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업의 백업. 인증과 기록 강박. 최신 정보의 늪.
2008년 여름, 교토조형예술대학이라는 곳에서 내가 다니던 학교의 학생들을 초청했다. 그쪽에서 제안한, 두 학교 간의 교류를 위한 첫 행사였다. 전공별로 총 10명의 학생들이 선발되었고, 나도 어찌저찌 그중에 들게 되어 2주 남짓한 일정을 소화하고 돌아왔다. 우리는 학교로 돌아와 한 권의 보고서를 만들어 학교에 제출했다.
지금은 불매운동에 바이러스까지 겹쳐 더욱더 멀어진 이웃나라지만, 그때 우릴 초청한 교토조형예술대학의 이사장은 우리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아니, 사실 호의적인 것을 넘어, 애초에 그가 그 학교의 캠퍼스를 지은 장소는 윤동주 시인이 일본에 있던 시절의 하숙집이라고 한다. 그가 그 부지를 사서 학교를 세운 것이다. 그는 그가 설립한 학교의 캠퍼스 안에 윤동주 시인의 시비를 세웠고, 매 해 추도회를 열었다. 그는 한일관계와 한반도의 평화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같은 과가 아니기에 우리끼리도 초면이었던 일행들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어색하게 서로 인사를 나눈 뒤 분주하게 짐을 풀었고, 그동안, 인솔 교수 두 분이 교토조형예술대학 측의 관계자와 잠시 인사를 나눈 뒤 일정표를 받아왔다. 두 분은 우리에게, 편한 차림은 좋지만 슬리퍼나 반바지 차림은 곤란하겠다고 했다. 우리를 위한 환영행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린 긴바지에 스니커즈, 단추 달린 옷을 골라 입었다.
우린 그저 학교에서 공짜로 보내준 이 곳에 도착해서, 관광을 좀 하고 학교 구경을 하고 맛있는 걸 먹고 잘 놀다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첫 행사와 그 이후의 일정이 계속되면서 생각을 완전히 고쳐먹었다. 일단, 그 학교의 모든 학생과 교수들은 우리의 이름과 전공을 알고 있었다. 몇몇 수업은 준비된 일정 기간 중에 우리와 함께 체험 수업 및 토론을 하기 위해, 한 학기 동안 자체적으로 발제를 지속해오고 있었고, 학과장, 학부장, 이사장, 그 학교 출신 예술가들도 우리와 함께 할 시간을 고대하고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귀 기울여 듣고, 많이 묻고, 머릿속에 드는 생각을 꺼내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 우리끼리조차 별로 친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 2주가 지나자 우리는 누구보다 서로 친해졌다. 모두가 같은 타이밍에 새로운 인물들과 만나고, 곧이어 각자의 생각을 거침없이 내놓았으니, 서로에 대한 내외나 선입견이나 사전 정보가 전혀 없이 시작된 관계여서 그랬으리라.
우리는 교토, 도쿄, 야마가타, 다시 교토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동을 하며 잠시 머무르는 휴게소나 식사를 하는 곳들조차 그저 멈춰 선 곳이 아니라 그곳에서의 일정이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빡빡한 2주였지만, 누구도 피곤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곳에서 만난 학생들, 교수님들, 재일교포 화가, 조각가, 유학생, 그리고 일본인들조차 쉬이 방문하기 어렵다는 장소들, 특별한 순간들, 공연, 전시, 세미나, 밤새 이어진 토론 등등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곳을 다녀오고 한동안은, 같은 과 동기들보다 이들과의 유대가 더 깊다고 느끼기도 했다. 지금은 각자의 길에서 서로 교차되기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아마 그들도 지금 나처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우린 거기서 꽤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왔다.
각설하고, 이 글이 여행기는 아니니까. 걔 중 한 순간이 있다. 수많은 순간들에 대해 쓰고 싶은 욕망이 들끓지만 집중해야 한다. 항상 모든 걸 전부 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멋진 수트를 입은 단발의 여교수님은, 현직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프로듀서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기획에 참여한 아이돌 그룹의 공연을 본 뒤, 그 아이돌들과 기획자들 등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일정이 진행되었다. 우리는 아키하바라에 도착했다. 그 아이돌 그룹은 AKB48이라는 그룹으로, 아키하바라에는 그 그룹이 1년 365일 내내 로테이션으로 공연을 하는 상설극장이 있었다. 총 48명의 멤버가 A팀, K팀, B팀으로 나뉜다던가. 메인이 되어 매체에 주로 등장하는 팀과, 연습생, 준 메인 멤버 등으로 나뉘는 듯했다. 아무튼 그 그룹의 구성원은 가장 어린 13세부터 20대 중반까지 다양했고, 공교롭게도, 그 날 공연에는 가장 어린 멤버와 가장 나이 많은 멤버가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나, 어느 한 부분에서는, 13세의 멤버가 혼자 객석의 관객들과 짧은 토크쇼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마이크 워크나 관객 호응 유도, 시선처리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 날 공연 중이던 멤버 한 명은 생일이었는데, 우린 그 사정을 몰랐지만 객석의 팬들 대부분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프레스카드를 목에 걸고 무대와 가장 가까운 1열에 멀뚱멀뚱 앉아 있던 우리를, 처음엔 다른 관객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기자도 아니고 팬도 아닌데 제일 좋은 자리에 앉은 쟤들은 뭐지? 뭐 그런 마음이었으리라. 그런데 어쩌겠나. 우린 토크쇼나 콩트, 가사의 내용을 전부 알아듣지도 못하고, 처음 보는 무대 위의 아이돌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우린 이내 다른 관객들처럼 분위기에 휩쓸렸다. 우리 중 몇몇은 여전히 적응 안 되는 분위기라 말하기도 하고, 몇몇은 응원구호를 다 외워 따라 하기도 했다. 공연 막바지에 이르렀을 땐, 우리 모두 형광봉으로 하는 단체 응원 율동마저 마스터하게 되었다.
공연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관객들과 다른 멤버들이 생일을 맞은 멤버에게 몰래카메라처럼 깜짝 이벤트를 해주었고, 돌아가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던 우리도 생일 축하 노래를 힘껏 불러주었다. (물론, 다른 수많은 팬들처럼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우리 말고 거의 모든 관객들이 울었다.)
