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 original.
넷플릭스 검색창에 '미니멀리즘'이라고 검색하면, 첫 번째 혹은 두 번째로, "곤도 마리에 :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라는 TV쇼 프로그램이 나온다. 짐을 줄이고 간소하게 살라는 말을 입 밖에 내는 것조차 엄두가 안 날 정도로 어마무시한 양의 짐들과 함께 살아가는 미국 중산층 가정의 커다란 주택을, 체계적이고 말끔한 모습으로 바꿔 주는데 일가견이 있는 '곤도 마리에'는, 그야말로 정리와 정돈의 대가라고 불리울 만하다.
곤도 마리에가 거의 집을 재창조해주다시피 하는 각 에피소드를 보다보면, 자연스레 '곤도 마리에'의 정리의 기술과 순서에 익숙해진다.
정리하는 순서는 이렇다.
1. 옷과 신발을 버리고 옷장을 정리한다.
2. 책을 버리고 서재를 정리한다.
3. 문서, 서류 등을 버리고 책상과 수납장을 정리한다.
4. 잡동사니를 버린다. 창고를 정리한다.
5. 애착이 있는 물건, 추억이 깃든 감상적인 물건(sentimental item)을 정리한다.
정리하기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점차 버리기 어려운 영역으로 가야, 마지막에 애착을 가진 물건을 정리하기가 쉬워진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다.
각 순서에서, 물건을 항목별로 모두 꺼내놓고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하나씩 집어들어 자신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지 살펴본 후, 마음이 설레면 정리해서 넣고, 설레지 않으면 그 물건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버린다. 그녀는 버리는 물건에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실로 효과가 대단하다. 나는 10년이 넘은 내 분홍색 암막커튼을 세탁까지 하고 고이 접어 '필요한 분 가져다 쓰세요.' 메모까지 써서 마지막으로 보송보송한 세제 향이 나는 커튼을 들고 고맙다고 인사를 했는데, 헌옷 수거함 옆에 서서 울었다. 근데 왜? 왜 운거야...)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비교적 버리기 쉬운 것들(이를테면 몸에 맞지 않고 유행이 지나고 낡은 옷가지들)부터 시작해서 점점 난이도를 높여가며, 물건 하나하나가 나를 설레게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아내는 연습을 한다. 집 정리는,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몇 주에 걸쳐 계속된다. 그리고 하이라이트가 찾아온다.
1,2,3,4 단계를 거치고 나서, 셀 수도 없이 설레임 확인 훈련을 거치고 나서, 누구에게나 한 두 박스 쯤 있을, 아예 손을 대거나 버릴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물건들이 마침내 등장한다. 그 박스에는, 지금은 세상에 없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내게 보낸 편지가 있을수도 있고,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순간을 기억하게 해주는 기념품도 있다. 이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오래되고 늘어난 카세트 테이프나 낡은 흑백 사진도 있다.
곤도 마리에는 이런 물건들을 '센티멘탈 아이템'이라고 부른다. 그녀에게 의뢰한 참가자들은 이 센티멘탈 아이템 앞에서 하나하나 의미를 다시 새긴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물건도 있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았지만 사실은 지금 그 어떤 물건들보다 필요한, 잊고 있었지만 지금 되찾아야 할 무언가를 상징하는, 그래서 매일같이 눈 앞이나 머리맡에 두어야 할 바로 그 물건들이 발견된다. 이 모든 것들이 먼지 속에서 빠져나와 다시 빛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이 거기 있었음을 확인함으로 충분하다 여겨지면, 감사 인사를 하고 나서 그 물건을 비운다. 이제는 보내줘야할 때라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혹은, 정성스레 닦아 다시 진열해둔다. 참가자들은, 그들의 생과 한 데 엉켜 시간을 같이 견딘 그 애착과 애증과 회한과 다짐이 가득한 물건들을 앞에 두고 이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를 연출한다.
