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땐 아무 것도 안 보여
주변 사람들이 나의 변화를 어느 정도 알아챌 정도에 이르렀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고요히 혼자 앉아 변치 않는 자신을 본다. 애장품들로 이룩한 먼지의 제국이, 강박으로 회칠한 영혼의 유치장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그 이전까지는, 누가 뭐라 생각하든(혹은, 누구도 사실 크게 신경쓰지 않는 나를 깨닫고) 자신의 문제를 즉각 눈에 보이는 변화로 교정해나가는 희열이 있는 단계라 할 수 있겠다. 행위 하나하나가 곧바로 왜곡없이 기대한 효과를 보장한다. 시작만 한다면야, 청소하고 쓰레기를 비우는 것이 개운하지 않을 이가 누가 있겠나. 필요한 물건과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분류하고, 보기 좋게 정돈하고, 필요한 이에게 무엇을 나눠주고, 내가 정말 필요로 하고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정리해보는 것, 좋은 물건을 보는 자신만의 기준과 안목을 기르는 것 등의 효과는 그리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물론, 미니멀라이프를 시작하기 전까진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었던 수위에 도달하긴 하겠지만, 막상 해보면 대단한 일들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 일련의 '비우기' 과정들은 이내 납득하기 쉬운 일들로 여겨지게 되는데, 그 작은 일들의 효과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가파른 상승곡선. 계속 이렇게만 지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모든 게 그렇듯, 일이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다. 초기의 가파른 상승곡선은, 같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도 더이상 그 기울기를 유지하지 못한다. 반드시 상승곡선이 완만해진다. 두 개의 기점이 있다. 둘 중 하나는, 자신을 괴롭히는 동시에 은근히 즐기기에 딱 좋고, 나머지 하나는 고통이 점점 커진다. 의미와 전개가 조금 다르다. 그러나 양상은 비슷하다. 둘 모두 강박적인 사고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모두 자신을 고문한다. 하나는 허들에 가깝고 다른 하나는 닫힌 문에 가깝다. 하지만 당시엔 그저 하나의 벽으로 보인다.
나의 경우엔, 공간으로 나를 고문했다. 잠드는 공간으로 허들을 넘고, 책상을 놓은 자리를 옮겨가며 닫힌 문을 응시했다.
허들과 닫힌 문으로 비유한 두 고문기술자의 이름은 이러하다.
하나는 '누가 봐도' 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것만 되면' 이다.
비우면 변하는 것이 있다. 하지만 나의 소유를 비우는 것만으로 충분치 못하다고 여길 때, 우린 비움의 체계와 우열과 정석을 찾아내려 한다. 그리고 그 가상의 '비움의 세계'의 윗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진다. 비우는 건 말 그대로 내 걸 비우는 것일 뿐인데, 비움으로 야기되는 결과를 외부로부터 그 자리에 채워넣으려 한다. 청소를 하고 그걸 보여주려 지인을 초대하는 것과 비슷하려나.
이제 누가 뭐라하든 상관없는 단계가 지나고, 누군가가 보기에 나의 무엇인가가 보이는 단계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눈에도 나 아닌 다른 이들의 무엇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때 쯤, 많은 책과 영상과 다큐멘터리를 접하게 된다. 그것들은, 초심자에게 클라이머 못잖게 가파른 상승곡선을 등반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러다가 점점 도전정신이 고취된다. 000첼린지가 눈에 띈다.( 몇 일 동안 매일 몇 개씩 물건 비우기, 물건 몇 개로 며칠 버티기, 내 옷장에 있는 옷 몇 벌 이내로 비우기 등등) 비슷비슷한 모습의 비슷비슷한 말을 하는 특정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들과 같은 부류로 안착한다.
