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따질 필요 없는.
'옷이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볼 것이다. 특히 한국에선, 문자 그대로 사람을 옷으로 표현 가능하다고 진지하게 덧붙이면, 그 즉시 행색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스캔을 하겠지. 끄덕이며 수긍하는 사람도 있고 이유를 묻는 사람도 있으리라. 썰렁한 농담임을 알리기 위해 재빨리 빈 종이에 펜으로 '옷'이라고 쓴다.
옷
어릴 때 사람을 그리라고 하면 귀찮은 듯 손을 대충 놀려 '옷'이라고 쓰는 거... 나만 해봤나? 그걸 보고 이렇게 말하는 또래 친구들도 꼭 있었다. '그게 어떻게 사람이야?'
사춘기를 지나면서, 혹은 그보다 더 일찍, '옷이 사람이다.' 까진 아니더라도, 그리고 '옷이 날개다.'를 백프로 수긍하진 않더라도, '옷이 후지면 삶이 후지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후지게 보이지 않으려면 옷을 잘 입어야 한다.' 쯤의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덤으로 부모와 어른들의 펀치라인. '멀쩡한 사람답게 입어라.'
결국 옷이 사람인 게다. '멀쩡한 사람' 대신 '개성있게' 를 주장해도 마찬가지다. 나와 나의 옷은 연결되어 있다. 그걸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의심할 여지도, 이유도 없다. 옷 대신 다른 단어를 넣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무엇을 먹는지가 그 사람을 말해준다.' 거나, 그 사람의 말이 그 사람을 설명해준다는 식의 얘기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학술논문의 결론처럼 너무 맞는 말이라 달리 할 말이 없는 말들. 이럴 때 중요한 건 디테일이다. 저 단순한 명제들에 관한 자기만의 디테일을 다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리라. 미니멀리즘이라는 것도 사실은 그냥 그 일인 게다.
'옷이 사람이다. 먹는 것이 사람이다. 지닌 것이 사람이다. 내 물건이 나다. 내가 지닌 것이 나다. 사람은 이러하다. 나는 이러하다. 내겐 무엇이 필요치 않다. 나는 무엇을 필요로 한다. 나는 이게 싫다, 저게 좋다. 나는 무엇이다. 무엇은 무엇이다. 누구에게? 나에게. 어떻게? 이러저러하게.'
활짝 열어제낀 옷장 앞에 서서 그런 생각들을 한다. 여유가 넘쳐서? 시간이 남아돌아서? 할 짓이 없어서? 아니다. 여유를 내서, 시간을 들여서, 해야할 생각이라서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에게, 네가 어떻게 나를 만드는지, 네가 어떻게 나인지 묻는다. 나는 무엇인지를 답해보려는 시도다. 홀로 암자에 앉아 도를 닦는 것은 어려우니, 눈 앞에 놓인 내 것들에 기대 단서를 찾아보는 것이다.
내 몸에 걸친 것들이 '적재적소'일 것인가, '자기표현'일 것인가.
마치 헬스계의 영원한 화두, '자극이냐, 중량이냐?' 와 비견될 만하다. 가치를 두는 기준을 적용해서 달리 표현해보자면, '남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자.' 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 되자.' 정도의 입장 차일까. '남에게' 가 아니라 '나에게' 방점을 찍으면, '주목을 받는 재미냐, 쓸데없는 시선을 받지 않는 편안함이냐'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남'을 배제한 개념이 되진 못한다.
온전히 '나'만을 기준삼아 다시 생각해보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몸에 편한가, 편하지 않은가.' 넉넉한 핏이나 부드러운 소재를 말해야만 할 것 같은 이 기준에 입각해서도, 여전히 딴 소릴 할 수 있다. 너무 무던하면 외출에 나서는 내 마음이 불편하다거나, 남이 보기에 무던한 것을 걸치고 있을 때야만 내 마음이 편하다는 식으로, 또 다시 '남'이 개입되는 이야길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건 상황이나 성격에 따라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개인 안에서도, 어떨 때는 '내가 편하면 장땡'이 적용되고, 또 어떨 땐 '남이 보기에 편해보여야 제대로 된 것' 이 적용된다.
클래식한 착장에 한두가지 위트를 더해 포인트를 줄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네이비 블레이져 아래 밀리터리 팬츠를 매칭하는 것이나, 니트 타이를 맨 셔츠 위에 오렌지색 패딩조끼를 입는 것도, '그 쪽 세계의 클래식'이 될 수 있다. 슈퍼히어로 업계를 예로 들자면, 그 쪽 세계에선 파란 타이즈 위에 빨간 삼각팬티를 겹쳐 입는 것이 클래식이다.
또 다른 산맥들도 있다. 기능인가, 모양인가.
