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덕질의 최고봉, 남 돕기와 지구 덕후

by cpt

스티커를 붙여주세요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이었다.

5년을 쓴 핸드폰이 수명을 다 했다. 때 마침, 최신 기종보다 저렴한, 내가 지금 쓰는 모델과 크기와 모양도 거의 같은, 보급형 새 기종이 출시되었다. 망설이지는 않았다. 다만, 마음이 조금 급했고, 날씨는 예상보다 더 추웠다. 그 달이 가기 전에 지급될 것이라는 페이 중 하나가, 설이 지나고 지급될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놀랍게도, 계약서를 쓰지 않고 하는 일이 아직도 비일비재하지만, 누군가의 소개를 거쳐 하게 된 일이니 돈이 떼이진 않겠지 싶었다. 그냥, 연말 전에는 잔금을 다 받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미리 하고 있던 차였다. 연말을 그냥저냥 무심하게 보내는 것은 그리 새롭지 않지만, 예상 못했던 지출이 더해지니 짜증이 올라왔다.


하얀 롱패딩을 입은, 키가 훤칠한 여자분이, 고개를 푹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걷던 내 앞에 멈춰섰다. 빨리 지나쳐 가려는데 살짝 손을 들어 내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길을 물으려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밖에 오래 있었는지, 코가 빨갰다. 하지만 표정은 밝았다.


'스티커 하나만 붙여주시고 가실래요?'


옆에는 판넬 세 개가 세워져 있었다. 각각의 판넬에는, 독거노인으로 보이는 누군가의 사진, 아프리카로 보이는 어떤 곳의 흙으로 지은 집, 그리고, 내가 이사 오기 전 살던 곳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오래되고 허름한 주택가의 반지하 방의 사진이 하나씩 붙어있었고, 손톱만한 동그란 스티커들이 그 아래에 여러 개 붙어 있었다.


'한국 해비타트' 라고 했다. 벽돌 하나의 가격이 얼마 정도 할 것 같냐고 물었고, 나는 얼마 정도일 것이라 대답했던 것 같다. 아님, 얼마의 돈이면 벽돌 몇 개를 살 수 있는지를 물었던가. 아무튼, 한국 해비타트의 활동과 취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내가 선 채로 무릎을 비비자 설명하는 말이 빨라졌다. 바쁘시냐고 했고, 나는 그냥 좀 추워서 그런 것이라 말햇고, 그녀는 죄송하다며 양해를 구했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한국 해비타트에서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집을 고쳐주는 활동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 속 노인은 독립유공자의 후손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짓는 집의 흙벽돌 하나의 가격이 불과 얼마라는 말도 들었다. 마지막 사진처럼, 노후되고 오래되어 붕괴의 위험이나 위생상의 문제가 있는 건물들을 리모델링해준다는 말도 들었다.


얼마의 돈, 그러니까 벽돌 몇 십장을 쌓을 수 있는 몇 천원의 돈(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이 있다면, 그것으로 세 곳 중 어디에 벽돌을 쌓아주고 싶냐는 질문이었다. 원하는 곳에 스티커를 붙이면 된다고 했다. 아마도, 새로이 독립유공자를 위한 후원을 시작하며 그 의의를 아무래도 조금은 강조하는 느낌이라, 판넬에 붙은 스티커들의 수도, 홀로 사는 독립유공자 후손의 사진에 가장 많이 붙어 있었다. 그 다음으론 아프리카. 오래된 주택이 가장 적었다.



남 돕는 게 아니라


내가 이사 오며 떠난 동네는, 작년부터 재개발이 한창이다. 한국에 잠깐 귀국한 나의 후배 C는, 나와 자신이 예전에 살던 그 동네를 한 번 다시 가보고 싶어, 한국에 머무르는 짧은 며칠 중 한 나절 동안, 그 곳에 혼자 다녀왔다. C가 그 곳에 다녀온 다음 날, 개봉한 한국영화를 한 편 보고 싶다고 하여 '악인전'이라는 영화를 보러 갔다. 그 영화 속에서, 좁은 골목길의 추격전이 벌어졌을 때, C는 흥분해서 소리 쳤다. "햄! 저기 거기 아니가?" 사람 한 명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가파른 오르막, 녹슨 대문들, 미로같은 골목길에서 다시 더 구불거리는 골목길로 접어들면 모습을 드러내는 '팡팡 노래방' 간판. 나와 C가 살던 집이 있던 바로 그 골목이었다. "어제 갔더니 다 비어있더라구요. 아, 요새 저기서 촬영 많이 하나보네. 우리 살던 집은 아직 불이 켜져 있더라고. 누가 사는 거 같던데, 담이 다 무너졌어요. "


나는 C에게, 저런 집들의 무너진 담벼락을 다시 쌓는데 벽돌이 몇 개 들 것 같냐고 물었다. 벽돌 백장이면 얼마인 줄 아냐고도 물었다. C는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그래서 그게 얼마냐고 물었다. 나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작년 연말부터 한 달에 2만원 씩, 아무튼 간에 저런 집을 고치는 벽돌값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C가 말했다. "누가 누굴 도와, 돈도 없는 양반이." "그러게."