그러다가 한 번씩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유행일 뿐이라 생각된다. 이 모든 것의 본령과 곁가지가 있다고 여겨진다. 나는 그것을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이 본질에 가까운지에 대해 말하는 각기 다른 말들을 놓고 그들과 나의 차이를 비교해본다. 편한 쪽을 취하고 불편한 쪽을 피하기도 하고, 반대로 편한 쪽을 박차고 불편함을 쫓아나서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 압도적이거나 극단적인 것은 그것이 곁가지든 본령이든 간에 '누가 봐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일테니, 바로 그것이 목표가 된다. 목표는 항상 바뀐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것은 이미 숱하게 합리화도 해보았고, 실제로도 그것이 진실의 조각이기도 하니 거칠 것이 없다. 전장을 찾아헤멘다. 평온한 마을을 찾아 쟁점의 불을 붙인다. 불을 피우고 불을 끄며 마을을 지킨다. 다른 마을로 간다. 길 위의 구도자...아니 관심없는 척하는 관종이 된다.
영화로 치면, 타르코프스키과 스필버그를 놓고 대가리 깨지게 막걸리 안주로 써먹는 영화과 학생들의 천하제일너드대회 같은 것이 시작된다. 모든 장면을 원씬원컷 롱테이크로 찍는 것과 모든 컷을 삼각대 위에 올려놓고 픽스로 찍는 것, 무빙과 픽스의 혼용의 의미, 홍상수의 패닝이 알폰소 쿠아론의 공중부양 미치광이 카메라와 비할바인지, 영원히 육즙이 흐르는 안주인 장르의 위대함 혹은 장르의 무용함 운운, what to say와 how to say의 궁합의 척도, 추상과 구상의 비율을 시사하는 자기만의 레퍼런스가 되는 인상주의를 제외한 화가는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지, 어디선가 어떻게 접한 한정판 dvd의 메이킹 필름이나 크라이테리온 컬렉션에 수록된 미공개 장면, sight & sound 잡지 원서에서 스스로 읽어 낸 남들은 모를 것이라 여겨지는 어떤 누군가의 인터뷰, 디죨브의 촌스러움과 고속촬영의 작위성, 그렇다면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그 길고 긴 느린 디죨브의 환상적 효과란 무엇인지, 고속촬영으로 피보라와 땀방울을 애무하는 샘 페킨파의 미학은 무엇인지, 그런가 하면, 영화 속 모든 음악은 네러티브 안에서 내적으로만 재생되어야 한다는 망언, 급기야 '도그마95 선언', 그리고 그 선언을 스스로 깨버린 라스 폰 트리에, 모든 컷은 그 의미를 모든 차원(미술, 세팅, 연기, 화면 사이즈, 카메라의 움직임, 조명의 움직임, 색깔, 음악, 그 음악의 발췌된 부분, 작곡가의 삶, 제작자의 혈액형, 감독의 발 사이즈, 배우의 조상의 국적.....)에서 합당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과, 모든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번개를 맞은 아티스틱한 휴먼의 브레인에서 튀겨진 팝콘의 우연한 찌꺼기의 산물이라는 입장까지... 그러니 이토록 어려운 영화라니. 수도승의 고행이거나 전쟁광의 죽음도 불사하는 각오가 아니라면 이 향연에 끼지 못하리라는 자조와 자뻑이 뒤섞인...이 모든 것을 느끼고 감내하고 고려하며 고뇌하는 나는 그러니까 천하제일... 그만하자.
이쯤되면 영화과 학생들의 술자리는 미명을 맞이하고, 그 즈음해서, 중간중간 술에 취해 졸다 깨길 반복한 결과로 그 시점에 제일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는 복학생 한명의 진지하고 천진한 물음에 모두가 입을 닫게 된다.
'그게 니 영화랑 무슨 상관인데?'
