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말하기, 듣기. 아니 진짜로.

커뮤니케이션 기초교양 재수강 / feat.삼국지

by cpt

커뮤니케이션학


대학교 전공이 언론정보문화학부 공연영상학이다. 지금은 그 학부의 이름이 커뮤니케이션학부로 바뀌었다. 이름이 바뀌기 전에도 커뮤니케이션 관련 수업은 전공필수 수업이었다. 커뮤니케이션에 탁월하진 못해도, 결코 못하진 않는다고 자부했다.


20년 쯤 전에 들은 '커뮤니케이션의 요지'는 대충 이렇다.

1:1 대인 커뮤니케이션에서부터 소그룹 커뮤니케이션, 불특정 다수를 향한 일방적 커뮤니케이션, 혹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뭐라 부르건 아무튼 사람 간에 일어나는 교류에는, '상황에 맞는 언어적, 비언어적 방법과 적정 거리가 있다'는 것. 긴밀한 말이나 정감있는 대화를 한 명과 나눌 땐, 가까이 다가가게 되거나, 가까이에 있는 사람과 그런 대화를 나누기가 더 쉽다거나, 그 반대이기도 하다는 것. 공식적인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홀로 말할 땐, 1:1 커뮤니케이션에서 유효했던, 반응을 시시각각 살피며 활발하게 이뤄지던 티키타카보다, 명확한 발음과 발성으로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정석이라는 것이 그런 예일 것이다.


뭐 당연한 소리, 하나마나한 말이라 들리겠지만, 상황에 맞게 '길'이 있다는 개념에 진지하게 동의하면, 때때로 정말 여러 길이 열린다.



커뮤니케이션 스킬?


이를테면 이런 것.

전문 연기자가 아닌,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어 모두 똑같은 옷을 입은, 400명 쯤 되는 6-9세 사이의 아이들과, 이 아이들의 부모들과, 이들을 줄 세우고 인솔하기 위해 급히 하루짜리 알바로 고용된 20대 초반의 50명의 인원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면서, 이들이 정해진 동선을 움직이며 아직 완벽히 숙달하지 못한 율동을 하게 만들고, 이를 실시간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촬영하여 이들이 모두 지치기 전에 촬영을 종료하는 방법은? 덤으로, 장소는 휴일의 경복궁이다.


급한 연락에 도착한 그 현장에서,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내가 혹시 몰라 데려간 후배 셋 뿐이었다. 주최측과 연출팀은 자기들끼리 소통할 무전기 하나 없이, 현장에 딱 하나 있는 확성기를 내 손에 쥐어줬다.


줄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이동을 어떻게 시킬 것인가. 현장 통제를 해본 적 없는 알바들이 서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시킬지 모를 때 그들에게 뭘 시킬 것인가. 내 아이가 제일 잘하니 앞 줄에 세워달라는 모든 부모의 말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인형탈을 쓴 자원봉사자에게 달라붙는 아이들을 어떻게 떼어낼 것인가. 우왕좌왕하며 탈진 직전에 이른 율동 선생님들의 눈초리를 어떻게 스리슬쩍 넘길 것인가. 소리를 지를 것인가, 차근차근 반복해서 잘 설명할 것인가, 무전기를 당장 훔쳐서라도 가져오라고 윽박지를 것인가.


팁을 말해보자면,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나 이외의 모든 인간 : 확성기를 든 나"로 형성되어버린, 1000:1 쯤 되는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전복시킴과 동시에, 나와 소통해야하는 상대편 구성원의 핵심을 이루는 인원들의 특징을 파악하여, 주도권을 쥐되 반발이 없을 손 쉬운 통제방법으로 이들의 자발성을 득해야 한다.


해법이 까마득해 보이지만, 별 거 아닌 방법이 꽤 효과가 있다. 그냥, 젤 앞에 있는 애들 중에, 제일 협조적으로 참여하면서 율동도 잘하는 아이를 계속 칭찬한다. 그 아이와 계속 긴밀하고 조용히 대화한다. 그 아이에게, 양 옆의 아이를 도와주면 어떻겠냐고 말하고, 그 양 옆의 아이들이 그 아이의 말을 들으면, 도와준 아이를 다시 칭찬한다. 그 내용이 다른 아이들에게 다 전해질 필요는 없다. 확성기를 통해서는, 그 아이를 칭찬하는 말이 멀리 있는 아이들에게도 들리게 한다. 칭찬과 관심과 긴밀함을 빌미로 경쟁을 붙인다.


