 높고 견고한 울타리에 둘러싸여, 더 기세 좋고 화끈하고 '우리'를 신봉하고 '저들'을 멸시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전사들이 된다. 나는 스스로를, 자유롭게 정보의 바다를 항해하며, 내가 찾아낸 사람들, 내가 찾아낸 정보를 올라타고 세상을 본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바람이 밀어낸 곳에 도착해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편하게 팀을 짜고 이미 알던 것들에 서로 기분좋게 동의하고 그와 다른 견해에 대한 적개심을 서로 공유하고 키우면서, 세상에서 시작해 섬 하나로 향해한다.
네이버에서는, 연예기사에 이어 스포츠기사에서까지 댓글을 막았다. 내가 매일 수 차례 드나들던 해외축구 뉴스들에는 '아디오스'를 고하는 마지막 댓글들이 도배가 되었다. 댓글들이 모두 막히고 나자, 나는 사실 서로 까대고 비꼬고 적절하게 웃기면서 수위를 지키는듯 넘는듯 드립을 날리고 거만하게 평가하고 그 평가에 무례하게 반박하는 모든 말들을 즐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댓글이 미디어일 수 있을까.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마샬 맥루한의 말에 따르면, 그것도 미디어이겠지. 트위터의 똥글도 미디어일 수 있지. 메시지니까. 그래. 그런데 어떤 메시지? 간단히, 그 순간에 늦지 않게, 자극과 이슈를 낳을 수 있도록, 즉시, 표현하는, 무엇. 메시지는 점점 단순해진다. 결국, 그 때의 Kibun을 말하는 것이 메시지라 할 수 있을까. 혹은, 모든 것이 속보인, 제목과 따옴표 안의 단어 몇 개가, 진위여부를 떠나 트래픽을 유도하는 것이 지상과제인, 그 글들이 기사라 할 수 있을까.
포털 뉴스를 그만 보자. 댓글을 그만 읽자.
매일 쏟아지는 기사들을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주간지를 정기구독하고 있다. 구독하는 주간지와는 다른 견해과 보도방향을 지닌 곳의 주간지 중에서도 하나를 추가로 구독하려고 알아보는 중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참고 넘길 수 없는 것이 많아지는 것보다, 들어보고 가늠해보고 내 의견이 왜 다른지를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껴진다. 분노는 불을 붙일 수는 있겠지만 불을 끌 수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포털사이트 접속을 관두고 나자, 당연한 수순처럼, 페이스북과 트위터도 탈퇴했다. 페이스북 탈퇴는 쉬웠다. (과정이 쉬웠다는 것은 아니다. 사이보그, 아니 주커버그는, 페북 탈퇴에 구구절절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만들어두었다.) 이미 페이스북 앱은 내 아이폰에서 사라진지 몇 년이 지났고, 그 후로도 PC로 접속한 기억이 없다. 앱을 지울 당시에도, 타임라인이 광고로 도배되기 시작하던 때였고, 이 참에 회원탈퇴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인증샷을 잘 안 찍는데, 이건 찍었다.
트위터의 경우엔 조금의 문턱이 있었다. 트위터 앱은 페이스북 앱을 지우던 몇 년 전에 이미 함께 지웠지만, 트위터는 그나마 아직까지 효용이 있는 부분이 있다 여겨졌기에, 인터넷 브라우저를 통해 가끔 접속을 했었다. 광고글이 많다고 생각되지도 않았고, 새로운 타임라인을 모조리 확인하지도 않았고, 다만 내게 필요한 것들을 찾아볼 때만 사용을 했었다. 무엇보다, 어떤 물건을 사용한 후기(나와 비슷한 성향과 취향을 가진 트친들이 내가 관심을 가진 물건을 직접 사용해보고 믿을만한 후기를 쓰는 경우가 많다.)나 Y와 함께 가고자 하는 음식점에 대한 리뷰, 그리고 여러 영역의 전문가로서 신뢰할만한 이야기를 한다고 여겨지는 몇몇 리뷰어들의 글들을 찾아보고 싶을 때 트위터에 접속하곤 했다. 그런데, 그게 꼭 내가 트위터에 가입된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들일까? 트위터에 접속하여, 내가 필요한 정보를 직접 검색해서 찾아보리라 마음 먹더라도, 결국 어찌저찌 타고타고 들어가 나와 별 상관없는 첨예한 이슈의 각기 다른 입장에 관한 날선 공방을 보며 얼떨결에 나도 분노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ㅇㅋ 탈퇴!