나는 오랫동안 무인양품의 침대를 쓰고 있었다. 그 브랜드의 매트리스는 세가지 종류인데, 라텍스나 메모리폼이 아니라, 모두 코일이 내장된 매트리스다. 걔 중 포켓코일을 사용한 매트리스를 사용했다. 허리디스크로 퇴원한 이후, 몸을 뒤척일 때마다 아주 약간씩 매트리스 전체가 꿀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매트리스 내부의 어딘가가 고장이 난 게 아니라 내가 더 민감해진 것이다. 나의 움직임으로 인해 생기는 허리 한 쪽과 매트리스 사이의 틈이 매꿔지지 않은 채 몸이 움직이면 흡사 그 공간을 매꾸려 내 몸이 내려앉다가 디스크가 빠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도 헉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아찔했던 순간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그 침대를 Y에게 주었다. Y는 오랫동안 쓴 이케아 침대가 있었다. 그 이케아 침대의 프레임에서 매트리스를 지탱해주는 나무 바닥부분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폐기했다. 그 나무 바닥부분은 한동안 현관 옆 빈 벽에 기대어 놓고 장식 겸 간이 가방걸이로 유용하게 사용했다. 나는 접이식 라텍스 위에 자기 시작했다. 접이식 라텍스는 미묘하게 내 몸에 맞게 굴곡이 생겼다. 접히는 부분도 은근히 거슬렸다. 며칠에 한 번씩, 뒤집어 놓거나 머리와 발 부분을 바꿔놓고 썼지만 그때마다 등과 다리에 느껴지는 굴곡이 달라 거슬렸다.
쿠션 두 개를 무릎 밑에 받쳐두고 양쪽 허리 요방형근 밑에 테니스공을 괴고 똑바로 누워잤다. 하지만 밤새 그렇게 몸을 고정하기란 불가능했다. 옆으로 누울 때 필요한 높이의 베개가 없어, 부들부들한 베개를 반으로 접어 고개를 받치고 다리 사이엔 적당한 높이의 쿠션을 끼고 잤다. 침대가 아니라 라텍스에 누워 자니 방바닥이 너무 가까웠다. 그에 맞는 높이의 좌탁이 필요했다. 낮은 접이식 테이블을 놓고 그 위에 아로마디퓨저와 알람시계를 올려두었다. 일어나자 마자 스트레칭을 하기 위해 요가매트도 옆에 펼쳐두었다. 매일 일어나면 먼지가 너무 잘 보였다. 잘 때 기침이 많아졌다. 청소를 해도 라텍스와 벽 사이에 낀 머리카락과 먼지가 보일 때면 기침이 올라오는 듯 했다.
자다가 허리가 뻣뻣해지고 종아리가 붓기 일쑤였는데, 그럼 요가매트 위에 누워 스트레칭을 한 시간 정도 했다. 마사지 볼, 벨런틱, 폼롤러 등등으로 능형근, 요방형근, 장요근(장요근 마사지는 정말이지 스스로 하는 고문이다. 자기 손으로 직접 장요근을 느낄 정도로 손가락을 펴서 다른 손으로 손등을 눌러대며 마사지를 하는 건 거의 맨정신으론 불가능하다. 그래도 아프면 그 짓을 하게 된다.), 햄스트링, 발바닥 등등을 미친듯이 조져대다 보면 몸이 축 쳐지는데, 그럼 되려 딱딱한 요가매트 위에서 꿀잠을 잔다. 물론, 자다보면 자연히 몸이 옆으로 돌고, 그럼 베개를 라텍스에서 끌어당겨오고, 무릎 사이엔 쿠션이 들어서고, 자고 일어나면 어깨가 뻐근해지기도 하지만, 잠드는 것이 목적이니까, 잠들었다 깼다는게 어딘가. 그런데 요가매트 옆엔 작은 수납장이 있는데, 그 수납장 다리의 높이가 7-8센티 정도 되어서, 그 안으로 바닥에 쌓인 먼지가 누운 내 눈높이로 똑바로 보였다. 가슴이 갑갑해졌다.