우리 중 조금이라도 일본 아이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재미있고 새로운 경험이긴 했지만, 열광적이진 않은, 약간의 도취된 기분. 그런 기분으로 백스테이지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프로듀서들이 아이돌 업계, 그리고 원소스 멀티유즈를 도입하여 만드는 여러 콘텐츠들, 그리고 그 건물에 적용된 마케팅, 건축물 설계와 관람객 동선 등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일행 중엔 건축과도 있었고 애니메이션과도 있어 이들은 자신들의 전공과 관련된 것들에 관해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공연을 마치고 땀을 식히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아이돌들이 우리와 함께 대화하기 위해 자리에 왔다. 팬이 아니지만, 방금 본 공연의 주인공들을 가까이서 보니 절로 응원을 하게 된다. 이윽고, 각자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연습 기간이나 롤모델로 삼는 가수가 누구냐라던가, 콩트도 하던데 연기 수업도 따로 받는지 등등. 우리의 질문에, 너무도 능숙하게 마치 공연 중의 객석에 앉은 관객에게 답하듯 시선을 적당히 옮겨가며, 서로의 말이 겹칠 때는 마이크를 서로에게 넘겨주며 대답하는 그 아이돌들을 보며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이들은 청중 앞에서 스피치를 할 때의 시선처리나 적당한 호응 유도를 위한 수업을 듣는다고, 우리를 초대한 프로듀서가 설명해주었다. 뭐, 한국에도 아이돌들은 많지만, 뭔가 다른 것도 같고, 정말 어린 나이의 멤버가 너무 프로페셔널하게 공연하는 것도 봤고, 아무튼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왁자지껄 기념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난 뭔가 불편한, 아니 좀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다. 나는 사진을 결국 찍지 않았다. 같이 찍지도, 내가 그들을 찍지도 않았다. 나는 일행 중 유일하게 필름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었는데도. 대기실의 자연스러운 그들의 모습을 찍으면 정말 근사한 사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상하게, 별 말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는데, 내내 목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주어진 시간이 거의 끝날 때쯤, 결국 가장 어린 멤버에게 물었다. '아까 그렇게 열광하는 나이 많은 팬들을 보면 무섭지 않아요?' 다른 일행이, 그 질문은 좀 이상한 거 아니냐고 내게 물었다. 우릴 초대한 프로듀서가 통역을 맡은 학생에게 우리 대화의 내용을 물었다. 그리고, 뭐든 물어봐도 괜찮다고, 이상할 게 없는 질문이라며 그 멤버에게 내 질문을 다시 말해주었다.
그 멤버가 말했다. '녹화 무대가 아닌 라이브 공연이라서 가사나 음을 틀리거나 안무를 까먹거나 해서 공연을 망칠까 봐 걱정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같은 장소에서 여러 번 공연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익숙해져서, 이 곳에서 공연하는 것이 이제는 편하다. 다른 곳에서 메인 멤버로 공연할 때가 되면 긴장할까 봐 걱정이다.' 대충 이런 내용의 대답이었다. 내가 물어본 것에 대한 명확한 답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재차 물어보려고 다시 통역에게 내 질문의 의미를 다시 말해주려는데, 그 13살의 가수는 나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한테 열광하는 팬을 보는 게 무서우면 애초에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어려울 거 같아요. 저는 재밌거든요.'
우문현답.
일정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나오기 직전, 그 멤버와 눈으로 인사를 했다.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우린 악수를 나누었다. 한 수 배운 기분.
그때는 적확한 단어를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시혜적이고 편협한 시선'의 한계를 조심하라는 교훈을 얻었던 것 같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영화 팟캐스트의 패널로 꽤 오래 출연했다. '마리옹 꼬띠아르'가 주연한, 다르덴 형제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 대한 에피소드를 녹음하면서, 나는 그녀가 영화 내내 입고 나오는 브라탑 나시와 웨스턴 부츠에 관해 언급하며, 그녀의 그 패션으로 표상되는, 세상의 시선과 맞서는 여성의 주체성이니 어쩌니 운운하는 망언을 했다. 그 옷과 부츠는 그렇게까지 의미 부여할 것이랄 게 없는, 평범한 여성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복이다. 내가 그것의 의미를 발견해주어 그 당사자를 해석해주어야 할 것이 애초에 없을 사안이다. 아시아의 장남으로 태어난 남자의 눈으로, '넌 스스로 모르겠지만 내가 알려줄게.'라는 식으로 그걸 짐짓 해석해주시는 척하는 건 건방진 짓이다. 지나고 보니 똑같은 맥락의 실수를 한 것이다. 그걸 깨달았을 때, 곧바로 아키하바라에서의 그 순간이 고스란히 기억났다.
나는 그때 그 가수가 누구였는지 모른다. 이름을 들었으나 잊었다. (있어 보이려, 일부러 잊으려 한 건 아니다. 한국에 돌아와 한 동안 그 그룹의 기사를 찾아보곤 했지만, 멤버가 워낙 많기도 하거니와, TV에서 활동하는 메인 멤버 중엔 찾을 수 없었다는 게 기억난다.) 같이 찍거나 내가 찍은 사진조차 한 장 없다. 그런데, 그래서 더 이 경험이 이야기로서 완전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야기하면 할수록 그렇게 느껴진다.
2005년 여름엔, 컴퓨터와 책상, 프린터, 가죽 잠바 따위를 판 돈으로 유럽에 갔다. 첫 해외여행이었다. 애초에 유럽여행은 내가 아닌 내 친구의 계획이었다. 그 친구는 대학 졸업 전, 마지막 방학인 지금이 아니면 못 갈 거라면서도, 혼자 가긴 겁이 났던지 자기와 함께 가자며 설득했다. 루트를 자기가 짜겠다며, 가보고 싶은 곳을 말하면 계획에 넣겠다고 했다.
나는 딱 세 가지를 말했다. '에펠탑에 올라가서 담배 한 대 피고 싶다.' '바티칸 안에서 담배 한 대 피고 싶다.' '투우 축제인지 뭔지 거길 가고 싶다.' 그 친구는 황당해하며, 모나리자는? 가우디가 만든 성당은? 하다못해 콜로세움은? 등등 쉼 없이 내게 정녕 하고 싶은 것이 없냐고 물었고, 나는, '어차피 니가 다 가보고 싶어 할 테니 뭐가 문제냐'라고 되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연히 알게 될 것이었지만, 우린 여행 스타일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는 먹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고, 자신이 나오는 사진을 많이 찍고 싶어 했고, 여러 장소를 빠짐없이 빠르게 찍고 넘어가고 싶어 했고, 그에 걸맞게 아주 세부적인 계획을 세웠다. 나는 뭘 먹든 상관없고, 들르는 모든 곳에서 일단 광장 길바닥에 누워 자고, 일어나면 줄기차게 담배를 말아 피고, 술을 얻어먹었다. 나는 기차역에서 다음 행선지로 가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연착이 왜 그렇게 많은 거야.) 그냥 유레일패스를 들이밀고 눈 앞에 보이는 아무 기차에나 올라타려 했다. 결국 우린 여행 중간에 따로 헤어졌다. (피렌체에서 다시 만날 때 광장 끝에서 부터 서로를 알아보고 달려가 얼싸안고 울었..) 사진기는 필름 카메라만 가져갔다. 내 짐 중 가장 거추장스러운 것은 흑백 필름 스무 롤이었다. 두 달이니까 한 달에 10 롤. 3일에 1 롤. 하루에 10컷 남짓. ㅇㅋ. 나머지는 이래나 저래나 아무 상관이 없었다.