다시 넷플릭스 검색창으로 돌아가보자. '미니멀리즘' 이라고 치면, '곤도 마리에'와 함께 1,2순위를 다투는 또 다른 콘텐츠가 있다. "미니멀리즘 : 비우는 사람들 이야기"라는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의 주인공들이자, '미니멀리스트'라는 책의 공동 저자이기도 한 '조슈아 필즈 밀번'과 '라이언 니커디머스'는, 홀가분하고 가뿐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경험담을 전하는, 쿨한 라이프스타일 전도사의 느낌이 있다.
이 둘은 중고차를 타고 미국 전역을 돌며 세미나와 강연을 다닌다. 초창기에는 불과 몇 명이 모인 곳으로 반나절을 꼬박 차를 운전하고 가서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하곤 했다. 많지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그 곳에 온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나면, 기꺼이 어디든 자신들을 부르는 곳으로 찾아가서 함께 이야길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고 한다. 이제 책도 출간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일년 내내 초청 강연을 의뢰한다.
그들이 쓴 '미니멀리스트'라는 그리 두껍지 않은 책에는, 비단 짐과 물건을 줄이는 것 뿐만 아니라, 의미있는 대화를 하기 위한 방법, 작업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방법,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어 내는 법 등의, 삶의 태도와 창의적 활동을 위한 자기계발에 관한, 이들의 고민도 깨알같이 적혀 있다. 특히나 '하루 18분 운동법'이라는 챕터의 주장이 재미있다. 18분 동안만 해보자며 몸을 움직이는 것 정도는, 스스로가 아무리 핑계와 변명을 지어내도 하지 않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이 둘이 세미나에서 참가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 여성이, '조슈아 필즈 밀번'이 여러 매체와 책에서 직접 소개한 그의 집을 보고 많은 자극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조슈아의 집에는, 책이라는 것은 다 합쳐봤자 현재 조슈아가 생업을 위한 강의를 하는데 참고하기 위해 필요해서 도서관에서 대여한 참고 서적 네 권이 전부이다. 질문자는, 조슈아가 그 외의 책은 필요치 않다고 말한 부분은 동의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이 책을 무척 좋아하며, 어떤 책을 자신이 좋아하는지도 정확히 알며, 누군가가 자신의 집을 방문했을 때, 책장에 꽂힌 책을 빌려주고, 책을 다시 되돌려주기 위해 온 지인들과 그 책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 자신에게 매우 큰 기쁨이라면서 이렇게 질문한다.
"그러니까, 꼭 굳이 그렇게까지 책을 모두 없애야 할까요? 다른 물건들에 관해선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고 실천을 해봤고 효과도 있었지만, 책은 굳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를 못 느끼겠거든요. 오히려 그게 더 강박적인 것 같아요."
옆에 있던 '라이언 니커디머스'가 말을 거든다.
"아시다시피 저도 조슈아 못잖은 미니멀리스트이지만, 그리고 제 여자친구도 제 생각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몇 몇 물건들은 정말로 간소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기도 했지만, 그녀는 신발을 정말로 좋아하거든요. 그녀는 신발에 관해서라면 그것들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억지로 누군가가 그걸 다 처분하라고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도 그녀의 신발들이 좋아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미니멀리즘이라는 건, 결국 나의 상태를 잘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니까요."
그러자, 조슈아가 말한다.
"저도 책이 무척 많았습니다. 족히 2천 권은 넘게 팔았을 거에요. 라이언이 한 말도 일리가 있고, 전 그의 견해를 존중합니다. 우리가 모든 의견이 일치되진 않을 거에요. 하지만, 그래서 저도 제 의견을 말씀드려보자면, 그럼에도 책을 한 번쯤 최소한으로 가져보는 걸 시도해보라는 겁니다. 전 확실히, 책이 집 안 가득 쌓여있을 때보다 훨씬, 마음이 간소해졌다는 걸 넘어서, 심지어 책을 더 많이 읽어요.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게 그 질문을 답하라고 하신다면, 그럼에도 한 번 책을 최대한 줄여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가능하면 10 권 이내 정도로 최소화해보라고 꼭 말하고 싶어요."