잘 하는 아이에겐, 확성기를 10초간 쥐어주고 '빵꾸똥꾸'라고 소리지를 수 있게 해주고 제일 앞 줄에 세운다. 제일 앞 줄의 구성원들 중 일부는, 한 번의 율동 후에 다시 뒷자리와 바뀐다.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며 바뀐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은, 자원봉사자가 목마를 태워 그 자리까지 데려다 준다. 부모들이 이 경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나는 때때로, 칭찬을 하는 사이사이에, 갈라진 목소리로 힘겨워하는 나를 연출하지만, 꿋꿋히 해보려한다는 모습을 내비친다. 인형탈과 인지상정의 시선교환을 나눈다. 멍 때리던 자원봉사자 중 한 명이 인형탈에게 자발적으로 물을 가져다준다.


다른 예가 무엇이 있을까.

신체검사에서 정상 판정을 받고 군대에 현역 입소하는 훈련병들 말고, 상근예비역이라는 이름으로 소집되는 훈련병들이 있다. 이들은 일정 기간 현역 복무를 하고, 예비역에 편입된 뒤에 자신의 주거지 인근에서 출퇴근하며 복무한다. 흔히 '공익'이라 부르는 사회복무요원과는 다른 제도이다. (자세한 규정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이들은 훈련 끝나면 몇 개월 부대에서 생활하다가, 집에서 출퇴근을 한다.) 고졸이거나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이들 중에 상근예비역에 선발되는 경우도 있고, 징역 6개월 미만의 실형이나 징역 1년 이하의 집행유예를 받은, 신체검사에서 1급을 받은 건장한 수형자도 선발된다.


간혹, 아마도 같은 동네 선후배거나 아는 사이인 것으로 보이는, 수형자 여러 명, 말하자면 서로 친한 '어깨'들이 이 한 번에 한 기수로 입소하는 경우가 있다. 그 기수의 다른 훈련병들은 긴장한다. 초장부터 분위기가 쏠린다. 다들 주시한다. 조교들도 긴장한다. 명분 없이 트집을 잡아 일부러 기를 죽이려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고, 그렇다고, 자연스레 서열이 생기고 여유를 부리게 놔두면서, 다른 훈련병들이 그걸 보고 훈련과정을 건성으로 보도록 그냥 넘어가는 것도 쉽지가 않다.


제일 덩치가 크고 험상궂은, 혹은 꼭 그렇지 않더라도 제일 꼭대기로 보이는 훈련병에게, 가장 덩치가 작고 피부가 하얗고 얌전하게 생긴(보통은 짬밥과 반비례한다.) 조교가 다가가, 신발끈을 제대로 묶으라고 말한다. 묶는 법을 담담하게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군대에서는, 원칙적으로 신발끈 묶는 법이 정해져 있고, 이건 듣지 않고는 절대 모른다. 보통은 군대 있으면서 그걸 일부러 트집잡지 않고는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하지만, 훈련소에서는 6주 내내 그런 사소한 트집거리를 가르친다.)


자기보다 쪼그만 조교가, 자기 신발 뒤꿈치에 발끝을 대고, '이 발부터 다시 묶어보라.'고 말하는데, 거기다 대고 방어적이거나 뾰족한 눈매를 계속 하고 있기엔, 조교가 알려주는 신발끈 묶는 법은 그리 어렵지도 않고, 시키는대로 하지 않기엔 딱히 기분 나쁠 구석이 없다. 몸을 슬그머니 숙여 시킨대로 하려고 움직이면, 쪼그만 조교가, 어디 어떻게 잘 하고 있는지 한 번 보자는 듯, 그 훈련병의 상의 깃을 살짝 뒤로 당긴다. 그 훈련병은 벌러덩 자빠진다. 속된 말로 와사바리, 혹은 모두걸이를 걸어서 넘어뜨린게다. 사실 딱 그럴 수 있을 타이밍에 확 낚아채는 거지만, '어디 봐봐.' 라고 친절히 말하다가 넘어진 훈련병을 보며 '어~?' 라고 되물으면, 넘어진 이도, 자기가 쉽게 자빠진 것처럼 느낀다. 조교는 어이 없다는 듯, "어?~ 왜 이래, 이거? 어지러?" 라며 일으켜 세운다. "똑바로 안 서?" 하며 엉덩이를 툭툭 털어준다. 이목이 쏠린다. 누가 봐도 얼굴이 연탄 같은 조교가 큰 목소리로, 넘어진 훈련병과 친해보이는, 바로 옆의 훈련병에게 쏘아붙인다. "웃겨? 넌 니 동기가 자빠진게 웃겨?" 넘어진 훈련병은 자기를 변호해주는 조교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동시에, 케어받는 기분이 드는건지, 아니면 뭐가 기분이 나쁜지 정확하게 모른 채로 일어선다. 그 때 다른 조교가 그에게 한 마디 덧붙인다. "야, 빨리 안 일어나?"