재활요가 수업이 끝나면 사바사나(전신이 이완된 상태로 쉽게 말해 대자로 뻗어 누워 있는 것)을 하고 몸을 이완시키고 호흡을 하며 쉰다. 한시간 반 정도 요가를 하고 오분에서 십분 정도 누워있다보면, 땀이 다 마르면서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선생님은 종종 사바사나를 하는 내 무릎 밑에 볼스터를 괴어주고, 내 양 팔을 위로 올렸다가 옆으로 잡아당겨 쭈욱 늘인 상태로 요가브릭 위에 팔목을 얹고, 목에 수건을 접어 받쳐주었는데, 그때마다 그 즉시 코를 골며 곯아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집에서 재현하고자 마음 먹었다. 하지만 요가학원에서 쓰는 바로 그 모양의 볼스터와 브릭은 생각보다 비쌌다. 하지만 난 다른 것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그건 그 순간의 재현이 아니니까. 그럼 돈 낭비니까. 그럼 그 고가의 요가 용품들을 똑같은 것으로 사야 하나. 대체할 수 있는게 없을까? 그러다 나만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쿠션 두개를 하나씩 무릎 뒤에 놓아도 높이가 충분치 않았다. 쿠션 두개를 가지런히 놓는다. 그리고 그 위에 내가 쓰지 않는 약간 단단한 베개를 얹는다. 그럼 얼추 높이가 비슷하다. 양팔목을 얹을 만한 높이의 뭔가가 있을까? 수건을 세번 접어 두개를 겹치면 비슷하다. 베개 대신 수건을 접어서 쓰자. 그리고, 당연히 요가 매트 위에 눕는다.
그렇게 시작된 세팅은 무인양품 푹신소파(일종의 빈백이다.)를 무릎 뒤에 괴어놓고, 네모 난 쿠션의 모서리를 요방형근 뒤에 끼워넣고 밖으로 빠져나온 쿠션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자다가 그 자세가 흐트러지면 바로 일어나 방의 불을 켜고 모든 침구를 옆으로 치우고 요가매트 위에서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수납장 아래의 먼지가 보이면 빗자루로 쓴다. 신경쓰이는 것이 많으니 결국 수납장을 큰 방으로 치운다. 큰 방으로 수납장을 치워 바닥이 훤히 보인다 한들, 붙박이 옷장에 걸린 옷들에서 나오는 먼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요가매트를 큰 방으로 옮긴다. 그건 더 문제다. 큰 방에는 책상과 의자 등 입식 가구들이 있다. 차라리 작은 방을 더 비우자.
그러다 결국 요가매트는 밤새 누워 자기엔 너무 딱딱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단기간 몸을 뉘여 통증을 완화시키기엔 딱딱한 바닥이 나은 것은 확실하다. 나처럼 허리디스크로 고생하던 또 다른 후배는, 신혼집에 들여놓을 물건 중 가장 먼저, 가장 큰 돈을 들여 세상에서 가장 좋다고 주장하는 각종 매트리스를 모조리 누워보고 걔 중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매트리스를 사서 쓰다가, 허리가 나가고는 자신도 바닥에서 잔다고 했다. 물론 요가매트보다는 두꺼운 무엇인가를 깔고서.
잠을 자는 작은 방 바닥에 놓인 물건이 접이식 작은 테이블, 스탠드, 알람시계, 그리고 요가매트와 한 켠에 접어놓은 라텍스, 쿠션 정도 밖에 없을 때, 뭔가 깨달았다. 이 방은 완벽하게 좌식이구나. 난 아직 양반다리도 힘든데. 앉아서 양말이라도 신으려면 쪼그려 앉아 허리를 구부려야 된다. 이건 위험하다. 다시 침대를 사자. 하지만 딱딱한 평상형 침대를 사자. 온돌침대? 비싸고 못생겼으니 다른 걸 사자. 미친듯이 검색을 해서 조립식 평상형 침대를 샀다. 그 위에 7cm 정도 되는 토퍼를 올렸다. 접이식일 필요는 없으니 싼 것을 샀다.