나는 세 개의 판넬 중, 가장 스티커의 갯수가 적은, 흔히 볼 수 있는 골목의, 그 중 가장 허름하다 싶은 집이라면 의례히 그런 상태일, 습기와 먼지가 빠져나갈 곳이 없이 현관 앞까지 쌓아 둔 세간살이가 빽빽한, 기우뚱한 반지하 방이 찍힌 사진을 한동안 계속 쳐다보았다. Y가 먹을 것을 사와 넣어두려고 연 싱크대 선반 안에서 행진을 하던 바퀴벌레들도 생각나고, 길고양이 다섯마리가 밤마다 잠을 자고 똥을 싸던 반지하 내 방 창문 앞 담벼락도, 토니 스콧 감독이 죽던 날에 미친듯이 쏟아지는 비가 새서 슬리퍼가 둥둥 떠다닐만큼 바닥이 찰랑거리던 옥탑방 부엌도 생각났다.


반지하 방 옆 집, 우리집과 똑같은 넓이와 구조를 가진 집의, 퀵오토바이를 모는 아저씨의 가족도 생각났다. 여름에는 더워서 누구 할 것 없이 방충망만 쳐놓고 활짝 열어놓던, 그 골목의 모든 집들에서 풍기는 음식냄새와 흘러나오는 대화소리나 말다툼 소리들도 생각났다. 바로 옆 집의, 퀵 아저씨의 아내인 아주머니는, 저녁 식사 때마다 음식 냄새와 딸아이와의 실랑이가 우리 집으로 다 넘쳐흐르는 것을 미안해했다. 그러면서, 가끔 조금 넉넉하게 부친 전을 먹어보라며 열린 우리집 싱크대 위에 올려두곤 했다.


그 아주머니는 나에게, 이 근처 대학교 학생이냐며, 전공이 뭐냐며, 졸업 때까지 이 곳에 살거냐며 이런저런 말을 걸곤 했다. 퀵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그 집에 9년을 살았다고 했다. 딸 아이는 이 곳에서 태어나 내년에 학교에 들어간다고 했다. 퀵 아저씨의 오토바이는 원래의 색상인 짙은 자주색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새까맸다. 아저씨는 매일같이 새벽부터 일을 나가 밤 늦게 돌아왔다. 그 때의 나는, 내게 먹을 것을 챙겨주는 것이 '여유인지 배짱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마음 속으로 '2년만 어떻게 잘 버티자.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 하루 빨리 이 곳을 벗어나자.'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때 살던 그 집처럼 보이는 사진에 스티커를 붙였다.

그 아주머니를 돕는 마음에서가 아니었다. 그 아주머니는 나의 도움을 가장한 동정이 필요치 않은 분이다. 그 집 가족들에게는 뭐든 남으면 남을 챙길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나는 오히려 그 집에 살며 마음이 다 갈라지고 병들어 가던 가련하고 건방지고 조바심에 아둥바둥하던 나를 돕는 마음이 들었다. 한달에 한 번 쯤, 그 미숙하고 짠한 놈의 집에 한 2만원 어치의 물티슈와 담배와 콜라를 사들고 불쑥 찾아가서, 가스레인지 뒤의 기름 때 눌러붙은 타일을 대충 닦아주다 말고 현관 문 앞에 걸터앉아 담배 몇 대 같이 피고 콜라를 원샷하고 올, 딱 2만원어치의 벽돌만큼만 단단한 친구를 보내주잔 심정으로 정기 후원을 시작했다.


C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사진을 보니까, 내가 나를 돕는 거 같더라고."

C가 말했다. "맞네. 남 돕는게, 지 돕는 거다."


우린 왕돈까스를 거하게 해치우러 갔다. 세상을 배불리는 심정으로.



나보다 큰 것에 합류하는 것


10몇 년 쯤에는 2년 간 '옥스팜코리아'라는 곳에 후원을 했다. 나는 내가 그러고 있다는 것을 까먹고 있다가, 계좌에서 2년 째 빠져나가고 있는 후원금을 확인했다. 내 2년의 후원의 결말은 내 맘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였다. 왜 화가 났을까. 그깟 돈 얼마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동의하고 사인한 게 아니라,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 후원을 약속하고 몇 달 뒤에 후원을 그만두자고 생각해놓고, 그러기엔 찝찝해서 그냥 두던 것을, 지금에와서 그 돈을 아까워하는 자기에게 화가 나서? 아마 대충 그런 게 맞을 게다. 나는 여유가 없었다. 나는 내 스스로 공감하고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나에 대한 자책과, 그렇게 자책하는 나에 대한 죄책감이다.