복잡하면서 뭐가 뭔지 모를 이 과정의 요지는 이렇다. 일관적이지 않게 대하면서, 상황은 주도하는 것. 그리고, 상대의 신체를 그의 통제 밖에 두는 것. 기분이나 의도가 파악이 안되게 해서 다소 불안하게 만드는 것. 지난 세기말의 훈련소 조교들의 교수법이라는 건 대충 이런 식으로 전수되고 이뤄졌다. 속된 말로, 그냥 야지나 주고 소리지르고 윽박지르는 건 별 효과가 없다. 무서움을 느끼게 만드는 건 약효가 금방 사그러든다. 차라리 나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그들에게 짜증과 귀찮음을 유발하는 이로 인식되는 것이 더 낫다.

언젠가 한 번 언급한 기억이 있는, 세계사 선생님의 경우는 이렇다.

그는, 학교 내의 반항기와 피지컬과 충만한 에너지와 그것들을 통해 쌓은 이력이 화려한, 그의 말에 따르면 '진짜 꼴통'들을 일부러 상대해주는 것에 취미가 있었다. 그 선생님은 졸업한지 한참 된, 우리도 이름과 생김새와 요즘 입고 다니는 옷과 드나드는 곳을 잘 아는 '꼴통 형들'과 막역한 사이를 유지했다. 우리가 학교에 있을 때에도, 책상을 뒤엎는 것으로 포문이 열리는, '꼴통들의 화려한 이벤트'가 시작되면, 이야길 들어줄테니 따라오라고 말하고, 덤빌 듯 다가서는 그 학생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우린 급격히 관심이 사라졌고, 어찌저찌 일은 일단락되곤 했다. 우리끼리는, 그때마다 선생님은 골목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빌거나 담배를 주거나 용돈을 삥뜯기고 돌아온 것이 아닐까 수군댔다.


선생님은 나중에 이런 말을 해주었다. 나는 대학에 가서야, 그것이 커뮤니케이션의 요체라는 걸 알았다.

"걔들한테 더 소리지르고 더 소란스럽게 만들고, 몽둥이 들고 욕하고, 전교생이 다 모여들게 만들면, 걔들은 더 신나. 그게 지가 하고 싶은 건데. 나랑 둘이 있으면, 그냥 담배 한 대 피고 몇 마디 들어주고 끝나."

전국구 브로드캐스팅을 하고 싶은데, 조곤조곤 담소를 나누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거리와 사이즈 조절. 그리고 의외의 경청.


그와 비슷하지만 양상은 다른 또 다른 쉬운 예.

능력과 출신은 남보다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자존심은 세고, 자존감은 낮아 가끔 방어적인 사원이 있다. 상사는 예민하고 불안이 크고, 그래서 꼼꼼하고 괴팍하다고 정평이 나있다. 사원이 느끼기에 상사가 취할 수 있는 최악의 수, 그렇지만, 상사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그 사원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이고 효과적인 공격은, 1:1로 말해야 할 것 같은 대화를, 관중들 앞에서 큰 목소리로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야, 너, 어제 00한테, 내가 시킨 업무가 방법도 이상하고 효과도 없을 거라고 말했다며? 나한테 할 얘길 나한테 말하는 게 어렵니? 아님, 일이 버겁다고 미리 말했으면 내가 그 일을 너 혼자 하라고 했겠어? 말을 했으면 내가 못 들은 척 하니?" 사실, 그가 하는 말이야말로, 사원을 불러다 1:1로 말하면 되는 일이다. 그는, 그가 책잡는 그 사원이 저지르는 잘못이라면서 자신이 뭐라고 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그 사원을 혼낸다. 여러 사람 앞에서. 개선을 바라는 게 아니다. 창피를 주는 것이 목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사원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나 일하는 태도를 문제 삼거나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사원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목적에 정확히 부합한다. 효과는 즉각적이다. 완벽한 커뮤니케이션이 아닐 수 없다.


비언어적인 것들도 커뮤니케이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신의 페르소나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혹은 다른 말로 개인을 어떻게 브랜딩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면 이것을 무시할 수 없다.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는 모든 것이 나를 표현하는 메시지가 된다. 특정 행동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싸움을 걸고 따지려고, 하지만 억지 주장을 펼치며 변호사까지 대동하여 나타난 난감한 상대에게 불려 나간 까페에서, 앉자마자 취하는 행동. 만년필과 손바닥만한 꾸깃한 노트를 꺼내고, 녹음기를 켜고, 굳이 손목에 차고 나간 빈티지 손목시계를 끌러 테이블 위에 얹어놓고, 테이블 위에 얹은 두 손의 손가락 전체를 가지런히 맞대고 5초 씩 번갈아가며 맞은 편에 앉은 사람의 눈을 쳐다보는 것도, 일종의 '전하는 말씀'이 될 수 있다. (내 친구 G가 실제로 그러고 앉아있었다. 일은 쉽게 풀렸다. 상대방이 데리고 나온 변호사는 상대방이 격양된 목소리로 따질 때마다, 그러니까 개소리를 할 때마다 '방금 그건 협박이에요', '모욕이에요.' 등의 말로 그의 말을 제지하고, 그 날의 대화가 빨리 끝난 뒤, 그의 명함을 G에게 주며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뭐, 물론, 애초에 그 상대가 터무니없긴 했다. 하지만, 아무튼 그날의 G의 바이브는 아주 그냥 스웩이 넘쳐 기억에 오래 남는다.)