우린 심플하게 계산을 마쳤다. 비행기는 반년 전에 예약해서 왕복 70만원 정도로 해결했다. 여행 기간 내내 쓸 유레일패스도 결제했다. 나머지 쓸 돈은 아주 명쾌하게 단순 계산했다. 하루에 3만원! 한국에서 여관도 3만원이면 구하는데, 구린 다인용 도미토리가 그것보다 비쌀 리 없지! 매일 숙박업소에 갈 것도 아니고, 기차에서 이동하면서 자면 되지! 200만원도 안 되는 돈을 들고 비행기에 탔다.
게다가 우리에겐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여러분도 이제 익숙할 이름, 맹. 그가 파리에 있었다. 그땐 스마트폰이 없던 때다. 핸드폰으로는 문자와 통화만 되던 시대다. 맹은, 자신이 공항으로 마중을 나가겠지만, 혹시나 엇갈리면 찾아와야 할지도 모르니 자기 집 주소를 알려줬다. 하지만 맹은 우리의 도착 날짜를 헷갈렸다. 아, 맹. 내 친구 맹. 나는 맹을 좋아한다. 맹이 그런 맹이 아니게 되면 나는 맹을 뱅으로 부를 참인데 아마 그럴 일은 남은 평생 없을 것이다.
우리는 종이에 적은 집 주소를 달랑 들고, 첫 외국 경험을 시작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빌어먹을 '히퍼블릭 역'에서 내려서 '뤼 뒤피스 거리' 어딘가에 있는 녹색 현관문 3층의 그 놈의 집.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도착했지만, 1층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비가 내렸다. 공중전화로 가서 전화를 했지만 꺼져 있었다. 1층 현관문 앞에 서성이자 모두 우릴 쳐다봤다.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번갈아가며 비를 피했다. 결국 그 집을 드나들며 우릴 주시하던 영감님이 우리에게 뭐라뭐라 말을 걸었다. 우린 손짓발짓 초급영어회화를 섞어가며 아무튼 간에 저기 3층이 내 친구 맹의 집이라는 걸 전하려 노력했고, 말을 알아들었는지 귀찮았는지 모르겠지만 영감님은 문을 열어주었다. 3층 문 앞 계단에 앉아 비행기에서 읽던 책을 마저 꺼내 읽었다. (그 땐 e-book이 없었다. 나는 책을 딱 두권 들고 갔다. 열린책들, '백치 상, 하권') 비행기에서부터 읽던 상권을 거의 다 읽은 참이었다. 백치 상권을 다 읽고 한참을 더 있다보니 맹이 계단으로 올라왔다. 계단을 내려다보며 우리가 '야이 씨~ 맹~!!!' 소리치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계단에 주저 앉았다.
그는 어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영화관에서 영화도 한 편 땡기고, 거기서 새로 만나게 된 친구와 밥도 잘 먹고 오는 길이었다. 그래, 파리에서 만날 사람 다 만나고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있던 참인데, 수업 때 꺼 둔 핸드폰을 다시 켜 둘 이유가 없지.(생각해보니 꿈만 같은 삶이네.) 그리고, 우린 다같이 나의 유럽여행의 제1목표를 그 날 밤에 이루었다. 에펠탑 올라가서 담배피기. 하고 싶은 게 두 개 남았네. 두 달이 더 남았다.
남은 두 달 동안 일어난 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말해보라고 하면 보통 세가지 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남에게 잘 이야기하지 않는 기억이 하나 있다.
축구를 좋아하던 내 친구는 바르셀로나의 캄프 누 경기장을 가보고 싶어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놀랍게도 축구에 별 관심이 없던 나는 콧방귀를 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일정은 계획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린 계획한 날짜보다 훨씬 빨리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그 전에 즉흥적으로 니스에 갔던 것부터 계획에서 틀어진 것이었는데, 니스에서 바르셀로나로 왜 바로 튀어갔는지 모를 일이지만 아마 기차로 이동시간이 꽤 길어서 그 동안 자려고 그랬었던 것 같다. 니스에서 바르셀로나로 바로 안 가고 다시 파리에 들렀다가 바르셀로나로 갔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미 여행 시작 몇 주 뒤부터 우린 엉망진창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숙소도 안 구하고 도착한 바르셀로나에서, 무슨 공짜로 볼 수 있는 거대한 분수가 있다는 얘길 듣고 분수를 한참 구경하다가 누군가의 안내로 근교의 누드비치도 갔다가, 맨날 까르푸 매장에서 산 식빵과 싸구려 와인만 먹던 짓을 관두고 랍스터 따위를 한 번 먹어보자며 해산물 뷔페도 갔다가, 람브라스 거리를 싸돌아다니며 한국에서 온 여행객들과 친해지기도 했다. 아, 가우디의 유산들도 봤다. 할 건 해야지. 그 유명한, 아직 짓고 있는 '그 성당'과 까사밀라, 그리고 구엘 공원. 뭐 암튼 그런 거 용케 다 봤다. 안심하시라.
그러다 생각보다 오래 그 도시에 머물렀다. 헤나 문신을 해주는, 어디로보나 놈팽이같지만 금발의 존잘인 동네 애들이랑도 얼굴을 텄다. 구엘 공원에서 기타치는 애가 같은 도미토리에 있어서, 로마 어디선가 주운 팔찌를 주며 그의 CD와 바꿨고, 그 CD는 들고다니기 거추장스러워 결국 맹의 집에 뒀던 거 같다. 헤나 문신을 하고 싶다는 한국 여행객 두세명에게 길거리의 그 헤나 친구들을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걔들은 항상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 임시로 펼쳐 둔 낚시의자 같은데 앉아 구깃구깃한 도안을 보여주고 빨리 고르라고 했다. 도안대로 문신을 그리는 동안에도 한 명은 연신 골목 밖을 망을 보며 끊임없이 관광객들에게 담배를 얻어피는, 하여간 웃긴 놈들이었는데, 결국 사달이 났다. 가슴팍 쇄골 아래 멋들어진 나비 문양을 새기고 싶어한 한 한국 여자애에게 문신을 그려주다 말고, 어디선가 들리는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이 야매 시술자 놈들이 냅다 튀기 시작한 거다. 재빠르게 짐을 다 챙겨 곧바로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옷깃을 제쳐 가슴팍을 반쯤 드러내고 있던 여자애는 황당해하고, 우린 걔들을 찾으러 돌아다니고, 그러다가 한번도 안 들어와본 골목 구석을 싸돌아다니다가 플라멩고 공연을 하고 있는 바를 발견했다. 우린 공짜로 공연을 봤다. 문신은 어떻게 됐냐고? 다들 그냥 웃어넘긴지 오래였다.