이 말에는 사실 잘 먹히는 답이 있다. 디자인의 탁월함에 관해서라면, 'simplicity'를 이길만한 단어가 드물다. 기능에 집중한 결과로 도출된, 적확한 소재와 단순한 모양의 위대함. 이 기준을 옷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m65 야상이나 a2 항공자켓 같은, 만들어진지 수십년 되는 군복들이 아직도 인기를 끌며, 그 디자인의 수많은 변주가 각종 브랜드에서 제작되는 거 아니겠냐는 주장 또한 설득력 있다.
그런 이유로, 기능에 충실한, 에센스만 남은 심플한 디자인이 결국 갑이라고? 글쎄? 요샌 다시 아이폰 유선 번들 이어폰이 유행한다던데, 그건 뭐에 충실한 거지? 어글리 슈즈는 아무래도 단순하게 생긴 모양으로 보이진 않는데. 호카 오네오네의 트레킹화가 자랑하는 놀랍도록 편안한 쿠션감을 위해선, 모양을 단순히 만드는 것 자체가 힘들지 않을까? 부슬비가 내리는 날엔 고어텍스를 입을 것인가, 왁스드 자켓을 입을 것인가. 왁스드 자켓은 당대의 신기술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방수가 아니라 폼으로 입는 무거운 옷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당한가. 등등.
이게 다 무슨 말일까. 모든 덕질의 금과옥조 쓰리콤보, '아는만큼 보인다'와 '알면 알수록 어렵다.'와 '그래서 파면 팔수록 재밌다.'를 설파하기 위한 썰인가. 그럴리가.
동네친구 S는, 의류 쇼핑의 귀공자라 칭할만 했다. 두 가지 예로 충분할 것이다. 카키색 코트와 흰 셔츠. 각각의 옷마다 2주가 소요되었다. 배송에 걸린 시간이 아니다. 그 땐 인터넷 쇼핑이란 것이 없었다. 직수입 편집샵도, 아울렛도 없었다. 시내 한 가운데 백화점과 옷가게들이 모여있고, 몇몇 동네에 패션골목이라 불리는 곳들이 있고, 우리 동네의 우리만 아는 신실한 거래처인 '보세 옷집'들이 있었다. 섬유산업이 발달했다는 대구는 패션도시를 표방하며 한국의 밀라노가 되고자 야망을 품는 중이었다.
기이하게도 전국에서 유일하게 대구에서만 유행하는 몇몇 아이템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treval fox'라는 이탈리아 직수입 가죽 스니커즈였다. 그 당시 10만원이 넘던 그 신발을, 대구의 중고딩 절반은 족히 넘게 신었다. 수학여행을 가면 신발만 봐도 대구에서 온 놈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주변에 탐문해도 좋다. 진짜라니까. 나머지 절반 중 20프로 정도는 케이스위스 운동화를 신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이상하다. 왜 죄다 그걸 신었지?) 그러나, 그 광란의 대유행 속에서도 나와 S는 그 신발을 신지 않았다. 나는 5cm짜리 굽의 앵클부츠를, 그 친구는 스웨이드 몽크 슈즈를 신었다. 그냥 딱 그 정도의 까탈.
내 앵클부츠는, 아버지가 어디선가 선물받곤 하던 구두 상품권으로 고교 입학과 동시에 어머니가 사주신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나의 중학교 입학 때부터 줄곧 한목소리로 '교복에는 구두다.'를 주장했다. '기지바지'에 운동화는 꼴보기 싫다는 심사평이 곁들여졌다. 매년 발 사이즈가 변하는 바람에, 연초엔 상품권으로 구두를 사는 연례행사가 시행되었다. 그걸 신고 오징어게임도 하고 얼음땡도 하고 땅따먹기도 하고 심지어 농구도 하고, 뜀박질도 하고, 담도 타고, 그러다보면 구두 표면이 이내 다 벗겨지고 넝마가 됐다. 맨살처럼 벗겨진 구두에 아버지의 구두약을 바르고 헤진 메리야스 조각으로 신나게 문질러 대는 것이 일상이었다. (군대에서 구두 물광 하나는 기가 막히게 내기 위한 조기교육이 된 셈이다.) 1년을 무사히 버티는 구두가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 서랍 안의 구두 상품권은 많았고, 아버지는 구두를 신고 운동장을 뛰어다닐 일이 없으니, 어머니와 내게 구두를 사러 가는 것이라면 꽤나 익숙한 일이었다. 뭐, 그렇다고 버클 달린 앵클부츠를 사서 신으라는 뜻은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이쁘다.' 며 매장에서 내가 그 앵클부츠의 텍만 떼고 바로 신고 나가게 했다.