다짜고짜 로케이션 헌팅이 필요할 때, 혹은 촬영 시 인근의 민원을 해결할 때, 내가 그걸 절대로 즐기지 않지만 꽤 높은 성공률을 득할 수 있던 건, 뭔가를 찍을 때 입는, 지나가는 누군가가 보기에, '여기서 뭔가 찍는가보다.' 라고 생각할 그 놈의 카고바지와 에어맥스나 등산화를 벗어제끼고, 깔끔한 슬랙스(슬림핏에 복숭아뼈가 보이는 페이크 삭스 말고! 절대!)에 셔츠로 갈아입고 모자를 벗고 눈꼽을 떼고 세수를 하고 로션을 바르고 그 곳에 가서, 무릎을 살짝 굽히고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고 또박또박 천천히 문장을 완벽하게 말하되, 상대가 말을 시작하면 즉시 말을 멈추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한다. ‘촬영 중인 우리’에서 벗어나보면 상식인 것이, 그 안에 있으면 안 보인다. 촬영이 중요한 건 촬영하는 우리 뿐이다.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땐, 심정적으로 약간 유체이탈을 해서 제3자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도움도 되는데, 그렇게 유체이탈을 하여 전지적 시점으로 그 상황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내가 앞서 말한 그런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의도적으로 계속 의식했다.

어쩌면, 이런 게 소위 ‘커뮤니케이션 스킬’이라 불리우는 것들일 테다. (내 생각엔 그렇단 말이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과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여러 통찰에 딴지를 걸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냥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단지 느낌이 어떻다는 둥의 말을 이어가지 말라고 할 수도 있으니, 내 '느낌'에, 그게 그럼 도대체 '무엇' 같은지를 말해보는 것이 좋겠다.



'종합 능력치 1위'인 캐릭터의 특기


코에이라는 일본 게임 회사의 대표작은 누가 뭐래도 '삼국지'다.

이 게임의 묘미는, 500-600명 쯤 되는 중국의 삼국시대에 실존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각 인물은, 100점이 만점인 여러 분야에서 각기 다른 능력치를 달고 이 게임에서 활약한다. 예를 들면, 여포는 '무력'이 100인 반면 '지력'은 20을 넘지 못하거나, 제갈량은 '지력'이 100인 반면 '무력'은 참담하다. 유비는 '매력'이 100이다. 전체적으로 참담한 능력치를 지닌 인물도 있고, 특정 요소가 최상위인 인물도 있고, 골고루 적당한 만능형 인재도 있다.


이미 13편까지 출시 된 이 게임이 요즘은 망조에 이르렀다는 것은 논외로 하고, 1편이 나온지 35년(!)이 넘은 이 유서 깊은 게임을 통틀어서, 각 능력치의 총합이 가장 높은, '종합 능력치 1위'를 단 한번도 놓치지 않은 인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조조'다. 그리고, 이 게임은, 11편부터는, 각 인물에게 능력치 뿐만 아니라 고유한 특기도 하나씩 부여했는데, 게임 역사상 능력치 올타임 넘버원의 조조에게 부여된 것은 '허실' 이라는 특기다.


게임에 대해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시라.

'허실(虛實)'이라는 단어에 대해 말하고 싶다.


대충 내가 알기론, 손자병법 '허실' 편에 나오는 개념이다. 조조는 평생 전쟁을 벌이면서도 남는 시간에 손자병법에 친히 주석까지 다는 고급 취미를 가졌는데, 그 또한 실제 전투에서 허실, 다른 말로 '허허실실' 전법을 즐겨 사용했다.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에서는, 특히나 조조의 이 '허실'에 관한 일화들이 강조된다.


(역사서로써의 가치를 평가받는 '정사 삼국지' 나, 다른 유명한 삼국지 판본들, 예를 들면 진나라의 입장으로 쓰여진 정사 삼국지의 허점을 보완하는 시각이라고 일컬어지는 '배송지 주'나 하다못해 황석영, 정비석, 이문열의 삼국지의 미묘한 차이 등등...그리고 견과류나 육포에 비견될 만한 안주, '삼국지연의에 적힌 유명한 내용 중 대표적인 허구' 등에 대해서는 따로 따지지 않겠다. 뭐야, 삼국지 덕후인거 같네. 아니라고 하면 지인들이 웃겠지만...)