몇몇 이들과는 문자로만 소통한다. 이를테면 상담선생님. 상담 선생님과 카톡을 하면 뭔가 너무 서로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내비친 적은 없지만, 어쨌든 아직도 문자메시지로만 서로 연락을 한다. 목공소의 원장님과도 문자메시지만 주고받는다. 이들 이외에도 몇 명이 더 있다. 이들과 급한 통화가 필요할 때, 혹은 길거나 복잡한 내용이나 뉘앙스까지 전달하고 서로의 말을 주고받아야 할 때는 통화를 한다. 단 한 번도 이모티콘을 쓰지 않아 딱딱하고 건조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다. 우린 충분히 서로 예의있게, 기분좋게, 정확하게,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주고 받는다. 이모티콘을 쓰지 않으니 오히려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다. 격식을 차리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격식이란게 허례허식이 아니라 존중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문자메시지 하나로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가끔씩 업무 상으로 서로 그때그때 짧은 단답과 이모티콘을 주고받다가 메일이라도 한 번 써본다면 그 차이를 즉각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글로 충분한 것을, 우리는 귀염뽀짝한 움직이는 그림으로 하위호환작업을 거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쯤 되니 카톡도 삭제할까 싶었다. 아니, 이왕 삭제할 거면 탈퇴는 어떤가. 그러나 그러진 못했다. 카카오톡 계정으로 가입한 것들이 있는데, 그게 무엇무엇이었는지 모두 기억이 나지는 않고, 다시 그걸 하나씩 찾아내 다른 계정으로 등록을 하는 일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싶었다. 게다가, 카카오톡으로 가입한 것 중 가장 확실히 기억이 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브런치다. 카카오톡은 건드리지 말자. 걍 두자. 대신 알림과 배너 설정을 없앴다. 자주 연락하는 이들과의 대화창만 알림을 살려두었다. 중요하고 급한 일로 연락을 해온 사람은 어떡하냐고? 중요하고 급하면 전화를 할 것이다. 전화번호 없이 카카오톡 아이디로만 친구추가되어 있는 사람은 하다못해 보이스톡이라도 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핵심은 이렇다.
핸드폰에, 내가 의도를 가지고 설치한, 하나의 기능만을 하는 앱들만 두는 것.
이를테면, 저녁에 뭘 먹을까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냄새에 이끌려 하릴없이 헤매지 말자. 의도를 가지고 목표를 정하고 찾아가자.
항상 같은 결과를 주는 단골집을 찾아가는 것도, 전혀 먹어보지 못한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고 취향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도 좋다. 다만, 이것 저것, 내가 뭘 먹고 싶은지, 얼마나 배가 고픈지, 어쩌면 배가 정말 고픈 것인지 아님 기분이 울적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맘이 허해서 뭐라도 주워삼키자는 것인지, 혹은 그냥 빡쳐서 집에서 뛰쳐나와 사람많은 먹자골목을 쏘다니며 시비거리를 찾는 것인지조차 모르지 말자.
우린 모두 소화불량에 걸렸다. 잘난 척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를 포함해서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을테니까.
최근 들어, 8k 해상도의 영상을 찍을 수 있는 기기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화질이라는 말은 이제 수사가 아니다. 이미 4k만 해도 우리가 못 보는 모공마저 생생히 보여준다.
'열차의 도착'이라는 초창기 영화에 대한 일화는 유명하다. 요즘으로 치면 그저 기차역에서 기차가 도착하는 모습을 찍은 짧은 영상을 보고, 극장에 앉아 있더 관객 모두가 소스라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는 일화는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태어날 때부터 터치스크린을 접한 아이들은, 실제 책을 보고도 손가락 두 개를 움직여 확대를 시도한다. 화면 안 가짜가 너무 진짜 같아서 놀라는 세상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실물이, 화면 안의 가짜에 못 미치는 세상이 온 것이다.
심지어, 현실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그 놀라운 가짜들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 그대로 재현해준다고 믿는 이들도 없다. 이미, 눈에 보이는 것을 뛰어넘은지 오래니까. 내 눈으로 보는 낙엽보다, 8K로 촬영하고 QLED TV로 보는 낙엽이 더 쨍하고 밝다.
DSLR 사진기의 화질은 1억 화소의 시대가 도래했다.
수많은 테크 유튜버들이, 4K영상용 캠코더의 화질이 도리어 그에 한참 못미친다며, 스펙을 나열하고 장단점을 설명하고 비교한다. 1억 화소의 화질로 raw파일로 촬영한 사진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낮을 밤으로 바꿔놓아도 핸드폰 크기의 화면으로 보면 그럭저럭 볼만해지리라. 왠만한 사람 눈에는, 피사체의 색깔 일부를 아예 다른 색으로 바꿔도 괜찮아 보일지 모른다. 1억 화소의 사진을 얼마나 커다란 인화지에 인화하면, 그 깨진 픽셀이 눈에 보일까. 우린 그 사진을 얼마나 큰 크기로 벽에 걸고 싶은 걸까.