내게 이 대화는 너무 흥미진진했다. 질문을 한 여성의 말은 바로 내 입에서 나왔다고 해도 될만큼, 나 또한 그걸 묻고 싶었다. 게다가 라이언과 조슈아가 각자 다른 의견을 가졌다니, 놀라우면서 고마운 일이었다.그리고, 라이언이 한 대답이 위안을 주면서도 허망하게 느껴졌다. 기분 좋으라고 해준 말을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명쾌하게 해결해주진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조슈아의 대답이 해결책을 준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질문에 무례하게 자신의 생각만 굳이 강조한 것도 같았다.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아질 것을 감안하고서라도 그리 강하게 주장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라이언과 조슈아가 의견 일치가 되지 않을만큼, 사실 나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이들에게도, 책이라는 건 미니멀하기에는 꽤나 애매하거나 어려운 과제, 혹은 굳이 그럴만한 강한 동기를 찾기 힘든 영역이다 싶었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굳이 건드릴 필요없는 부분이라고 하기에는, 사실은 엄두가 나지 않을만큼 큰 영역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짐 정리를 하면서도, 은연 중에 책은 부담을 주는 영역이었다. 그러다보니, 곤도 마리에가 쉬운 것부터 해치우라며 옷 다음으로 책을 정리하라고 할 때, 나는 조금 빈정이 상하는 기분도 들었던 것이다. '책이 정리하기 쉬운 거라고? 책이 얼마 없잖아, 쟤들은. 아니 얼마 없더라도, 책이라는 건 버릴 물건은 아닌 거 아냐?'
도리어 나는, 곤도 마리에가 말하는 그 '센티멘탈 아이템' 류의 물건들을 비우는 것에 더 내성이 있었다. 첫 극장의 기억인, 그 옛날 서부영화 '실버라도'에서부터 아마 '러브레터' 정도에 이르기까지, 바인더에 고이 모셔두었던 모든 영화 팜플렛을 위시하여, 편지나 쪽지, 손으로 그린 그림 등을 모아둔 박스나, 전화기에 저장해둔 연락처나 문자, 어릴때부터 쓰던 일기장과 수첩 등이 한 번씩 죄다 사라지곤 하는 경험을 거치며, 나는 체념과 아련함과 이상한 홀가분함을 느끼는 것이 조금은 익숙해졌다. 하지만, 책을 그냥 버려? 곰팡이가 슨 것도 아니고 물에 젖어 찢어지지도 않은 책을? 왜?
그러다가, 나 대신 물어봐주기라도 하는듯한 아주 솔직한 질문과 그에 따른 각기 다른 견해를 듣게 된 것이다.
'굳이 그럴 필요 없음'과 '그럼에도 해보는 걸 권함.'
'굳이 그럴 필요 없음'이라는 대답은 전혀 새롭지 않았다.
'그럼에도 해보는 걸 권함'이라는 말은 무례하고 편협한 답이라 느껴지다가도, '아니 그럼 쟤가 뭐라고 답하겠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조슈아는 자신이 그렇게 해보았더니 이렇더라고 말한 것 뿐이다. 그리고, 그럴 맘이 들지 않는다는 이에게, '그럼 그러지 마라.'는 말 말고 다른 답이 주어져야 한다면, 바로 조슈아 자신이 저렇게 대답해주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 변화를 주고 싶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한 번 해봐라.'
퇴원하자마자 수건을 버리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해온 것들이 내게 주는 교훈을 따랐다.
'찜찜하지만 그대로 있는 것'과,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다르게 해보는 것' 중에 후자를 선택하는 것.
하지만, 여태까지와는 다를 거 같다는, 내게는 바로 이게 하이라이트라는 삘이 왔다.
"2019. 3. 13. 새벽 1:30 - '책'을 정리하기로 결심."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다이어리에 써서 남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걸 보면 긴장을 하긴 했다.
긴장을 한 걸 보면, 어렴풋이 알고 있긴 했다.
어렴풋이 알고 있는 걸 보면, 직시할 때가 왔다.
내가 전의 글들에서, 이 글 전체가 막바지로 잘 나아가고 있는 중이라 말한 그 마지막 고비가 이제 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 버리기'는 하이라이트라기보다 클라이막스였다.
