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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려면 제대로'의 늪 탈출

완벽주의와 실용주의 타파

by cpt

calm


명상의 효과는 '알아차림'이라는 말로 알려져 있다.

기술로써의 명상은 짧게는 3분에서 길게는 몇 시간이고 편한 자세로 앉아,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금과 나에 집중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리라. 짧은 명상 후에, 자신이 알아차린 자신에 관한 것에 대해 글로 기록해두는 것도 좋은 연습이 된다. 기술로써의 명상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일상의 삶 속에서도 명상을 통한 '알아차림'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말로 '평정심'과 비슷할까?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마음 속의 변화든, 신체의 불편감이든, 자신이 알아차릴 수 있는 모든 것,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고, 더 나아가,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의식적인 선택에 의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알아차림'의 목적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면, '화가 나서 그랬다.' 가 아니라, '화를 내기로 선택했다.' 로의 이행.

나는 전문가가 아니므로, 더 말하면 밑천이 다 드러날 게다. 이쯤에서, 명상에 대해 알고 싶은 이들에겐 책 한 두 권쯤을 권하는 것이 최선일 듯 싶다.


'일단 앉으면 (just sit)' - 수키 노보그라츠, 엘리자베스 노보그라츠 저

'당신의 삶에 명상이 필요할 때' - 앤디 퍼디컴 저


유튜브 채널이라면 나의 사심을 담아 ‘요가일상’ 채널을 소개한다.

(수년 전 내게 음식명상과 요가의 세계를 선사해주신 선생님...)

https://www.youtube.com/channel/UCvT5UM3GOV6CuWN6ydtF7tQ


뜬금없이 명상을 운운하는 이유는, 내겐 그게 정말이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 생각과 내 몸과 나라는 존재를 관찰하면서도 그것에 몰입하지는 않고 평온한 상태, 그러니까 '그저 있는 것' 말이다. 이유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의 불안을 떨쳐내지 못해서 일 것이다.


이걸 내 수준에서 바꿔 말해보자면, 내 '존재'가 '쓸 데 없을지, 쓸모 있을지'를 판단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달리 말하자면, 매 순간, 나의 유용함, 존재 이유, 유의미함 등을 지향하지 않는 것을 견딜 수 없다. 무슨 소리야, 그냥 가만히 누워서 핸드폰을 손에 쥐고 몇 시간이고 그저 빈둥대거나 시간을 죽이며 삶을 떼우는 나날이 부지기수인 게으른 중생이 그런 말을 하는 건 핑계요, 거짓말이지. 글쎄, 오히려 '무용(無用)'해질 것이 두려워 불안한 나머지 생각은 폭주하고 몸은 마비되는 상태라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공황 발작을 일으키면 심장이 곧 몸 밖으로 튀어나오리라 믿어질만큼 빨리, 세차게, 말 그대로 미친듯이 뛰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머릿 속은 꽉 들어찬다. 해소가 불가능할 정도의 감정이나 어떤 기분이 한 번에 밀려온다. 그리고, 총체적으로, '불안'에 잠식된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걷던 길에 주저앉아 가만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렇게 보이니, 정말 고요하게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라 할 것인가?


유명한 명상 앱 이름이 'calm'이라는 건 정말 절묘하게 느껴진다.

잔뜩 부푼 어떤 마음도 아니고, 끝간데 없이 침잔하는 마음도 아닌, calm.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

아이러니하게도, 어쩌면 가장 명확하고 투명하고 강한 상태.



빈 땅


집에서 호수공원으로 가는 도중에 빈 땅이 있다. 아니 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그 빈 부지의 끝에서 멀리 바라보면, 킨텍스 IC로 접어드는 자유로가 다 보일만큼 광활한 땅이, 아무 것도 지어지지 않은 채 비어 있었다. 눈에 걸리는 것이라곤 '킨텍스 이마트타운'과 '킨텍스' 뿐이었던 그 땅에, 순식간에 아파트와 오피스텔들이 들어섰다.


물건들을 비우면서, 짐 정리를 빌미로 인생을 정돈해보던 시기에, 내가 '지양'하고자 하는 속도와 스케일을 맹렬히 '지향'하는 곳이 생겨난 것이다. 나는 그곳을 지날때마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새로 생긴 '힐스테이트'와 '꿈에그린'은 잘못이 없다. 나의 속도와 눈높이에 맞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무용하거나 튕겨져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내가 선 곳에서 서울로 가려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고 합리적이고, 사실 유일한 길인 킨텍스 IC로 진입할 속도와 연료를 갖추지 못해, 자전거나 두 발로 애처롭게 골목길을 배회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유로를 진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서울로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나의 뒤쳐짐과 비겁함과 무능함을 왜곡하는 건 아닐까.


처음 상담을 받고 몇 달이 지났을 때, 나는 내 목소리가 떨리면서 얼굴이 화끈거리고 눈물이 날 것처럼 어떤 기억을 말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나 나의 과거에 관한 회한이나 슬픈 기억 등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한 것도 까먹고 있던, 오래 전 어떤 순간에 잠깐 들었던 생각이 또렷하게 기억이 난 것이다.