그러는 동안 물건 비우기는 계속 되었다. 내 눈에 보기에 마음에 드는 물건들만 남기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커다란 평상형 침대는 눈으로 보기에도 별로 맘에 들지 않고, 작은 방은 이제 더 이상 미니멀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 즈음에는, 어디에서 누워 자도 척추기립근을 키우지 않고 몸이 뻣뻣하면 모든 것이 허사라는 것을 이미 충분히 잘 알게 되었다. 스트레칭을 더 하자. 더 걷자. 그런데 이상한 데서 문제가 생긴다. 내가 누워 자는 곳이 도무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내 머리는, 그 유명한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와 '나는 습관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의 저자, '나는 00하기로 했다'의 원조, 바로 그 '사사키 후미오' 씨의 방을 기억해낸다. 그가 출연한 다큐멘터리에서 그의 집을 보고 받은 충격이 생생했다. 물론 그의 책을 읽은 후였으나, 직접 눈으로 본 그의 집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집의 모든 물건을 꺼내서 담는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가구는 A4용지 크기에 높이가 20cm정도 되는 나무함이 전부였다. 그는 그 위에 그릇을 놓고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그의 침구는 '에어리 매트리스'라는 것으로, 3단으로 접히는 매트리스지만 접히는 부분이 전혀 굴곡이 없고, 무게도 가볍다. 에어리 매트리스라는 이름 그대로, 내장재는 마치 수세미처럼 수많은 구멍이 뚫려있어, 95퍼센트는 공기라는 말이 정말이지 싶다. 세척도 용이하고, 여름철에는 그 소재의 특성 때문에 시원하기까지 하다. 2단을 접고 1단을 벽에 기대면 좌식 소파로 쓸 수도 있다. 한국에선 정식 수입하지 않아 아마존 재팬 직구를 해야한다. 어떤 곳에서는 그 매트리스의 4면을 둘러싸는 프레임을 팔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커버와 그에 맞는 토퍼를 팔기도 한다. 하지만, 사사키 씨는 그저 그 매트리스를 펼쳐서 침대로 쓰고 접어서 소파로 쓸 뿐이었다. 아무튼간에 나는 그 매트리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영감'을 주는 사람은 사사키 씨 뿐만이 아니었다. 일일히 밝힐 수 없을만큼 수많은, 내가 팔로우하는, 국적을 망라하는 수많은 미니멀라이프를 시전하는 유튜버들, 블로거, 작가들에게서 각각의 궁극의 레시피를 발견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캐리어와 백팩 하나에 자신의 모든 짐을 싣고 세계를 유랑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상당수의, 꿈에 그릴 법한 거의 완벽한 원룸에 사는 이들이 그 방을 이상적으로 유지시키는 해법은, 낮시간 동안에는 벽장 안에 세워서 넣을 수 있는 침대다. 회색 면티셔츠를 입고, 드립커피를 내려마시고, 갈색 가죽 소파에 앉아 맥북 프로 스페이스 그레이 모델을 열어놓고 모닝저널을 쓰는 수많은 현자들과 그들의 거실과 침실. 내게 뭐가 필요한가. 난 뭘 지향하고 있는가.
그들에 비하면, 나는 여전히 아수라장에 살고 있는 디스크 환자일 뿐이라 여겨졌다. 나는 기껏 쓸데없는 잡동사니를 좀 줄이고, 고만고만한 정리정돈으로 위안삼는 수준이었다. 그러면서 무슨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양, 자랑스레 신선놀음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뭐 기껏해야 내가 느낀 것들에 대해 가까운 이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심스레 하기 시작한 정도였지만, 한 편으로는, 내가 접하고 겪은 변화를 전혀 모르는 이들의 공간에 들어서면, 내색은 하지 않더라도 조금씩 불편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면서 속으로 '왜 저걸 저런 상태로 두지?' '이들의 생활은 뭐가 문제일까?' 따위의 건방진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소위 나보다 더 '미니멀'한, 그러니까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삶을 보며 나의 '보이는 것'들에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북아메리카를 발칵 되집어놓은 '곤도 마리에'씨의 '설레이지 않으면 버려라.'의 사례들은, 마치 옥타곤에 들어선 나 같은 프로파이터의 눈엔, 아마추어에게 장난처럼 호신술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한 것도 같다. 그러면서 속으론 나도 아마추어라고 느꼈다. 그러다 오기가 생겨 비교우위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걸까? 그런데 웃긴 건, 그러면서 결국은 또 다른 누군가의 무엇인가를 똑같이 따라하면 그 비교우위라는 위치에 서게 될 거라 생각한 게다. 그만큼 정신이 없었다.