하이라이트는, 요약본이나 축약본, 혹은 무삭제판이나 예고편, 그 중에 어느 곳에 어느 타이밍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고 들어가기만 하면 그 임무를 다 한다. 반짝, 빛나는 한 순간. 말 그대로 하이라이트. 하지만, 클라이막스는 그와는 다르다. 클라이막스는 정해진 자리가 있다. 오르막의 끝에, 아주 잠깐 멈춰설 수 있을만큼만 평평한, 이 산봉우리의 가장 끝. 여기 도달하라고 놓인 가파른 오르막. 그 뒤론 내리막이다. 산봉우리에 서서 본 것들 때문에 오르막을 올라온 것이고, 그것을 보았기에 내려갈 수 있다. 내려가는 길이 발걸음이 가벼울수도, 마음이 무거울수도, 이도저도 아닐 수도 있으나, 그 내리막에서의 그 소회가 이번 산행의 결과다. 그러니 클라이막스는 엔딩 직전 말고는 다른 곳에 있을 수 없다.
책장 젤 왼쪽 두 번째 칸은 지금 바로 비울 수 있다 싶었다. 종이가방을 있는데로 다 꺼내왔다.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하게 산다'와 '작은 집 예찬', '소식의 즐거움', '심플한 정리법', 사사키 후미오의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나는 습관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조슈아와 라이언의 '미니멀리스트', 미니멀 라이프 연구회의 '아무 것도 없는 방에 살고 싶다', 칼 뉴포트의 '디지털 미니멀리즘', 밀리카의 '마음을 다해 대충 하는 미니멀 라이프', 미니멀리스트 시부의 '나는 미니멀리스트, 이기주의자입니다'를 담았다.
이제 막 한 칸이 비워진 책장 앞에 섰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나? 설레는 책을 찾아야 돼? 안 설레는 책이지만 필요한 책은? 필요하지만 안 꺼내본지 1년이 넘은 책은? 아니, 질문을 똑바로 해야지!
이번 산행의 목적지가 여기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너 책 왜 사? 책을 왜 사다니. 읽으려고 사지.
아니, 그 질문이 아니지.
필요한 게 그 질문이 아닌 줄은 어떻게 아는거지?
나는 답을 하고 싶은 게 있는건가.
그 답을 내가 입 밖으로 꺼내 직접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뭐라 물어봐야 되는건지 찾고 있는건가?
너 책 왜 읽어?
그것도 대충 뭉게는 대답을 할 수 있다.
너 책 왜 못 버려?
읽은 책은 왜 안 팔아?
책 귀퉁이는 왜 그렇게 접어 놔?
됐고, 그만 물어봐. 안 물어도 돼. 이유를 안 물어도 돼.
책을 내가 못 버리는 건...
책을 전시하듯 저렇게 쌓아두는 건...
그러면서도 또 사는 건...
죄다 읽어야 된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읽다읽다 소화를 못시키면서도 끌어안고 있는 건...
책장을 볼때마다 가슴이 답답한데, 그렇다고 책을 버릴 수도 없는 건...
접어둔 페이지마다 다시 펼쳐서 내용을 곱씹고 내 안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여기는 건...
그러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건...
그런데 또 책을 사는 건...
나는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다른 것들이 다 이해가 갔다.
이걸 알려고, 아니 직시하려고, 이렇게 해야 된 거였구나 싶었다.
"나는 내 글을 지금 당장 못 써내고 있다면 내가 오리지널이 아니라고 생각했구나."
"그렇게 생각해서 오히려 오리지널을 쓰지 못했구나."
"그래서 오리지널해지려면 닥치는 대로 섭렵해야된다고 생각했구나."