람브라스 거리에는 행위예술을 하는 젊은 예술가들도 즐비했다. 그들은 매일 같은 자리에 같은 시간에 나왔다. 그들은 자기 짐을 자기 자리에 놓고, 옆의 누구나 까페 점원에게 짐을 봐달라고 한 뒤 골목에 들어가 안 보이는 곳에서 분장을 마치거나, 혹은 아침 일찍 나오는 경우에만 자신의 자리에서 분장을 했다.
며칠을 내키는대로 뛰놀고 아무데서나 누워 자면서, 자연히 그들과도 얼굴을 익히게 되었지만, 그들이 분장을 하고 있는 도중에 조용히 사진기를 꺼내면 어김없이 고개를 돌리고 손사래를 쳤다. 퍼포먼스 중이거나 분장이 다 된 모습은 얼마든지 찍어도 되었지만, 내가 찍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 헤나 패거리가 그렇게 도망치고 다음 날 다시 어슬렁어슬렁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마침 그 헤나 놈팽이들과 함께 수다를 떨며 분장을 하는 한 명을 발견했다. 나는 사진기는 목에 걸고 캡도 열지 않은 채로, 사진 찍을 시늉도 하지 않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헤나 패거리가 나를 알아보고, 날 보자마자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도망치는 시늉을 했다. 나는 내 가슴팍 한 쪽을 마치 헤나를 받으려는 듯 내놓으며, 어제 일을 상기시키며 웃었다. 말은 서로 한마디도 안 통하고 그냥 손짓발짓을 하며 웃었고, 나는 플라멩고 공연을 하던 골목을 가리키며 플라멩고 시늉을 냈고, 우리의 기묘한 커뮤니케이션을 지켜보던 분장하던 이도 뭐라뭐라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들 동시에 침묵하고 어색하게 입맛 다시며 작게 웃고 있을 때, 분장하던 이가 요상한 영어로 대충 말했다. '두 유 원트 픽쳐 마이 리얼 페이스?' '오브 코스, 마이 프렌드.' 그는 매일 동상처럼 서 있는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아 분장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우릴 보는 다른 이들에게도 우리가 무엇을 할지 카메라 셔터 누르는 시늉을 하며 알려주었다.
그 거리의 모든 행위 예술가를 다 찍지는 못했다. 하지만, 꽤 여러 명의 분장 전과 분장하는 모습과 분장 후의 모습을 찍었다. 흑백필름 2롤을 썼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필름을 모두 현상하고 밀착인화하고 스캔해서 CD에 보관하고 괜찮은 사진들은 따로 인화했다. 람브라스 거리에서 찍은 2롤은 어디에도 없었다. (맹에게 연락해 집을 다 뒤져서 찾아달라고도 했지만 거기에도 없었다.)
사진에 담기는 것은 뭘까.
장면, 감정, 우스꽝스러움, 즐거움, 아름다움, 정보...
무엇보다 순간. 그 시간.
그 시간을 정말 담을 수 있을까? 말장난은 그만하자. 우린 그 시간을 담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틀린 생각은 아니다. 어렴풋이, '순간이, 시간이 담긴다.'고 생각하는 만큼, 어렴풋하지만 무엇인가가 확실히 그 안에 남는다.
하지만, 그렇게 담기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해석할 필요가 있는 순간이 온다. 기억에도 희미한 순간들의 흔적들이 감당할 수 없게 잔뜩 쌓여있을 때. 각각의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하나의 정리되지 않은 덩어리 채로 굴러와 이렇게 아우성칠 때. '정리를 해라!'
어떤 광고나 문구, 연락처, 장소에 관한 정보 등을 필요에 의해 핸드폰으로 찍어 저장해두었다면, 그 정보가 필요한 일을 마치고 난 뒤 아무 고민없이 그 사진들을 지운다. 혹시나 해서 지우지 않을 때엔, 연락처에 저장을 해두고 지우거나, 따로 메모를 해두고 지우거나 하는 식의 방법을 취하기도 하고, 따로 폴더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다.
때론 마음에 드는 식사를 하기에 앞서 음식 사진을 찍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폴더에 음식 사진을 따로 보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기억할만한 날의 일들, 그 날 찍은 사진, 그 날 갔던 장소의 티켓, 그 날 있었던 일의 소회를 써놓은 글들과 함께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들(이미지, 글, 물리적인 증표들)을 모두 디지털화하여 편집한 후에 아카이빙할 수도, 그리고 걔 중 몇몇을 다시 아날로그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슬라이드 쇼를 만들거나, 영상을 만들거나, 다시 인화하거나, 다시 CD로 굽거나, 직접 종이에 인쇄한다던가.) 그렇다면 영상과 문서, 책과 CD가 또 다시 생겨난다. 어떤 때엔 그렇게 늘어난 사진이나 아날로그 문서 자체를 사진으로 찍어 다시 또 디지털로 보관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리하고 나면, 그것에 무엇이 담기는가.
사진 이외의 것에 관해서까지 논의를 넓혀가기 전에 다시 사진에 대해 해석해보면 생각을 이어가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나의 해석을 거치고 난 후라야 생각을 계속할 수 있다.
모든 것에 대해 모든 말을 할 수는 없다. 여행을 다녀온 뒤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관련 정보를 끝없는 링크로 첨부하여 영원히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린 여행을 다녀 온 후, 선택해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여행을 하는 동안, 선택해서 프레임에 담는다. 선택해서 녹음한다. 녹화한다. 혹은 마음에만 담는다. 혹은 그저 지나친다. 그러다 멈춰선다. 어떨 땐 그냥 음미한다. 메모한다. 기억한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이야기되지 않을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땐 이야기하지 않은 이의 기억에 남는다. 모든 것이 기억나진 않는다. 하지만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기억하고자 자꾸 되짚어 보는 것들이 있다. 그렇게 남은, 남긴, 기억들은 그 당사자에게 무엇인가. 나는 그게, 그가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답이 있다. '순간, 기억, 이야기'.
지금은 없어져버린, 싸이월드라는 플랫폼에 내가 만들어 두었던 사진첩의 이름이다. 순간을 기억해서 이야기되게 하는 것.
나는 이 글을, 지금은 내게 없는 사진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작했다. 사진이 없다는 아쉬움으로 시작되는 기억이, 기억할수록 선명하고 결국 이야기로 남았다. 사진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진이 없음으로 인해 없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물론, 내가 단 한장의 사진도 남기지 않고 모두 지워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는 안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오히려 언제든 사진으로 남길 수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아무 이야기도 아니게 되는 이미지들로 무엇인가를 전하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짤들이 그렇고 무심코 습관처럼 찍어서 남기는 인증샷이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접하는 입장이 되면, 우리는 그에 관한 해석을 가능한 한 최대한 간편하게 해주는 것들에게, 그 이미지들에 대한 나의 해석을 위임한다. (눈웃음, 하트, 좋아요, 이모지, 아바타, 라인 프렌즈...)