누군가의 소개로, 사실은 부탁을 받고, 학교의 한참 선배가 만드는 어떤 영상을 만드는 것을 돕게 되었다. 그 영상은, 그 선배와 마찬가지로 까마득한 선배들이 만든 프로덕션에서 그 선배에게 연출을 의뢰한 일이었다. 연출을 맡은 선배는 졸업 후 이런저런 다른 작업들을 하며 지내왔다. 연출은 오랜만이라고 했다. 어려울 것 없는 짧은 영상이었다. 사실 촬영과 편집이 어느 정도 능숙하다면 한 두명이 간단하게 작업해도 될 사이즈였다. 클라이언트나 출연자와 소통하는 것도 버거울 때가 있으니, 뭐 기술적인 부분을 도와주면 되겠다 싶었다.


일을 하면서, 선배가 꽤 올드스쿨이란 생각을 한 것 같다. 소규모로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기동성 높은 촬영을 하면서도 가성비 높은 장비들로 조명이나 촬영의 퀄리티를 높여야 하고 편집도 빨리 마무리하고 피드백에 따른 수정도 빨리 이뤄져야 되는 작업인데, 선배는 배우들의 연기 연출, 꽉 짜여진 콘티에 집착했다. 구색을 맞춘 풀 스텝들이 있는 것이 아닌 소규모 현장에서의 멀티플레이어로서의 역할에 대해선 조금 어려워 하는 듯 했다. 툴을 다루는 것도 서툴렀고, 여러 단계를 거치는 외부인들과의 소통에서도 내외했고,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고, 급작스런 피드백이나 요청에는 수동적이었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때의 대안에 대한 대처가 빠르지 못했다. 뭐, 그래도 그럭저럭 작업은 잘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별 탈 없이 기한 내에 그 일을 잘 마무리하게 하려고, 프로덕션의 대표인 선배는 나와 다른 친구를 그 연출을 맡은 선배에게 붙여준 것이었으니까.


그 일이 마무리되던 중에, 편집 방향이 크게 바뀌고, 또 다른 시리즈 영상에 대한 요구가 생겨 기획회의를 하게 된 날이 있었다. 할 이야기도 많고, 연출이 직접 정리하고 결정지어야 할 것들이 남았음에도, 회의를 이끌어가야할 연출이 예정된 회의 시간을 칼 같이 지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차게 내게 일임하고 선배로서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니었다. 미안함을 표하면서 소심하게, 조심스레, 자신이 잘 모르는 영역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하며, 언제 시간을 내 나와 따로 만나 자신이 부족한 것들에 대해 조언을 구하겠다면서, 그러면서도 지금 그 자리에서는 회의를 끝내고 자신의 개인적인 일이 있다며 회사를 나섰다. 다른 선배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걱정해서 물었다.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일 정도로 큰 일이 있는 거라면 무리하지 않게 하는 게 맞지 않냐고 물었다. 내심 속으론 이럴거면 왜 연출이라고 앉아있냐는 생각을 하며, 겉으론 상냥하고 싹싹한 후배답게 '그냥 제가 할게요, 다 저한테 넘겨주세요.' 라고 말한 것도 같다.


크게 기분 나쁘지도 않았고, 일이 크게 틀어지지도 않았다. 그저, 그 선배의 그 날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 수제화 공방의 수업을 듣는 일이라는 걸 들었을 때, 내가 느낀 감정, 내가 한 생각 하나가 있을 뿐이다.


몇 년이 지났어도 그 날의 일이 다시 기억나지는 않다가, 상담을 하던 중에 그 일이 생각났다. 나는, 일을 쉬면서 목공과 커피를 배우고 있었다. 짐을 버리고, 산책을 하고, 설탕액정처럼 바스라지기 쉬운 멘탈과 연약한 디스크를 부여잡고 살금살금 걷고 있었다.


상담선생님에게, 무섭게 솟아오르고 있는, 오래된 신도시 외곽의, 갓 만들어진 새 동네를 지날 때면, '사실 못 견디고 뒤쳐지고 튕겨져 나온 것을, 여유를 찾고 있다고 변명하는 것 같다.' 라고 말하면서, 그 선배가 생각났다. 그는 요즘 자신이 수제화 한 켤레에 몰두하고 있다고 했다. 곧 자신이 연출해야하는 프로모션 영상도, 스텝들과의 소통도, 새로운 장비들과 툴에 대한 관심도 아닌, 뜬금없는 수제화. 기껏, 자신이 신을 구두를 자기가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 수업을 듣고 있는데 너무 재밌더라고 말하던 그 선배를 보며, 나는 '튕겨져 나갔구나. 까마득한 선배가 저렇게 사그라들고 있구나. 후배 앞에서 쪽팔리는 게 뭔지도 모를만큼 정신이 없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상담실에 앉아, 그게 기억이 났다. 눈물이 났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텅 비어있던 땅에 아파트들이 들어서다가, 어느 날부터 자투리 땅 한 켠에 꽃들이 피었다. '킨텍스 미래용지' 라는 이름이 붙은 그 땅은, 앞으로 30년 동안 그대로 비어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 '미래용지'의 한 귀퉁이에는, 내가 이 곳에 이사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는, 콘트리트 덩어리가 하나 있다. 말 그대로, 아무 짝에 쓸모없는 콘크리트 덩어리다. 사거리의 신호등 바로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그 덩어리에는, 까만 스프레이로 누군가가 '뚱' 이라고 쓴 낙서가 적혀 있다.