나는 한 때,(몇 년을 지속했다.) 각종 세세한 에피소드의 특정 대사나 캐릭터의 설정, 생김새, 가상의 지리적 배경, 각 씬의 무드를 표현해 줄 색감 등등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는, 내 개인적인 꿈의 프로젝트에 집착했다.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거나 조금이라도 영감을 줄만하다 싶은 이미지들과 책들(픽션, 논픽션, 그래픽노블을 망라하여)을 미친듯이 모았다. 발상은 점점 더 세밀해지고 점점 더 방대해지고 점점 더 예리해지고 있다고 느꼈다. 인스타와 트위터와 핀터레스트를 오가며 모은 이미지들이 수천장이 넘었고, 메모장의 메모들과 에버노트에 링크를 걸어둔 기사들, 워드로 정리한 글들, 떠오르는 대로 그 자리에서 수첩에 끼적여놓은 메모들, 삘 꽂힐 땐 그 세계관을 설명해줄 지도도 직접 그렸고, 내가 쓴 시놉을 프린트해 둔 뒷 장에 적은 몇 개의 문구 때문에 프린트한 종이도 수첩에 껴 두었고, 한 쪽은 가로줄이 그어져 있고, 다른 쪽은 아무 줄이 없는 식으로 만들어진 몰스킨 노트도 따로 하나 샀다. 모든 정보와 자료를 망라해서 오프라인 상의 수첩에 옮겨적고자 시도한 것만 두번, 하나의 폴더에 일련번호를 붙여 따로 디지털화하려는 시도는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었고, 캡쳐하고 다운받고 링크를 걸어두고 보관함에 저장해 둔 이미지들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창조할 세계를 완벽히 통제할만큼 완전한 신이 되기 전까진 첫 씬을 절대 적지 않았다.
그 즈음, 내가 출연한 팟캐스트는 고정 패널 중 연예인 한 명도 없이 전체 팟캐 순위 10위 안에 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앉은 자리에서 세상 모든 영화에 대해 그걸 만든 사람을 그 영화의 러닝타임만큼(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같이 녹음하는 패널이 내 말을 막기 전까지, 난 멈추지 않고 떠들어댔다.) 잘근잘근 씹어대며 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머릿 속 떠오르는 또 다른 아이템 따위들이, 온갖 곳에서 쓸어모은 파편들로 찐득하게 덩어리져서 가슴팍에 눌러붙었다.
캐리어 두 개에 책을 가득 담아 Y의 차로 수십 번을 옮겨 실었다. 이윽고 텅 빈 세 개의 책장 중 세트로 구성된 2개의 책장은 Y의 집 서재에 설치해주었다. 하나 남은 책장엔 걔 중 살아남은 책들이 서로 겹쳐 쌓이지 않고 여유있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조슈아의 말이 맞았다.
나는 가진 책을 비우고 나니 책을 훨씬 더 많이 읽었다. 진짜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된다!
작년부터 다이어리에 읽은 책과 그에 관한 짧은 메모를 써두는데, 그걸 세보지 않아도 버리기 전과 후의 차이가 명확하게 느껴진다. (걍 함 세봤더니 2019년 3월부터 지금까지 70여 권 쯤 된다.)
읽어야 할 것 같은 책이 아니라, ‘그때그때 읽고 싶은’ 책을 빌려읽거나 사서 읽은 후 내용을 정리해두고 반납하거나 되판다. 정리해 둔 내용은 몇번 다시 읽고 더 짧게 줄여 요약하고, 납득이 되거나 이해되면 메모해준 문서도 때가 되면 비운다. 그러니까, 책은 내용을 읽은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뜻을, 찾아가거나 우연히 만나고, 그와 아는 사이가 되고 친해지는 것이라는 걸 이제 알겠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아가서 만나고, 열린 마음으로 작은 모임에 참여해 가까워진 사람에게서 존경할만한 부분을 찾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당연한 소리다. 하지만 난 이제까지 필요할 것만 같은 사람들의 명함을 받아 둔 기분이 든다. 말하자면, 그렇게 한 발이라도 걸쳐두어야 할 이의 명단은 계속 늘어났고 그들과 어떠한 것도 함께 하지 못했다.
이제 클라이막스가 지나고 엔딩으로 가는 수순만이 남았다. 여운 있는 엔딩을 위해서는 반전과 캐릭터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것이 있어야, 영화가 끝이 나도 영화로 시작된 우리의 생각은 극장 밖을 나서도 끝이 나지 않고 지속된다.