'허허실실'은, '허(虛)를 찌르고 실(實)을 꾀하는 계책으로 싸우는 모양을 이르는 말' 이다.(라고 구글을 쳐보니 나온다.)


쉽게 말하자면, 구라를 쳐서 목적을 이룬다. 달리 말하자면 그런 척 한다.

그럼 그냥 '뻥카'나 '블러핑'을 말하는 거 아닌가? 아님 좀 고차원적이라 느껴지게 말해보면, 자기연출?

허실은 그것들과 비슷하지만 좀 다른 구석이 있다.


조조가 덕질하던 '허실'은 '허장성세'랑은 다르다. 그는 상대방을 파악하고, 분석해서, 그의 행동이나 패턴을 예측해서, 그것이 작동하게 만든 뒤에, 그 예측대로 자신이 마련한 계획에 상대가 자발적으로 일조하게 만든다. 그러니, 뻥카를 날려놓고 반응을 살핀다거나, 기세를 이용해 자신의 취약함을 숨기고 반대로 상대를 위축되게 만드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스킬까지 동원하여 계획 전 단계에서 부터 '허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요즘 말로 하면, '심리 조종'까지도 포함된 넓은 범위의 계책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조조는 평생 편두통이 심했다. 그와 동시에 암살의 위협에 늘 불안해 했다. 그는, 언젠가부터 측근들에게, 자신이 편두통이 심해 잠 못드는 날이면, 가끔 잠이 깨지 않은 상태로 난폭한 행동을 하기도 하니 조심하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 자신의 침실 앞을 지키는 호위무사를 직접 뽑아놓고, 밤에 자다 일어나 칼로 베어 죽였다. 그리고, 울며 미안해하며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주었다. 그의, 소위 '몽유병'을 진심으로 믿은 이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그 이후로 누구도 조조의 침소 근처에 얼씬하지 않았다. 그 뒤로 잠을 좀 편하게 잤으려나?


다른 예로, 원소와 치룬 그 유명한 '관도대전'도 크게 보면 허허실실이다. (저명하신 삼국지 덕후 선생님들의 지적이 있을 수 있겠으나, 정중히 거절...) 간략히 설명하자면, 원소에 비해 병사들의 수나 나라의 규모나 대외적인 인지도에서 당시로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열세에 있던 조조가, 원소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면 반드시 요충지인 '관도'에 모든 병력을 쏟아부을 것을 알면서도, 바로 그 곳으로 나아가서 정면으로 맞선다. 죽자고 그 곳을 지키면서, 자신의 모든 병력으로 원소에게 맞서도, 결국 처참하게 초토화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라 여겨지는 모습이 대륙의 모두에게 낱낱이 까발려진다. 원소는 모든 물량을 쏟아부어 정면승부를 하다 장렬히 산화하리라 마음 먹은 조조를 신나게 두들겨 댄다. 조조는 그러면서, 뒤로는 온갖 미세한 상황들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아주 사소한 균열을 찾아내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결론적으로, 누구 하나의 배신으로 원소의 군대가 먹을 쌀이 한 데 쌓여있는 곳을 찾아내 모조리 불태우고, 원소의 군대를 그야말로 말려 죽인다.

미니멀리스트의 삼국지 강의라도 런칭하냐. 마무리하자.

조조의 가장 뼈 아픈 패배의 장면에서, 조조는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 '적벽대전'에서 대패한 후, 겨우 살아남은 조조가 이런 두뇌회전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로변과 좁은 숲길이 있다. 좁은 숲길 주변에는 병사를 매복시키기 딱 좋다. 누가봐도 좁은 숲길이 더 위험하다.


조조는 이렇게 생각한다.

"제갈량이라면, 대로변과 매복이 용이한 산길 중에, 좁은 숲길에 병사를 숨겨두었을 거다."


그의 수하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아니, 당연히 제갈량 정도의 책략가라면 허허실실의 전법을 써서, 누가봐도 사방이 탁 트여 매복이 용이하지 않아 보이는 대로변에 오히려 병사를 숨겨두지 않았겠습니까?"


"너흰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제갈량은, 나 조조가 허허실실의 대가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자신이 그렇게 허허실실의 전략으로 대로변에 병사를 매복하면 그것마저 알아챌 것을 예측할테니, 오히려 당연히 하수들이나 하는 계책으로 내 허를 찔러 나를 잡으려 하겠지."