우리가 무심코 남기는 사진들로 우리가 닿고자 하는 것들은, 사실, 편집없이 계속되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평생에 걸친 브이로그 생방송과 모두가 눌러주는 '좋아요'는 아닐까. 그건 불가능하다. 바래서는 안된다는 측면이 아니라, 진지하게 그것을 가능케 하기로 마음먹고 실행하고자 하면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모든 것을 동시에 보여주는 카메라는 없다. 웃는 얼굴이 클로즈업이 되면, 그와 동시에 발가락을 까딱이며 조바심을 표현하는 당신의 일부를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풀 샷으로 그 모습을 모두 찍는다면, 그 때 당신의 얼굴의 눈 밑 경련을 보여줄 수 없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무엇을 남길 것인가. 남겨서 누구에게 전달할 것인가. 전달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혹은, 나 자신에게만 기록으로 남기고자 할 때,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가. 진정 그걸 바라는가.
인간이 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말하는 이들이 많다. 우린 그런데 망각이 불가능한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모두와 연결될 수 있는 세계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우리를 좀 더 좋은 사회의 좀 더 나은 일원으로 만들어준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방금 위 두 문단은 디지털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디지털에 관해서는 다음 글에서 따로 다룰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남기고 담을 수는 없다.에 입각하여.)
하여, 이쯤에서 나의 해석을 정리하면 이렇다. 이 글은 여행기가 아니라고 했지만, 길게 봐서 미니멀 라이프는 여행기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행 중이다. 이야기가 남는다. 이야기는 흘러가고 연결된다. 우리가 그 모든 것을 통제할 수도, 타인의 기억에 강제로 남겨둘 수도 없다. 여정은 계속되지만 여로는 계속 바뀐다. 우리는 동시에 여러 길을 걸을 수 없다. 돌아선 길에도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걷는 길에서도 이야기가 계속 생겨난다. 무엇을 남길까. 무엇을 담을까. 어디로 갈까. 그리고 그러다가도 결국 어디로 가게 될까. 미지수로 남겨두는 것, 놓친 것에 대해 인지하는 것, 그럼에도 지금 얻은 것에 대해 기억하는 것. 네비게이션을 찍고 정한 시간까지 도착해야만 하는 길에선 얻을 수 없는 것들일 것이다.
sns피드를 최상의 아웃풋들의 조합으로 완벽하게 꾸미는 것이 최적, 최단시간 경로 설정일까. 그래서 도착하고 나면 여행이 끝이 날까. 그렇게 지나와버린 순간은 어떻게 남을까. 혹은 거의 매 순간을 남긴 모든 것은 기억에 남게 될까. 그것이 나에게 무엇을 이야기해줄까.
나는 이야기를 하는 사진만 남기기로 결심했다. 그랬더니, 사실 이야기가 남는다면 사진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책상 서랍에 들어있는(그 이전엔 지갑에 들어있었으나 지갑을 가볍고 얇은 것으로 바꾼 뒤엔 서랍으로 이사 간)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Y의 사진을 제외하고서는, 언제든 없어져도 된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정보를 담은 사진들을 그 정보가 필요한 기간 동안 보관하는 것은 필수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 기억, 이야기' 가 아니다. 거기 담긴 정보일 뿐이다. 물론, '순간, 기억, 이야기'가 담긴 사진들이 있다. 그 사진이 담고 있는 기억을 이야기로 다듬기 위해 글을 쓰고 그 글에 사진을 첨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진들은 계속 지니고 있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쓴 글도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 자체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 사진을 찍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지 않는다.(이렇게 생각하는 건 쉽다.) 영원해야 한다고도 생각지 않는다.(이 말도 당연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 쉽지 않다. 이상하지 않나? 우린 무심코 영원을 바란다. 불가능한 걸 알면서.) 모든 이야기가, 남겨지고 전해지기도 하고, 때론 변하고 흔히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이해하듯이, 사진도 그런 거라고 생각해보라.
우리의 유한함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 동시에 순간을 영원에 담아놓고 싶어하는 우리의 불가해한 욕망(물론 그것이 지구 상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위대한 창작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이유일지라도!)을 한번만 접어둬보자. 우린 때론 단지 그러고 싶어서, 그것이 후대에 남겨질 것이 아니라도, 그저 어떤 감정을 나누기 위해, 전달되지 않더라도 나의 진심과 나의 진실을 전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혹은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쓰거나 말을 건네거나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표현하고 전달하고 나면, 그것이 남겨지고 전해지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순간과 기억을 거슬러 영원히 남을 이야기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접으면, 우린 창작할 수 있다. 담백하게. 자연스럽게. 그렇지 못하면 계속해서 부자연스러운 몸부림을 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말고 차분할 때에 시간을 내어 찬찬히 읽기 위해 저장해 둔 웹페이지 링크들은? 유튜브에 저장해둔 영상들, 인스타그램에 항목별로 저장해둔 레퍼런스 이미지들, 영감을 주는 트위터 계정의 글귀들, 다운받은 이미지들, 누군가의 어떤 글, 누군가의 글이 실린 책, 수업노트들, 책의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귀퉁이를 접거나 밑줄 빼곡히 치다가, 결국 자체적으로 내용을 정리해 둔 서평들은? 그러니까, 반드시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 들어있는, 언젠가는 필요할 '정보'들은?
세상의 모든 정보는 가짜가 아닌한 반드시 도움이 되지, 당연하지, 그렇고 말고. 내가 세상 모든 일에 언제든 어떤 관심을 가지게 될지, 어떻게 그 길로 접어들어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될지, 가능성은 무한하니, 언젠가 필요하게 되면 도움이 될 것이란 건 당연하지, 암, 물론이지.
뒤쳐지지 않고 분주하고 열심인 우리의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는, 광활한 네트워크의 끝없는 지식과 영감의 보고. 모든 것에 연결되고 소통하는 우리의 끝없는 관심. 그리고 마법의 단어, 자기계발! 생산성!
내가 쓰지 않은 글, 내가 찍지 않은 사진이 기억에도 없는 사이 산처럼 쌓여가는 이유.
개인적인 생각으론, ‘정보의 효용’이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 단 하나의 경우, 그러니까 이미 있는 정보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인을 제외하고는, 정보 생산과정에서 고려할 사안이 아니다. 정보의 생산과정에서 효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정보가 맞느냐 틀리냐일 것이다. 요즘 쏟아지는 정보들 중 즉각적이고 파괴적 위력을 지닌 것들 다수가, 의도적으로, 정확히 그와 반대로 작동한다. (누구보다 빠르게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가짜뉴스들.)