결국 에어리매트리스를 사기 위해서 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멀쩡했던 평상침대를 갖다버렸다. 그 때쯤 TV도 버렸다. 많이 버렸다. 상징적인 사례로, 멀쩡한 칫솔을 버리고 재생 플라스틱인지 뭔지로 만든 칫솔을 새로 샀다. 모든 좌식테이블을 버렸다. 차라리 작은 상자를 바닥에 두고, 그 안에 수납할 것, 그 위에 올려둘 것을 제외하고는 작은 방의 모든 물건을 버리자고 생각했다. 스티브 잡스의 전기에 나온 잡스의 거실 이미지도 떠올랐다. 덩그러니 놓인 고르고 고른 가구 몇 개와 바닥 뿐인 그 거실. 사실은 굉장히 럭셔리하고 넓은 공간이라 극도로 미니멀해보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공간 이미지들에 등장하는, 입이 떡 벌어지는 명품 가구들을 내가 도저히 살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더 극단으로 치달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LC2 의자 하나에 빈티지 아르떼미데 스탠드 조명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서재가 따로 마련된 집이라면, 결코 맥시멀하거나 복잡해 보일리가 없겠지. 우습게도 미니멀리즘을 실현한다고 하면서부터 인테리어 레퍼런스를 더 모으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좋은 물건으로...라는 말은 점점 남 보기에도 그럴싸한 답을 찾길 원한다. 왜냐하면, 내가 선택한 미니멀라이프라는 것이 '도망쳐 도착한 착각 속의 낙원'으로 보이는 것은 원치 않으니까. 말이 되는 소린지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그럴듯 하게 텅 비워져야 한다.' 이 말은, 적당히 비워두고 곳곳에(무심하게, 하지만 느낌있게) 뭔가를 또 채워넣어야 한다는 소리다. 에어리 매트리스라면 그럴듯 하다. 궁극의 미니멀리스트에 가장 가까운, 가장 유명한 미니멀리스트의 '정답'이니까. (정작 사사키 씨는 그냥 적당한 걸 골라 산 것일텐데.)
이제, 아마추어지만 프로로 보이고 싶은 체육관 관원은 뛰어넘을 허들을 앞에 두고 넘기 시작한다. 저건 불가능, 이건 어느 정도 가능, 그러니 저걸 넘은 다음엔 저 허들로. 나의 지금과는 전혀 상관없이, 내 공간이 보여지길 바란다. 의도한대로 보여지는 것만 남이 보길 원한다.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
다행히, 평상침대를 버리기로 한 바로 그 순간, '누가 봐도' 라는 허들을 놓고 뛰어넘는 자위를 단번에 관두게 되었다. 그 평상침대를 고른 이유 중에는, 프레임이 다리로 지탱이 되는 것이 아니라 판자 형식으로 사방이 막힌 형태라는 것이 한 몫 했다. 침대 아래 나뒹구는 먼지가 없을 것이고,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잠자리가 훨씬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다.
실제로는, 침대를 해체하자 그 안에 이미 서로 엉겨붙어 덩치가 커진 먼지들이 가득했다. 아마 침대 프레임 사이와 매트리스를 지탱하는 바닥면의 틈 따위로, 침구와 매트리스에서 발생된 먼지가 들어가서, 도리어 나올 구멍이 없으니 그 안에 차곡차곡 쌓인 것이리라. 상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먼지가 쌓여 있었다. 아, 익숙한 이 느낌. '안 보이니 마음 편한, 덮어둔 먼지.'