제갈량도 조조 못잖게 그런 쪽에 머리 굴리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생각할테니, 대로변에 매복해라."


몇 번이나 이짓거리가 계속되었는지, 그리고 누가 누구의 예측을 벗어났는지 기억이 잘 안난다.

아무튼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겨우 매복을 빠져나온 조조는 호탕하게 웃으며 "제갈량도 별 거 아니군. 바로 여기에 병사 몇십 명만 숨겨놓았어도 이 조조를 당장 잡을 수 있었을텐데!" 라고 여유를 부린다. 그 여유부리는 목소리가 채 끝나기 전에 바로 거기에 매복하던 병사들이 조조를 잡으려 든다. 이짓거리도 몇 번 반복되었던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등장한다.


그 대단한 조조가, 평소 흠모하여, 유비의 의형제로서 절대 유비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 확실한 관우를 구워삶고 감동을 주어 자신의 수하로 부리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일전에 조조가 관우를 포로로 잡았을 때, 조조는 관우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으며, 심지어 유비의 생사를 알지 못하던 관우가 유비의 소식을 들으면 바로 조조를 떠나겠다는 망언을 하는데도 그것을 허락해주었다. 둘의 브로맨스는 애틋하기가 이를데가 없다.


그런데, 그 관우가, 화용도라는 곳, 조조가 절대로 도망칠 수 없는 마지막 길목에서 조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조는 이제야말로 정말 죽은 목숨이라 생각했다. 허허실실은 통할 리 없다. 조조는 냅다 엎드려 울며 목숨을 구걸한다. 관우는 조조가 그런 꼴을 보이는 것이 맘이 도저히 편하지 않다.


이 하이라이트의 주인공은 조조도, 관우가 아니다. 제갈량은 조조와 이번 전투를 치를 때, 관우를 제외시켰다. 그러니까, 라인업에서 뺐다. 후보로도 기용하지 않았다. 관우는 빡쳤다. 능력치로는 내가 최고인데 내가 게임을 못 뛰어? 내가 유비 형님 동생인데, 어디서 굴러먹던 서생이 감독을 맡더니, 나를 빼?


제갈량은 관우에게, 자신의 계략에 따르면 조조는 반드시 만신창이가 되어 화용도에 이를 것인데, 그 곳에서 반드시 조조를 죽여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관우는 조조에게서 입은 은혜가 있으니, 아무래도 이번 전투에서 객관성을 지키기 힘들 것이라 말한다. 제갈량은, 그 말을 듣고 빡친 관우에게 이렇게 덧붙인다. 관우가 사심에 흔들리는 사람이라 여겨 그런 것이 아니라, 관우야말로 의리를 지키고 은혜를 갚는 것에는 절대 타협이 없는 사람임을 세상 모두가 알고 자기 또한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렇다고, 그것을 타협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너 조조한테 진 빚을 갚아야 되는데, 이번에 너의 그 원칙을 깨게 만드는 건 내가 참 슬퍼. 그러니까 다른 데서 다른 애랑 싸워서 공을 세우고, 이번엔 빠지자. 어차피 조조는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앞으로 난처한 상황은 없을거야.' 라는 소리다.


관우가 어떤 사람인가? 프라이드가 하늘을 뚫는 자다. 도발에는 반드시 응한다. 관우는 냉큼 이렇게 맹세한다. "내가 화용도에 도착한 조조를 못 죽이면, 돌아와 내 목을 내놓겠다." 군령장에 서명하고 싸인까지 한다.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미 스포일러가 널리 퍼져있다. 관우는 눈을 질끈 감으며 길을 터 준다. 조조는 줄행랑을 친다. 관우는 다시 돌아온다. 제갈량은 버선발로 뛰쳐나가 관우님이 가장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는 길이니 풍악을 울려라며 설레발을 치는 연기까지 하며 관우를 쳐다본다. 관우가 자기 목을 내놓고 사죄한다. 제갈량이 엄한 표정을 짓는 동시에 통탄해 마지 않는다. 그 나라 왕인 유비가 나서서 관우를 제발 살려달라고 쇼를 한다.


제갈량은 관우한테 '허실'을 썼다. 그 뒤로, 최고참 관우는 굴러들어 온 낙하산 제갈량 말에 절대 복종한다. 관우가 조조 같은 '허실빠'였으면 이야기가 사뭇 달라졌으리라. 이럴테니 이러자고 하면 그걸 예상해서 이렇게 할테니 그럼 난 첨부터 이렇게 해야지. 무한반복. 이러거나 저러거나의 결과는 정해져있는데, 그 안에서 무수한 판단과 의미가 중첩된다. 뭐 어쩌라고. 누가 알아. 누가 그걸 다 알아채.