우린 이미지가, 말이, 문학이, 그림이, 메시지가, 실재하는 것과 그 이면의 보이지 않는 것을 비추는 거울임을 안다. 그러니까 사소하거나 무겁거나 거대하거나 새롭거나, 논란의 여지가 있거나, 당연하지만 주목받지 못한 것을 강조하거나, 아무튼간에 일말의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이 간극, 우회통로가, 일상을 예술로, 스치는 단상을 통찰로 만들어준다.
모든 것이 디지털로 가능한 시대로 넘어온 뒤로는, 이런 신기술이 우리의 사고에 끼치는 영향과, 우리의 사고 자체가 조금 달라졌다. 우린 이미지가 실체가 아니란 것을 잘 안다. 그리고 점점 고도화 되는 기술에 더 이상 속지 않는다. 저건 진짜가 아니야. 여기에서 통찰을 만들어내거나 느낄 겨를 없이, 우린 다른 의미에서 경이로움을 느낀다.
"오, 진짜보다 더 진짜같아, 대단해 우리의 기술."
"자, 이제 우린 더 이상 오리지널하지 않아도 탁월할 수 있어, 다들 무한대로 뻗어나가 연결될 수 있어."
< 네트워크는 광대하니까..>
공각기동대 만화의 마지막 대사다.
'네트워크 상에 의식만 남아 어디서건 접속 가능하다면 인격체로 볼 수 있는가..'라는 사뭇 진지한 주제를 던진, 시대를 앞선 만화.
'한 인간의 의식이 신호체계로 전환할 수 있는, 소위 디지털 정보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냐.'
'그렇다면 용량은 얼마나 되어야 하나'.
'네트워크에 접속되어 있다면, 클라우드 기술과 전송속도의 발전이 이를 해결할 수 있는가.'
하지만, '공각기동대'가 물음표로 남겨둔, '저 너머의 미래'를 우린 이미 넘어섰다. 위의 질문들은 딥러닝,머신러닝,ai 앞에 무용해졌다. 빛의 속도로 접속이 가능하다면, ‘나’라는 개인의 영역은 무의미하다. 네이버와 구글이 아는 것은 다 내 것이니까.
그런데.. 정말 그런가?
우린 결국엔 그냥 데이터가 통과하는 버스일 뿐이게 되고 싶은걸까?
아니라고 하겠지. 하지만 우린 실제로 그 모양을 하고 있다.
내가 가진, 다재다능한 나의 기기들이 배터리가 다 되지 않도록 충전을 잘 해주는 존재로 전락하거나, 나의 기기들과 나를 분석한 앱들이 내게 제안하는대로 이리저리 이끌려 각각의 앱에 대한 체류시간을 점차 늘려가고, 그럼으로 인해서 광고주의 나에 대한 잠재적 수익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증가시키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정확하고 옳다. 그런데 그보다, 우리의 사고체계에 일어나는 일이 더 문제가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소화가 안될 속도와 스케일을 생성해낸다. 우리는 습득에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아는 것이 없어져도 되는 세상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이것은 허상이다.
누군가는 무엇인가를 알아서, 모르는 사람들이 이제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간극만큼 멀어진다.
우린 공감과 이해에 문제가 생긴다.
맥락 없이도 대화(로 보여지는 각자의 말하기)가 가능하다. 톡에선 서로의 말이 씹히지 않는다. 묻힐 뿐이다.
순식간에 지나가고, 돌연 끊어진다. 그래도 이모티콘은 귀엽게 우리 모두를 토닥여준다.
중력의 단위가 G라고 하던가.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전투기 조종사가 되려면 기체의 콕핏 안에서 몇G까지는 의식을 잃지 않고 견뎌내도록 훈련을 받아야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벌써 감당 안되는 중력가속도에 이미 모두 의식을 잃고 내 의식을 대신하는 광대한 네트워크에 영혼을 걸쳐놓고 되는대로 흘러가는 걸지도 모른다.
"탈디지털"과 "아날로그 지향"은 감성이나 취향, 트랜드의 문제가 아니다.
디카로 찍은 사진을 세피아톤으로 보정하고 노이즈를 얹어 갬성 물씬 풍기는 이미지로 만드는 것이 아날로그 지향은 아닐 것이다. 탈디지털과 따로 놓을 수 없는 아날로그 지향은, 욕망의 감당 가능한 사이즈와 속도의 문제를 돌아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속도와 스케일이다. 어처구니 없도록 어마어마하지만, 그렇게 어마어마해서 실감이 나지 않고 숫자로만 어렴풋이 인식되는....정보의 용량과 전송속도. 하드를 처음 달고 태어난 286컴퓨터의 용량은 40메가였다. 불과 20여년 전 이야기다.