뭔가를 비우면 뭔가가 찾아온다. 빈 만큼의 물리적 공간이 생기면 여유도 생긴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확실히 그렇다. 책상을 벽에 붙여놓았던 것을, 방 한 가운데에 두고, 책상 앞의 방바닥에는 러그를 깔고, 마주한 벽은 텅 비웠다. 그러자 차분히 생각할 여유가 생겼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생겼다. 경제적인 상황은 옥스팜코리아를 후원할 때보다 한국해비타트의 후원을 시작할 때가 더 어려웠다. 하지만, '더 해서 더 벌면 되지.'라는 생각을 했다. (기껏 월 2만원 가지고 그런 다짐까지 해야되냐고 자문하다가, 그게 뭐 어때서? 라고 답했다.)


그러니, 남을 돕는 것은 분명 나에게 도움이 된다. 나만을 위하며 살면서 나를 만족시키기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남을 돕는 나를 보며 만족하는 것은 쉽다.


지금은 스토리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고 있어, 보지 않은지 몇 년이 지난, 그 유명한 만화 '원피스' (이렇게 쓴 이 시점에 설마 이미 완결된 건 아니겠지?..)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오그라드는 대사들로 사춘기 갬성을 자극하기로 유명한 소년만화지만, 이 대사는 지금 다시 생각해도 곱씹을 만하다.


주인공이 어떤 악당(악당이었다가 동료도 되는 경우도 많아 확실치 않다.)과 결투를 벌이다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악당이 되는 거, 그건 쉬운 일이 아니야. 정의의 사도가 되는 건 쉬운 일이야."


마치, 스티븐 핑커의 명 저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와 맥이 닿는 말이랄까.


미니멀라이프 계의 공인된 튜토리얼 비슷한 것이 있다.

[ 물건 비우기 - 새벽 기상 - 글쓰기 - 운동 - 명상 - 요가 - 후원 - 친환경 - 채식 ] 으로 이어지는 연쇄 작용이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도, 정해진 순서도 없고, 모두가 그런 것도 아니나 생각의 궤적이 비슷해지는 경향은 확실히 있는 듯하다.)


다들 그렇게 되는 그 길에 나 또한 올라선 것이 마치 유행을 좇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구와 타인을 생각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 않나?


여기에 핵심이 있다. 누가 봐도, 그건 나쁜 게 아니라고 당연히 긍정할 수 있는, 바로 그 것에 내가 공감하는 것.


배움과 성장에 관한 말 중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뉴턴이 말했다던가.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서 세상을 더 멀리 보라."는 표현이다.

이는 개인의 단계적 성장이나 문명의 발전에 관한 과학자적인 관점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내겐 우리 모두가 어깨에 타고 오를 수 있고, 우리 중 누구도 그에게 자격지심을 느끼지 않을 '거인'이 있다는 개념으로 내게 다가와 위로와 평안함을 준다. 다른 말로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속박처럼 느껴지던 원칙이, 나 또한 그 안에 있음을 인정할 때 나를 지켜주리라는 생각.


그래서 나 또한 저 뻔하지만 입증되고 공인된 넓은 대로를 걸어간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아무리 전 세계인의 개나소나 위시리스트라 한들, 그 길을 걷는 순례자의 여정이 무색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 길이 '바로 그' 순례길인 것은, 그럼에도 그 길이 그런 길이니까.


남을 돕고, 연대하고, 당대에서 벗어나 후대를 위한 시각을 갖고, 다름을 경청하고, 나의 옳음을 재고하고, 아끼고, 재활용하고, 쓰레기를 줄이고, 동물을 사랑하고, 소수자를 지지하고, 다시 돌아와 내 몸을 아끼고, 나를 존중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럴 때, 내 몸이 덜 아프다. 이기적인 발로로 그렇게 해도 좋다. 그것이 당신의 몸도, 남의 마음도 구한다면 그걸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신약 성서의 이런 케케묵은 말이 2천년 째 라임마저 살아있는 펀치라인인가보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딱 그만큼만. 딱 그 마음가짐으로. 남을 돕는 것이 나를 구한다.


앞으로 또 여러 취미와 새로운 경험에 열린 마음으로 임하겠지만, 결국 이래나저래나 지구 덕후가 짱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을 돕는 것으로, 나를 스스로 도울 수 있다.


지금, 여기 다 있으니까.

지구에 우리 모두가 사니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