재수강 : 말하기 듣기

말하기의 경우, 나는 돌려 말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아마 상담의 결과인 것 같다. 돌려 말하지 않는 것이, 무례하거나 잘못일 경우가 아닐 수도 있다. 그건 맞는 말이지만, 커뮤니케이션 전공자로서 어찌! 뉘앙스와 비유와 은유와 암시도 없이! 나오는 대로 나불대나! 대체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건 당연지사.


'실수하면 어떡하지?' '차라리 말 안하니만 못한 것 아닐까?'


하지만 여태 그래왔고, 그것이 문제라 느껴진다면 바뀌어야 했다. 그러니 연습이 필요했다.

내 입장만을 생각해서 뭔가 돌려 말하지 않고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말해버리고 난후에, 그런 걱정을 타파하기 위해 이렇게 덧붙여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느끼는 진짜 감정은 00인데, 내가 그걸 그렇게 표현한 것 같아."

"내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사실 00가 맘에 걸려서 그걸 지적하고 싶었던 것 같아."


그렇게 말을 하고 나면, 내가 소위 '허실'을 쓰지 않고, 그렇다고 무작정 솔직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아 '대화'가 아니라 '발언'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적절하게 허심탄회하면, 내 말은 받아들여졌다. 상대가 들어주고 그에 대해 대답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서로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기분과 메시지를 듣고 그에 대해 생각한 바를 말하는 것. 그러니까, 진짜 대화.


듣기의 경우, 말하기를 다시 연습하면서,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이런 생각이 들게 되었다. 누가 내게 무엇인가를 말하면, "저 사람이 저런 말을 저렇게 내게 해버리기까지, 내가 그러는 것처럼 용기를 내야 했을 수도 있겠지. 기분이 나쁠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의 말이 어떤 저의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나를 지레짐작한 결과만으로 함부로 말한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그냥 곧이 곧대로 들어보자."


우린 조조나 제갈량이 아니다. 설령, 허허실실 대가들이 100번의 고찰의 결과로 펼쳐내는 대전략의 과정이 너무나 처절하여, '대로변와 숲길 중에 어디에 매복이 있으리라 니가 생각한 것을 내가 어디까지 예상해서 내가 이렇게 준비해놓으면 넌 이렇게까지 생각한 나를 또 판단한 뒤에 그걸 뒤집어서 내게 이렇게 하려고 하는 바로 그것을 내가 예상한 결과로 결국 이렇게 하면 넌 이럴 수 밖에 없어....'라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이 짓거리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짓이다. 결국 '그냥 그렇게 말해버린 것'처럼 들리는 게 있으면, 그건 그냥, 지금 내 귀에 들리는 그대로일 뿐이다.


그러니 그냥 들리는 것만, 그대로 듣는다.



커뮤니케이션 전공자의 심리상담 결과


상담 초창기에, 상담 선생님이 내게 해준 중요한 두 가지 말이 있다.

하나는, "00씨는, '부정적인 것'에 대한 견해가 극도로 부정적이에요." 였다.

잘못되면 어떤가. 안 좋은 건 안 좋은 것이다. 좋게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을 때도 있다.

아프면 아픈 거다. 슬프면 슬픈 거다. 힘들면 힘든 거다. 그 때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부정적이라고 하여 그것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더 문제다. 그건, 극복이 아니라 회피다. 왜곡이다.


말하고 듣는 것에 이것을 적용해보니, 해야할 말은 차분하게 제대로 말하고, 들어야 할 말은 잠자코 듣는 것이 조금은 익숙해졌다.


또 다른 하나는, "00씨는, 아무도 못 빠져나올 미로를 짓는데 전문가에요. 대화가 조금만 틀어져도, 대답 못할 질문들로 미로에 빠뜨린 다음에, 미로를 점점 크게 만들어요. 누군가에게 ‘내 생각을 어디 한 번 말해봐?’란 심정으로 진심을 다해서 전하고 싶을 때, 말하고자 하는 유일한 게 있다면 바로 그걸 거에요. ‘자, 생각없이 말하는 사람아. 여기 나의 생각의 미로가 있다.’ 혼자 한꺼번에 계속 생각을 이어가서, 그 과정 전체를 그냥 상대방에게 던져요. 미로에 들어와 볼래? 그게 그러니까 니 생각엔 쉬운 해법이 있다는 거지? 그게 아니면 어쩔래? 너 지금 판단과 이해가 다 끝났다고 생각해서 나한테 가르치는 거지? 내가 미궁에 빠뜨려볼까? 그런데, 사실, 그거 전부 OO씨 머릿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실제론 그런 거 없어요. 사람들 별 생각없이 행동하고 말해요. 곱씹으면서 상처받거나 앙갚음하고 싶은 분노가 일어나는 사람은, 항상 거기에 뭔가 의도나 생각이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OO씨 같은 쪽이에요. 안 그래도 되요."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다라니... 나는 그 말을 듣고 소스라쳤다. 처음에는, 상담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마치 인류 전체에 대한 멸시라고 느껴졌다. '아니, 생각없다는 소릴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이 누가 있어?' '실제로 생각없이 말하고 행동해도, 그걸 그렇다고 하거나 그래도 된다고 하면 안되는 거 아냐?'