내가 쌓아둔 것들이 단순한 팩트가 아니라 누군가의 의견이나 통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사진이나 그림의 경우엔 팩트보다 창의적 영감을 주는 효용이 있는 것이니 맞고 틀리고를 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정보가 아니라 인풋이라고 말을 달리 해보자. 인풋의 효용은, 그것의 맞음, 탁월함, 위대함 그 자체에 있지 않다. 내가 고르고 골라 저장해 둔, 혹은 언제든 섭취하고자 하는 인풋이라면 웬만하면 틀리지 않고, 나와 생각의 결을 같이 하고, 혹은 나와는 생각이 다르지만 충분히 참고할만한 저명한 이의 의견일테고, 나의 취향의 결과로 내가 아카이빙하는 이미지(사진,그림)이라면 탁월함과 위대함은 무의미하고, 교양을 위해 접한다면 공인된 탁월함과 위대함을 내가 이해해야 하는 수순이 진행될 것이다.
그래서, 그 인풋. 언제든 접속할 수 있는, 도움이 될 것이 확실하다 여겨지는 이 인풋들에 관해서라면, 대체 이것을 왜 정리하고 버려야 한단 말인가.
싸이월드에 오늘 이 글을 쓰기 위해 참고하기에 딱 좋은, 보르헤스의 '픽션들'에 관한 나의 서평이 있다. 그 책에 수록된 단편 ‘바벨의 도서관’을 중심으로, 보르헤스가 궁극적으로 지향한 글쓰기의 한 방향이라 할 수 있는, 세계의 도서관의 진실의 책에 관한 주석을 단다는 개념에 맞게 쓴 나름의 야심작이었다. 내 글의 형식도, 가상의 글에 대한 비평과 그에 따른 가상의 참고문헌에 대한 각주와 주석의 형식을 띠게 썼다. 실로 명문이라 할 수 있는 탁월한 서평. (이제 어디서도 확인할 수 없으니 걍 그렇다고 허풍 쳐야지. 하지만 덧붙이자면, 요즘 'KBS 저널리즘 토크쇼 J'에 나오는 강유정 교수가, 우리 학교의 나름 유명한 수업, 황지우 교수의 '명작읽기'를 물려받아 강의하던 시절, 그 수업에 단 두 명 있던 영화과 학생 중 하나였던 나는 A+를 받았다. 캬캬.)
그 글 또한 싸이월드와 함께 사라져버리고 이제 찾을 수 없다. 정말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고? 난 다른 글들은 모두 레포트를 썼던 한글 파일 그대로 이미 백업해두었거든. 그리고 보르헤스 서평은, 유독 마음에 들어 싸이월드 게시판에 파일첨부를 해놓지 않고, 바로 읽을 수 있도록 글을 다 복사해서 게시글로 직접 붙여넣기를 해 두었다. 그리고 싸이월드가 완전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제일 마음에 들었던 그 글만 잃었다.
다음에 어떤 글을 쓰게 된다면 그 서평의 형식을 다시 써먹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연히 노트북 폴더 안에 그 글이 있을 거라 생각했을 땐 한 적이 없는 생각이다. 무엇이 남았는가. 이제 앞으로 나는 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이야기 하나가 남았고 앞으로의 목표가 하나 생겼다.
그리고, 내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아주 커다란 도서관의, 대출된지 수세기가 지난 책에 관한 주석일 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모든 책이 모두에게 읽혀야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찾은 것들이 있고, 누군가가 나를 찾을 것이다. 그 순간이 온다면, 기억될 수도 있고 잊혀질 수도 있다. 기억된다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야기가 전해질 수도 있고 그저 기억에 남아있다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세계와 역사라는 그 도서관을 벗어날리 없다면, 연결되지 않을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필요하다면 누군가가 사진을 찍든 메모를 하든 다시 찾든 할 것이다. 그 필요는 내 소관이 아니다.
우린 세상의 모든 양질의 정보에 언제나 연결되어 있을 필요가 전혀 없다. 지금 내가 중요하다.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린 홀로 무언가를 창조할 수 없다. 그래서 정보가 필요하다. 우리가 만들어낸 정보가 맞을수도, 틀릴수도 있다. 내게서 통찰을 얻을 수도, 반론을 할 수도 있다. 우린 그렇게 교류한다. 하지만 교류가 목적은 아니다. 교류는 창조에 기여해야 한다.
얼마 전, 파타고니아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스톤 로컬스'를 보았다. 인터뷰 중에, 요즘 내가 하는 생각들에 관해 통찰력 있는 이야기가 한 클라이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컴퓨터로 재생되는 그 다큐멘터리 화면을 실시간으로 캡쳐를 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으며, 다큐멘터리가 재생되는 컴퓨터의 화면을 핸드폰 카메라 촬영 화면으로 보고 있는 일이 발생했다. 웃기는 모습이었다. 머쓱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치우고 그냥 다큐멘터리를 끝까지 봤다.
다큐멘터리의 맥락과 유려한 화면까지 모두 다 본 뒤, 시간이 날 때 다시 아까 그 부분을 틀어 내용을 메모해두자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이내 그럴 마음이 없어졌다. 나는 차라리 그 다큐멘터리 전체에 관한 나의 감상을 따로 정리하고 싶어졌다. 며칠 후 다르게 접한 다른 책들과 다큐멘터리, 그리고 내가 '스톤 로컬스'를 보던 중에 캡쳐하고 싶어한 내용들이 다 한데 엉켜서, 내가 근래 하던 생각들을 더 구체화시켜주었다.
우리는, 가치가 생겨나는 순간에, 즉각적으로 그 시간을 봉인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쉬운 시대를 살고 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맛보려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봉인된 시간’을 추천....농담이다.) 하지만, 사실 우린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그게 감정이든, 어떤 장면의 온전함이든, 우스움이든, 스릴이든, 번뜩이는 생각이든)을 '잘 다듬어' 그것이 시간을 견디도록 만들고 싶은 마음에 그것을 '봉인'한다기보다, 하나의 욕망 때문에 두가지 목적을 지향한다.
하나의 욕망은 소통, 달리 말해 '연결되고 싶음'이고, 그에 따른 두가지 목적은 '저장'과 '피드백 요청'이다. 소통에 시간이 걸린다는 생각은 '저장'을 낳고, 그 순간이 지나면 소통이 불가해진다고 생각하여 '피드백을 요청'한다. 이 두가지 모두 하나를 불가하게 만든다. '자기만의 해석'.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전부 나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사진과 글에 대한 나의 경험에 대한 '나의 해석'이다. 해석이 필요할 때, 정보를 찾는다. 정보를 취합해 생각을 정리한 결과로 해석을 한다. 해석은 그 자체로 창조가 될 수도 있고(이 글처럼), 창조활동의 기반이 되어주기도 하고, 창조를 위한 영감을 주기도 한다.