작은 나무상자 이외에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바닥이 모두 드러나 있는 '사사키 후미오' 씨의 방이 떠올랐다. 그가 그 방을 그렇게 유지하고자 하는 이유를 그는 정확하게 말한 적 있다. '언제든 집 전체를 쓸고 닦을 수 있거든요.'
소 뒷걸음으로 쥐를 잡은 격이지만, 나는 정신을 차렸다. 당장 평상침대를 버렸다. 그 위에 얹어진, 그냥 아무데서나 적당한 가격에 산 적당한 높이의, 접히지도 않는 토퍼를 바닥에 깔고 자기 시작했다. 조금 가볍고 3단으로 접히기만 하면 참 좋겠단 생각을 하다가, 청소를 하며 3단으로 접어보았는데, 오히려 어느 정도 무게가 있어 3단으로 접어놓으니 그 모양을 그대로 유지했다. 응? 내가 원하던 게, 가장 아무 생각없이 산 이 물건으로 충족이 되잖아?
버릴까말까 몇 번을 고민하다 다용도실에 쳐박아 둔, 산지 10년 된 스탠드를 다시 꺼냈다. 심플하고 비싸고 예쁜 스탠드를 놔두고, 결국 내가 이 못생긴 낡은 스탠드를 꺼내 침대 머리맡에 둔 이유는 명확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이 물건을 아직 버리지 않았음을 알고 스스로에게 고마워했다. 이 스탠드의 스위치는 달깍 소리가 나도록 누를 필요없이 툭 갖다대기만 하면 켜지고 꺼지는 방식이다. 나는 그게 얼마나 편한지 이미 10년 동안 충분히 고찰해왔다.
지금 내 침실은 전혀 아름답지도 세련되지도 않았다. 다만 그냥 내 눈에 편한 침구, 내 손에 편한 스탠드가 놓여있다. 쿠션 두개와 빈백이 언제나 토퍼 위에 가득 놓여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내 누운 몸을 어떻게 떠받치고 고정시킬지 나만 알면 된다. 남 보기에 어떨지, 남이 하는대로 따라하면 어떨지 생각할 필요없다. 나는 앞으로도 작은 나무상자 위에 티세트를 올려놓고 양반다리로 앉아 텅 빈 방에서 명상하듯 차를 마실 일이 없을 것이다. 텅 빈 방이 싫거나, 명상이 싫어서는 아니다. 장시간 양반다리로 앉는 것이 싫을 뿐이다. 차라리 복대를 차고 책상에 의자를 바싹 끌어당겨 앉아 있는 것이 내겐 좋다.
미니멀한 것이 목적이 되면, 결국 알카트라즈의 독방 같은 곳에 갇히게 되길 원하게 될 뿐이다. 그보다 미니멀할 순 없잖아. 나는 그냥 심란하지 않게 잘 잠드는 걸 원했을 뿐이다. 그리고 다소 중구난방인 내 침구와 스탠드가 그걸 보장해준다. 완벽한 침구세트가 뭘까? 절대적인 잠은 무엇으로 찾을 수 있을까? 먼지없는 방에서 아프지 않은 몸으로 어두운 밤에 자면 된다.
보여지는 것보다 안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지금' '여기' '나' 는 남에게 안 보인다. 그것들이 가장 중요하다.
게다가, 잠자는 공간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리저리 아무리 짱구를 굴려봤자 허망한 소리란 생각이 든다. 내가 눈감고 자는데, 세상이 뭐가 대수야. 아무 것도 안 보여.
잠자는 공간은 잠이 잘 오면 된다.
과정이 의미하는 것과 목적이 그대로 연결되는 것이 관건이다. 이건 허들말고 닫힌 문을 대할 때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