그런데, 내가 이상하다는 걸 처음엔 도저히 인정 못하다가, '허실'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제갈량과 조조가, 평범한 건 아니잖아. 비범하다는 말은 아니고, (그게 비범한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여태까지 나의 '생각없음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강화시켜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거지. 걔네가.


선생님이, '대부분은 OO씨처럼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아요.' '달리 말하면, 판단이 그렇게 빠르지 않아요. 판단이 빠르다는 게 칭찬은 아닌 것 같지 않아요?' 라고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판단이 빠른 게 칭찬이 아니라니...

정말, 보이고 들리는 게, 정말 저렇게 허점투성이거나 무례하거나 모자란, 그냥 있는 그대로라니...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정말 그런 거라고?


나의 저런 생각들이 문제라는 걸 진지하게 인정하는 것이 사실은 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천천히 시간을 들여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제 거절도 조금은 쉬워졌고, 칭찬도 격려도 위로도 조금은 쉬워졌다. 걱정은 줄고, 지적은 아프지 않다. 판단은 천천히 하려고 한다. 유보가 아니라. 회피가 아니라. 천천히.


더 저의가 없고 싶다. 더 저의를 모르고 싶다.

더 나아가,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주고받는 것에 있어서는, 경쟁이나 승패나 비교나 우위가 끼어들지 않기를 원한다.


자책 않기, 후회라 부를 변명 않기, 잘 맺고 잘 끊기.

처한 상황에 대해 스스로를 피해자의 위치에 놓는 태도를 가지지 않기.

각자의 각기 다른 적정거리를 이해하기.

실망도 기대도 없이, 제대로 영향받기.

무엇보다, 잘 듣기와 잘 말하기.


차라리 순진무구하면, 아님, 그냥 생각이 단순하면 계략에 걸리지 않지 않을까.

이런 발상이 현실감각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그런 무구한 애송이가 곧 발이 걸려 넘어질 것이라 말한다.

누가 발을 걸었는지조차 신경쓰지 않는 이에게 그 말이 무슨 소용인가. 넘어져도 안 아프고,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웃는 이에게, 넘어져 있는 자신에게 뻗은 누군가의 손을 잡고 겨우 일어나도 쪽팔리지 않고, 그저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이에게, 누군가는 야망도 속도 없는 덜 떨어진 인간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짐짓 진심으로 위험천만한 세상 어찌 살아나갈거냐고 혀를 찰지도 모른다.


그런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돌려말할 필요없고 저의도 없는 간단한 말이다.

걱정스럽단 말 말고, 그냥 넘어진 사람에게 손을 빌려주는 건 어떤가?

그냥 궁금해서 하는 말이다.

(비꼬고 싶은 저의를 숨길 수 없다..고 여기 적어야만 여태 내가 한 말을 지키는 게 된다. 제기랄.)


그냥, 진짜로 말하고 진짜로 들으면 좋겠다.

진정성도 아니고, 진심도 아니고, 그냥 있는 그대로.


우린 그렇게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듣는 이도 존중하고, 말하는 이도 존중하는 것 아닐까.


뭐 난 그렇게 생각한다. 우린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단순하게. 그게 자연스러워서.



만약 그렇더라도


지금, 여기에서 내가 존중과 신뢰를 보이지 못했거나, 미처 제대로 듣지 못하고 제대로 말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럼 그런 것이다. 그가 제대로 헤아려준다면 좋은 일이고, 그게 안 되어 각자의 길을 가더라도 나쁘지 않다. 돌이켜질 일은 돌이켜질 것이다. 영원불멸의 불가역적인 상태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반드시 지키려 애쓰는 것보다, 잘 듣고 잘 말하는 것이 더 낫다.


존중하며 말하고 들어도 끝내 헤아려지지 않는 타인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내가 그에게 존중받지 못할 타인일 수도 있고, 그가 내게 그런 타인일 수도 있다.


나와 그는, 지금,여기에서 서로 존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함께 있지 않아도 된다.


다른 곳, 다른 때에, 달라진 나와 그가 만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서로가 충분히 헤아리며 존중하는 사이라도 그럴 수 있다. 그럼 그런 것이다.


그러니 각자의 모든 '지금, 여기'가 중요하다. 얼마나 비우고 내줄 것인지는 우리 각자의 몫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