커지고 빨라지고 높아지면 그저 계속 원할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감당 가능한 만큼만을 원할 것인지.
내가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지 아는 것부터 시작할 것인지.
가치가 만들어지려면 시간이 걸린다. 시간이 걸려 만들어진 가치는 오래 남는다. 달리 말해 천천히 사라진다. 혹은, 천천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김아타라는 사진작가가 있다. 그는 장노출과 다중노출 기법을 이용한 사진들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2008년, 아무 전시나 보고 와서 레포트를 써 내라는 과제를 해치우려고, 아무 전시나 고른 것이 그의 사진전이었다.
그는 같은 사물을 같은 위치에서 찍은 이미지를 다중노출기법으로, 적게는 수백번에서 많게는 수천번 겹쳐놓아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때로는 셔터를 수 분에서 수십 시간까지 장노출시켜 그 시간 동안 프레임 안에서 존재하던 이미지들을 새롭게 끄집어낸다.
말로 하면 복잡하나 이미지를 한번 쯤 찾아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주제다. 그는 '존재하는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것을 이미지로 표현한다.
김아타
ON-AIR Project, New York Series, Park Avenue, 8 Hours
2005
8시간 장노출로 찍은 사진. 작가는 저 사진을 찍는 8시간 동안, 저 곳에 서서 지켜보았을 것이다. 무엇을?
운 좋게도, 저 사진을 직접 볼 때, 김아타 작가가 마침 전시장에 있었다.
그는, 함께 같은 전시를 보러 간 나와 내 일행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새로 나타난 거, 빨리 움직이는 거... 그런 것부터 사라져요. 오래된 거나 천천히 움직이는 건 오래 남아요."
계속 지켜보다보면...나중에 생긴 것 순으로 흐릿해진다.
10여년 전에 그의 사진들을 실제로 처음 보았을때엔 그의 작업의 의도를 가늠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의 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한다. 그는 정지된 프레임 안에 시간을 가두고 그 안에서 속도를 늦춰보려 한다. 그의 사진기의 셔터보다 빨리... 이 세상은 그의 눈과 손아귀에서 삽시간에 벗어난다.
셔터에 담기지 못하는 이미지들 뿐일까.
뉴스와 정보의 경우에도 김아타의 통찰은 그대로 적용된다.
1주일에 한 번 방송되는 저널리즘 비평프로그램 - 주간지 - 일간지 - 인터넷 기사 -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뉴스들 - 속보 - 저명인사의 실시간 트위터
맥락이 아니라 속도전의 목적이 뚜렸한 정보들. 맥락은 해석을 거쳐서 만들어진다. 해석은 시간을 들여 생겨난다. 무엇부터 사라질까. 무엇이 남을까.
정보 뿐일까. 네러티브의 힘은 그 여정에 동행한 우리의 물리적 시간에도 깃들어 있다.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 장면이나, 교차편집의 효과는, 영화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지나온 영화 상영의 물리적 시간만큼의 힘을 지닌다. 1편과 2편, 그리고 그 이후 16년이 지나 만들어진 3편으로 완결된 대부 트릴로지의 마지막엔 알 파치토가 분한, 노년에 이른 주인공 '마이클 콜레오네'가, 죽음 직전에, 자신의 인생에서 사랑했던 세 여인과 함께 춤을 추던 각각의 장면들이 몽타쥬로 등장한다. 물리적으로 그 컷들은, 불과 몇십초 길이로 연속해서 붙어 있지만, 그 시간동안 흘러드는 감흥은, 영화 속 수십년의 시간과, 그 영화를 보는 이가 살아온 시간과, 그가 그 영화를 처음 접했던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 합쳐져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을 만들어낸다.
혹시 모를 도움을 바라지 않고 직접 탐구하는 것에 관해서,
완전한 우연에서 오는 예기치 못한 기쁨에 관해서,
산책과 뜻밖의 발견과 느닷없는 연결지점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에 반해,
우연처럼 보이지만 의도된 랜덤 새로고침,
플랫폼과 알고리즘 하에서의, 무한해보이는 착각,
그리고 강박과 저장,
와이파이가 끊기면 무로 돌아가는, 결코 내 것이라 할 수 없는 지식인 답변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다시 길을 잃고 네비를 끄고 직접 헤매길 원한다.
시간을 들이고 내가 찾은 나만의 답을 적길 원한다.
다른 이의 나와 다른 답변으로 그의 궤적을 역추적할 수 있기를,
이해의 가능성을 서로 전제하고 격하게 토론하기 원한다.
그래서, 최소한 누군가와 마주 앉아,
핸드폰을 꺼낼 이유를 이제 찾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