나와 Y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뚜웅!' 이라고 크게 읽고 지나가곤 했다.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할 때, 우린 그 '뚱' 덩어리도 곧 사라지겠다고 농담을 했다. 그런데, 그 '뚱'도 미래용지 안에 속하게 되었다. 앞으로 30년 동안, 미래를 위한 알토란 같은 땅이 그 자리에 그대로, 예쁜 꽃밭으로 가꾸어져 잘 남아있을 거란 생각보다, 천하에 쓸모 없는, 그냥 어쩌다 거기 자리 잡은 콘트리트 덩어리, '뚱' 이 거기에 30년 동안 그대로 있을 거라는 생각이 나를 더 위로한다.


빈 말이 아니라, 그 빈 땅, 그대로 놓여진 그 '무용한' 돌이, 내가 사는 도시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다. 나는 그 곳을 지날 때마다, 내일도 그저 목적없이 거길 거닐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 기분이 든다. 앞으로 최소한 30년 동안은, '무용함에 대해 논하지 않겠다.'는 세상의 다짐을 받아 둔 기분이 든다.



무용함을 논하는 무례함

혹은 유용함을 논하는 거만함이라 해도 될까?

무용함에 대해 논할 때, 그 뜻은 대체로 이럴 것이다.

'지금 그 사람(그것)은 내게 도움이 안 돼.'

'그 사람(그것)은 너에게 도움이 안 돼.'

어떤 도움을 말하는 것일까? 주로 돈이 안 된다는 말이다. 남에게 하는 충고도, 내가 하는 판단도 그렇다.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무엇이 유용하냐를 따질 때, 지금 내 기준이 틀릴리 없다는 생각에 대해서 돌아보지 않는 것은 명백한 잘못, 무례함일 것이다.


이는 실용주의나 완벽주의의 결과다. 생각이 해석이나 설명이 아니라, 그 자체로 기능적인 도구라는 견해가 실용주의라면, 완벽주의는 이와 단짝을 이룬다. 완벽주의는, 완벽을 기하는 꼼꼼함이 아니라, 안 하니만 못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을, 애초에 하지 않음에 대한 영원한 변명이다. 완벽주의는, 그래서 행동하고 창조하는 모든 것을 비웃는다. 완벽주의의 덫에 걸리지 않는 것은 시의성 뿐이다. 시의성이란 말은 시의적절과는 다르다. 누구보다 먼저 지금 곧바로 뭔가 해버리는 것에 대해서, 완벽주의는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고심하고 성장하고 고쳐나가며 느릿느릿 나아가는 다른 것들로 고개를 돌려, 부족하고, 무용하고, '이미 늦었다.'는 판결을 내린다.


유효타격을 위한 고심 끝의 촌철살인의 140자에 꾹꾹 채워넣은 트윗이든 즉각적으로 리액션하는 휘발성 댓들이든, 혹은, 유튜브나 블로그를 하며 결국 아무 반응이 없거나 내가 의도한 결과를 도출하지 못한 것들이든, 이미 늦었거나 틀렸거나 완벽하지 않거나, '아무튼 충분히 유용하지 못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추후에 삭제된다. 프레이밍 밖의 것은 삭제되고 프레이밍 안의 의도만 남는다. 잉여는 일절 없다. 우리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우리는, 내 판단 하에 즉각 유용한 것만을 남기려 한다. 의미있고 중요하고 맞고 늦지 않은 제 때의 제대로 된 것이 되려하지만, 그러기 위한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불안해 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


나는, 그 선배는, 튕겨나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완벽하게 잘 해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곳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는 것도 아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라 자위하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자조적인 말을 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더 나아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린 괜찮다.


어떤 문제가 내 당대에 해결되지 않을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떤 문제가, 왜 나의 당대에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핑계나 변명이 아니다.

나의 당대에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면, 노력하지 않을 것인가?

그럼에도, 라고 답할 수 있다면, 어떤 성과나 상태에 있어도 괜찮다.


사실 나의 일신에 대하여서도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가지고 행동을 바꾸는 것,

그 희망이 나에 관한 것이 아닐지라도 희망하는 것,

쓸데 없어 보이는 시간이 쌓여 서서히 드러나는 변화나 결과를,

혹은 가만히, 그저 있기만 해도 된다고 생각해야만 '알아차려지는 것들'을 알아채는 것.


가만히 잠자코 앉아, 그것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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