월터 아이작슨이 쓴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전기를 보면, 다 빈치의 수많은 분야에 관한 어마어마한 호기심에 대한 일화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대포알이 어떻게 날아가는지, 어떤 무게의 대포알을 얼마만큼의 화약을 사용해서 어떻게 쏘아야 얼마나 날아갈지 등을 계산하고 싶었다. 계산이 난관에 부딪혔을 때, 그는 자기가 아는 신부에게, 대포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는 장교를 소개시켜주기를 부탁했다.
그는 또한, 언젠가 문득, 느닷없이, 스스로에게 새로운 연구과제에 대한 명령을 내렸다. '딱따구리의 혀를 묘사하라.' 그는 딱따구리의 혀에 관한 연구를 죄다 노트에 남겨놓지는 않았다. 결국은 실패한 도시계획과 수로 건설 프로젝트에 매달리느라였는지, 또 다른 호기심에 이끌려 잊어버렸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딱따구리의 혀가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그런데 다 빈치는 다른 인류사에 남은 걸작들을 다룰 때도 그런 식으로 대했다. 그의 왕성한 정보습득과 광범위한 관심 중 별 성과 없어보이는 지점이 있을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딱따구리의 혀에 관한 관찰이 언젠가는 그의 창작품이나 발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모를 일이다. 아마 그 자신은 그것이 무엇과 연결될지 말지 아무래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몇 안되는 그의 그림 중 대부분이 미완성이란 것과, 마치 절규하듯 스스로 노트에 '니가 도대체 하나라도 제대로 마무리한 일이 있으면 말해봐, 말해보란 말이야!' 라고 써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라 일컬어지는 이 인간은 주의력 결핍 장애가 확실해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그를 평가한답시고, 결국 제대로 하는 일 없이 이런저런 쓸데없는 곳에 관심만 두던 괴짜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인간의 신체를 하나의 건축물의 관점으로 보았고, 그러다가 건축에까지 관심이 옮겨갔다. 원근법과 더불어, 가까운 곳은 또렷하게, 먼 곳은 흐릿하게 경계를 흐리게 그리는 기법을 써서 놀라울만큼 입체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는 이를 위해 강가에 피어오르는 안개를 관찰했다. 물의 흐름을 관찰하다가, 인간의 몸이 자연을 모방한 소우주임과 동시에 건축물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심장의 판막의 구조에 대한 그림을 남겼다. 오로지 관찰과 추론에 따른 그 주장은, 200년 쯤 뒤에 과학적으로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때로는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왜곡되게, 일부러 원근법에 맞지 않게 그리면서까지 그림이 걸려있는 위치와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보게 될 그림의 효과를 계산했다. ('마지막 만찬'이 그렇게 그려졌다.)
그러면서 줄기차게 흐르는 물을 관찰하면서 소용돌이를 어떻게 그릴지 연구했다. 그러니까, 심심하면 노트에 소용돌이를 끄적였다. 월터 아이작슨이, 걔 중 가장 아름다운 소용돌이 그림이 보관된 박물관의 관계자에게, 다 빈치가 그 그림을 단지 일종의 실험으로써 그렸을지, 아니면 그 자체로 미적인 가치가 있는 미술작품으로 간주하고 그렸을지 물었다. 관계자는 '아마 다빈치는 그 둘을 구분하지 않았을 거에요.' 라고 답했다.
원하는 지식이 무엇인지 알고, 그 지식을 지닌 이에게 직접 묻고, 궁금한 것은 관찰하고, 동시에 여러가지 생각을 하면서, 관찰한 것을 실험하고, 실험한대로 적용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무엇인가 만들어내는 것.
흘러넘치는 물처럼, 쉼없이 흐르면서, 달리 말해 소리내고 굽이치고 표현하면서, 흐르는 물처럼 다른 물을 흡수하면서. 심지어 누가 볼거라 생각지도 않으면서도 만들어내는 것. (그에게 애걸하듯 몇 년에 걸쳐, 다른 영향력있는 모두에게 부탁하여 그로 하여금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했던, 어느 귀족의 초상화를, 그는 결국 완성하지도 못했다. 그의 사후에 그의 방에 그 그림이, 여전히 그려지는 중인 채로 놓여 있었다.)
소용돌이 그림이 실험이었을까요, 작품활동이었을까요.라는 물음.
아마 그는 그 둘을 구분하지 않았을 거에요. 라는 답.
그는 구분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도태될까봐 정보를 습득한 것이 아니라, 앞서나가기 위해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는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다.) 네트워킹을 위해 소통한 것이 아니라, 피드백을 위해 완성한 것이 아니라, 흐르듯이 계속, 배우고, 만들었으니까.
우리는 연결되고 싶어한다. 소통을 원한다.
나는, 소통이 즉시 제대로 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 '저장'한다고 했다. 이 말은, 내가 틀릴까봐 더 정보를 찾아본다는 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정답을 내가 '다 알아야' ‘누구와도’ ‘제대로' 대화할 수 있으니까.라는 생각.
소통이 즉각 일어나지 않을까봐 피드백을 요청한다는 말은, 반응을 받아야만 한다는 말로 달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지금 상호작용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생각.
정보의 저장과 네트워킹을 통한 즉각적 피드백. 이 둘 모두,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창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혼자 강가에 앉아 온 신경을 집중해 소용돌이를 바라보면서, 마음 속 한 켠으론, 강가의 나무에 딱따구리가 앉길 바라는 사람에게는, 누구도 섵불리 말을 걸지 않으리라. 하지만, 다 빈치는 세상 화려한 빨간 비단옷을 한껏 멋을 내며 걸쳐입고, 온갖 곳을 쏘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자기 궁금한 것을 물어보길 즐겼고, 자기가 만든 애들 장난 같은 것을 자길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보여주고 싶어 안달을 했다.
그는 자기가 원할 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접했다. 인터넷이 없던 때에, 우리보다 훨씬 많은 것에, 우리보다 훨씬 광대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우리보다 훨씬 많은 것을 '남겼다.' '담았다.' '느꼈다.' 그 모든 것을 연결하여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마, 다 빈치는, '지금' '여기' '나' 만 생각했을 거라고.
그는 소통과 교류 그 자체를 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소통하고자 하면 누구나와 소통했을 것이고, 기꺼이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지식과 최신정보를 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관찰하다 궁금하면 물어봤다. 해석을 위해서, 표현을 위해서, 그는 탐욕스럽게 호기심을 채웠다. 하지만, 그 호기심의 발로가, 누군가가 아는 것을 내가 모르는 것이 두려워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것이, 아직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지만 어떻게든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기에 그것을 강박적으로 접하고 저장해두고 시간이 날때마다 음미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눈을 밖으로 돌렸다. 거기엔 관찰할 것, 배울 것이 지천에 널려있었다.
얼마나 관심을 쏟느냐의 척도는 시간을 얼마나 쓰느냐일 것이다.