나의 반전은 이러했다.
태양이 내 주위를 도는 게 아니라 내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 하지만, 지구가 태양이 아니라고 해도, 그건 말 그대로 그냥 지구가 태양이 아닐 뿐인 게다. 그 뿐이다.
그러니까, 지금 난 장편영화 감독이 아니라는 것. 난 글을 못 쓰고 있다는 것.
결국 아주 오랜 시간동안, 어쩌면 영영 영화를 못 만들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래도 괜찮아. 지금,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아니까 괜찮아.
캐릭터의 변화는 이러하다.
be original. 이 아니라 I am original.
마치, 안경을 쓴 채로 안경을 찾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화를 만들지 않고 있어도, 글을 쓰지 않고 있어도, 고르고 분류하고, 남기고 버리고, 남은 것을 관찰하고, 새로 들일 것을 고심하면서, 버리고 비우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고 남겨져 점점 더 선명해지는 ‘나’에 대해서 조금씩 더 알고 있다.
책도, 자랑할만한 물건도, 남의 평가에 영향을 미치려 몸에 걸친 것도, 하릴없이 앞에 놓인 허망한 순간을 채워주리라 기대하며 자학하듯 하는 소비도 없이 덩그러니 남은 사람 하나.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사람.
그런데 지금은 이야기를 쓰는 게 도무지 잘 되지 않는 사람.
나는, 내가 훔쳐서 이름을 바꿔넣더라도, 그것을 세상이 모른다면 바로 내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영화들의 목록을 썼다. 처음엔 50여 개 정도였다. 그 중에 추리고 추려 30개에서 20개로, 그리고 12개로 줄었다.
그 12편의 영화 제목을 쓰다 남은 노란 색 수첩 종이를 찢어 하나씩 적었다.
만약, 그 12편의 영화를 한 명이 만들었다면, 그는 인류 역사에 다시 없을 필모그래피를 지닌 인간일 것이다. 그러기란 불가능해보였다. 불가능해보인다는 것이 기분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건 누구라도 불가능한거야! '지금부터 피겨를 열심히 탄다고, 어쩌면 김연아 정도로 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마.'라는 말에 누가 기분나빠할 것인가.
내 노트북의 [item] 이라는 이름의 폴더 안에는, 각기 다른 제목을 붙인 폴더가 50개는 넘게 있다. 스무살 남짓 때부터, 그러니까, 컴퓨터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결과다. 다음 까페, 싸이월드, 네이버 클라우드, 아이클라우드, 구글 드라이브, 에버노트, 메모장, 텍스트문서, 워드, 한글, 스크리브너 등등 각종 클라우드와 문서 도구로 작성하고 링크를 걸어두고 비슷한 것들끼리 모으고, 행여 연관이 있을 것 같은 사건 기사나 기획 기사, 해외 사건들, 실존 인물 인터뷰, 거기 더해 레퍼런스 이미지 등등을 총 망라하면서, 시시각각 재분류하고 다시 편집하고 이름을 바꾸고, 진행되는 수준이나 중요도에 따라 일련번호의 순서를 바꿔가며 다시 리스트업하며, 끝없이 확장되는, 보이지 않는 나의 영토.
끄집어내 다 토해내고 써내려가고 만들고 쌓아 마무리 짓고 나서, 끝내 털어내는 게 아니라, 폴더 안에서 영원히, 될리 없는 '정리정돈'만을 무한반복하던, 나의 질리지 않는 유일한 유흥, 겨우 감당 가능할만큼만 찾아오는 통증. 어쩌면 나의 구원. 나의 원죄.
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시작한 이야길 끝낼 수 있을까. 이야기가 끝나는 것을 원치 않아 남에게 들려주지 않는 걸까. 나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 안에 들어설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하게 되면,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사실 이야길 하고 싶지 않은 걸까.
'걱정마, 넌 궁극의 12편은 고사하고, 아마 아주 운이 좋아 온 우주가 널 도와도, 볼만한 대여섯 편도 못 만들고 죽을거야.'