앤디 워홀이 말했던가? '앞으로 누구나 15분 동안 유명해지는 세상이 올 것.' 이라고. 놀랍게도, 세상은 정말 그리 되었다. 누군가의 관심이 목표인 세상. 이건 우리의 의도로 된 것이 아니다. 2008년 인스타그램과 아이폰이 있었다면, 그래서 AKB48과 함께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렸다면, 하트를 몇 개 받았을까? 내게 그 사진이 올라간 인스타 계정이 있다면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 피드를 한참 스크롤해서 보여주고 말 것이다. 새로 나와 알게 된 사람은 내 계정을 팔로우하고 좋아요를 누를 것이다. 기억은 숫자로 치환된다. 피드에 묻힌다. 인스타그램 마저 싸이월드처럼 없어질 것이다. 또 다시 우린 모든 것을 백업할 것이다.
그럼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한 것들 말고, 습관적으로 모으고 팔로우하는 정보들 말고, 내가 만들어낸, 내가 남긴, 나에 관한 기록들은 괜찮지 않을까? 아니, 그것도 계속하면 순리에 어긋나는 것을 꿈꾸게 된다. 강박이 생긴다. 나의 경우엔 기록 강박이 생겼다. 나의 시간과 경험은 유한한데, 모든 것을 영원히 박제시키고 싶어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 일기를 썼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수첩을 좋아해서(심지어 수첩 수집은 몇년전까지 계속이어져, 안 쓴 수첩들을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나서도 아직 사서 모은 수첩이 더 남았다.) 거기 그림, 낙서, 심지어 만들어지지 않을 노래의 가사, 앨범 자켓 따위를 그렸다. 점차 그날 있던 일 모두를 짧게라도 기록하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기억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면 묘사가 길어졌다. 기억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점점 늘어났다. 모든 걸 자세히 쓸 수 없으니 키워드만 적기도 해보았지만, 다시 펼쳐 읽었을 때 그 순간이 생생히 재생되지 않으므로 다시 묘사로 돌아왔다. 나는 수첩과 펜과 나의 현재를 무기로, 나의 기억과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에 덤볐다. 사실 현재의 모든 순간에 관찰자의 시점으로 계속 유체이탈을 시도하며 나의 생을 피했다는 게 맞겠다. 기록에 할애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그런 시점을 취하고 기억을 정제된 기록으로 남기려는 강박이, 어느 정도는, 지금의 내게 도움이 된 면도 있는 것 같다.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만.) 그리고 마침내, 어느 하루에, 3:3 농구를 하며 있었던 일, 스코어와 역전한 순간, 팀의 구성원, 그들과 나눈 대화 따위를 모두 적어넣다가... 모든 것을 기록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기록 또한 선택의 결과로 골라낸 것인데 그것이 아무리 자세하게 묘사된들 나머지는 어쩌려고.'
일기장에 마지막으로 쓴 문장이다.
거의 유년,청소년기를 모조리 갖다바친 그 행위를 그만두기 위한 논리를 내가 스스로 발견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마지막 일기를 그 내용으로 쓰고, 그 이후로 절대 기록을 위한 기록은 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나는 그 날 쓴 글을 그 일기장을 펼치지 않아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럼 된 것이다. 방과 후 3:3 농구를 한 것에 대한 나만 보는 보고서를 작성하다 말고 일기장을 집어던지고 다시는 쓰지 않았으니 소소한 이야깃거리이긴 하지 않나. (그 뒤로 광활하게 펼쳐진 ‘기록의 밤시간’이 남아돌아 술,담배,춤에 헌신한 게 더 안줏거리...)
사실, 우리에게 중요한 장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각인이 된다. 혹은 중요하게 여기면 각인시켜야 한다.
외우지 못하는 시를 좋아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처럼. 검색하면 나오는 결과를 내가 찾을 수 있다고 해서 내가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인'이 될 수는 없는 것처럼.
마르케스는 ‘백년의 고독’이라는 책을 써서, 정말이지 근 백년에 이르는 한 가문의 이야기를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그려냈다. 방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들의 그 역사를 엮어주는 흐름, 줄기, 그러니까 그 의미, 달리 말해 그들의 '이야기'는 사실 몇십가지 정도의 장면들로 드문드문 이어진다. 그 사이사이에 온갖 일이 있었을 것이다. 우린 알 도리가 없다. 알 필요도 없다. 우린 전해 들은 이야기로 맥락 안에 각인시킨다.
중요한 것은 골라서 남긴 이야기다. 잊혀지고 누락된 것들이, 그럼에도 기억되는 이야기를 중요하게 만든다.
덧
사진과 추억을 디지털로 보관하는 법을 많이들 추천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디지털 폴더들도 미니멀라이즈해야할 순간이 온다. '디지털로 보관'은, 내 개인적 생각으론 비우기가 아니라 임시로 잘 정리한 것으로 느껴진다. 수납장에 물건을 안보이게 깔끔하게 잘 넣어둔 것.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것. 미뤄둔 것.
이 놈의 미니멀라이프라는 것은, 미뤄둔 것, 담아둔 것, 꿈꾸던 것들을, 지금, 내가, 해치우고 해결하고 놓아보내주는 것의 반복 아닐까 싶다.
누군가와의 추억이라..그렇다면 연락하고 만나는 건 어떤가. 잊혀지면 어떡하냐고? 그럼 계속 되내이면 어떤가. 누군가에게 말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뭐 어떤가. 내 기억의 디테일이 조금 바뀌면.. 실제와 다르면 또 어떤가. 아니면 글로 남겨놓는 건 어떤가. 사후에 발견된 편지들을 엮은 작가들의 책들이 많다지만.. 뭐 그건 내 사후의 문제 아닌가.
덧2
나와 y가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있다. 팀 버튼 전시를 다녀와 생긴 농담인데, 우리가 제법 괜찮은 예술가가 되면 한가람미술관에서 우리 메모와 쪽지와 콘티와 책상 위 잡동사니와 낙서도 모아 전시를 해야하니, 우리의 그 모든 '그딴 끼적인 잡동사니'들을 도저히 버릴 수 없단 거다. 이게 농담인 이유와 같은 이유로, '디지털로 보관' 또한 어불성설이다.
잊혀지면 또 어떤가. 잃어버리면 어떤가. 하나라도 한 순간이라도 부여잡기 위해 멀티테스킹을 하고 클라우드에 연동하고 모든 것을 저장하고 킵하는 걸 언제까지 할 것인가. 킵해서 좋을 것이라곤 바카디 밖에 없..
덧3
이 글을 쓰고 문득 궁금해 2008년 일본에서 찍은 사진을 찾았는데, 폴더만 있고 안은 비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할렐루야. 몇 년동안 폴더를 열어보지도 않았단 얘기. 백업이란 게 이렇다. 인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