'너 지금 별로 영화 안 만들고 싶은 거 누가 아무도 뭐라 안 그래.'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한 건 인생영화 리스트('걔 중 보는 것뿐만 아니라 만들어봄직하다는 맘이 드는 것'이라는 단서 하나만을 덧붙인)를 '비운 것' 뿐인데, 즉시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불안함이나 뒤쳐진다는 생각이나 비교하는 마음이나 조바심은 없어졌다.
이후로 [item] 폴더 안의 폴더 갯수는 12개 이하로 유지하려 한다. 각 폴더에는 내가 종이에 적은 그 영화들 각 한편 씩과, 그에 상응하는 내 글들이 분류되어 들어 있다. 나는 오래 살 작정이다.
그렇게 한 것이 작년이다. 그리고 나서는, 사실 글을 쓰지 않았다. 목공소에서 가구를 만들고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수영을 배웠고 자주 걸었다. 들어오는 일 중 꽤 많은 일을 고사하고, 다른 꽤 많은 일을 맘이 동하면 기꺼이 했다.
그리고, 글을 쓰자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머릿 속도, 요 몇 년의 나 자신도 정리해보자. 그걸 쓰자. 결국 무엇인가에 대해서 글을 쓰자는 생각이 남는다면, 정제된 글을 어떻게든 쓰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써야한다는 생각이 없어지고 참고하고 섭렵해야한다는 생각이 없어진 뒤로 글을 더 많이 쓰게 된다. 심지어 즐겁게.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나의 지난 몇 년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쓸 수는 없었다. 가장 핵심을 놓고 그에 대한 글이 12개가 넘지 말자고 생각했다. (에필로그, 프롤로그, 2부를 제외한 본편 -‘진단서’와 ‘재활일지’ - 는 그래서 총 12개의 글이다.) 미니멀리즘에 관한 글이 되어야 했다. 계획한 것보다는 각각의 글의 분량이 훨씬 길어졌고, 그 안에서 또 나는 무언가 발견하고 비우고 배운다. 하지만, 마지막은 '나는 내가 오리지널을 만들어내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구나.'를 깨달은 시점에서 마무리될 것을 알고 있었다. 쓰면서 자연스레 그리 되었다. 내가 시작하고 끝맺어도 되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나의 이야기라 가능했던 것 같다. 내겐 내 이야길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려고 나를 알아차리는 데 몇 년을 보냈다 싶다.
대전제에 대해 말하고 나면 더 이상 쓸 말이 없어진다고 쓴 적이 있다. 이제 말할 수 있다.
그때그때 다르고 그래도 상관없다..라고 말하기 위한 대전제는 이렇다.
“그런다한들, 나는 내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기 위해서,
책상은 오로지 아웃풋을 위한 공간이란 생각과 ‘누가 봐도’ 와 ‘이것만 되면’의 함정을 피하자.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자던 기억을 지우려 하지 말자.
기록의 강박에서 벗어나자.
선택하고 정제한 기억들과 이미지와 인풋들을 감당 가능한 사이즈만큼만 수용하자.
누굴 위해서도 아니고 지금의 나와 상관없는 과거나 미래의 나를 위해서도 아니다.
의도를 지닌 것만이 남았다. 사라지지 않을 것만을 지녔다.
나만 남았다.
그러고 나니 내 안엔 다른 것을 담을 공간이 생겼다. 이제야 겨우, 뭐가 되었든 왜곡되지 않고 그대로 담길 것이다. 탐욕스레 끌어모으지 않아도. 담을 수 있는 것과 담을 수 없는 것이 있을 게다. 그래도 나는 나일 것이다.
충만함과 그저 순간에 몰입함, 그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 것.
그 연장선상으로써의, 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아니 이렇게 쓰고 정리하고 비우기 위한 글쓰기.
그런저런 연유로 쓰기 시작한 이 글을 마무리를 짓고 있다.
그리고 이제야, 다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럴 준비가 된 것 같다. 이제 창작할 수 있다. 그러고 싶다.
여기, 지금, 나는, 오리지널하다.
이제 그걸 안다.
지금 거기 앉아 있는 당신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