그 뿐인가? 나는 겨울엔 으레 롱코트를 입었는데 이 또한 어머니의 픽이었다. 피코트도 아니고 롱코트. 나는 나이에 맞게 두툼하고 귀여운 더플코트(그건 모자도 달렸잖아!)를 그토록 바랬으나, 내 유일한 겨울 코트는 마치 프로레슬러 언더테이커의 의상처럼 보이는, 목 카라에 까만 털을 탈부착할 수 있는,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새까만 모직 롱코트였다. 짙은 갈색의 목도리도 함께 살테니 깎아달라는 어머니의 말에 가게 주인은 난감해 했지만, 어머니는 내게 그 코트와 목도리를 입어보라더니, 자기가 계산하는 동안 마침 파란불로 바뀐 신호등을 건널 것을 명했다. (가게 주인에게 돈을 쥐어주고 곧장 당신도 따라 건너셨는데, 내 기억에 한 4만원 정도 깎은 거 같...) 목도리의 끝은 검은 실들이 술처럼 늘어뜨려진 디자인에, 금색 자수로 베르사체 비슷한 문양이 수놓여 있었는데, 어머니는 내가 목도리를 맬 때마다 코트의 V존으로 그 문양이 나오게 매라고 강권했다. 그게 포인트니까.
그때만 해도, 아무리 추워도 학생들은 교복 위에 오리털 파카같은 걸 입지 않았는데, 대구가 그렇게까지 춥지 않아서이기도 했을 것이고 구스나 덕다운 파카가 흔치 않아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차라리 가디건이나 스웨터, 그리고 목도리를 하고 장갑을 꼈다. 몇몇은 가죽자켓을 겹쳐입기도 했는데, 교문 앞에선 항상 그걸 잡아내기에, 교문이 보이기 전 골목에서 가방에 겉옷을 구겨넣는 것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선도부 선생님이나 학생주임이 가끔 기력이 넘치면 빵빵한 가방을 불시에 열어서 검사를 하기도 했는데, 아니 안 보이게 잘 쑤셔박아뒀으면 그냥 넘어가면 안되나, 겉옷이 무슨 담배도 아니고.
난 아버지가 대리 진급을 했을 때인가 아무튼 한 옛날에 샀다는, 시보리가 여전히 짱짱한 갈색 스웨이드 봄버를 입었는데, 그 자켓은 앵클부츠와 함께 내 등교를 고행으로 이끌 것이 자명했다. 어머니는 등교시 스웨이드 봄버 착용 정책은 철회했으나, 앵클부츠 착용은 여전히 견지하고자 했다. 학칙 위반이라는 나의 말에 당신은, 그 부분은 스스로 알아서 극복해보라고 동기부여를 시도했다. 입학 첫 달 내내 교문에서 교실까지 오리걸음으로 등교했고, 신발이 이것 밖에 없다고 항변도 해보다가 빠따도 줄창 맞았다. 결국 신발을 압수하겠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그렇게 되면 어머니가 그 '이쁜' 구두를 직접 되찾으러 올 것이라고 말했다. 놀랍게도, 담임은 포기했다. 나는 운동화를 살 기회를 잃었다.
다른 옷들에 관해서는 S만큼의 큰 관심이 없었다. 계절에 따라 필요한 아이템을 잊지 않고 사용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거나 (여름엔 손수건, 겨울엔 목도리와 장갑), 라운드넥의 티셔츠나 스웨터를 싫어해서, 단추가 달린 셔츠나 브이넥 티셔츠, 곧 죽어도 목폴라, 터틀넥만 입었단 것 정도? 까끌까끌한, 정전기가 이는 굵은 실로 짜여진 니트는 두드러기가 나서 절대 입지 않았는데, 그럼 결국 얇고 가볍고 부드러운 재질의 목폴라티나 터틀넥을 찾다보면 '로엠'이나 '에스쁘리' 같은 여자옷들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님 뭐, 그저, 왜 남자 셔츠엔 허리 라인이 잡힌 게 없냐고 간혹 어머니에게 묻고, 어머니의 실크셔츠 중 맘에 드는 것은 주말에 입곤 했을 뿐이다.(나만 그랬어?..) 사실 입은 사람이 굳이 말하지 않는다면, 남녀의 셔츠의 차이는, 입을 때나 조금 어색하고 마는, 단추가 달린 위치 뿐이다. (난 이게 왜 남녀의 옷에 따라 다른지 아직도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
아무튼, 세상 모든 옷에 나보다 훨씬 더 관심이 많고 까다로운 S와, 위에 적은 정도만큼만 적당히 골라입는 내가, 몇 주에 걸쳐 옷 하나를 찾아 해메고 있었다. 방학이었다. 우린 매일 정해진 시간에 시내로 나갔다. '신전'이라 불리는, 거대한 발코니를 자랑하는 '신일전문대학교' 도서관 열람실에 가방을 던져놓고, 라디오를 듣든 천제수학을 풀든 무협지를 읽든 하다가, 배가 고프면 도서관을 나섰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맛'과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맛' 두가지로 나뉘는, 1인당 1리터짜리 쿨피스를 옆에 두고 먹어야하는 떡볶이를 한 접시씩 해치우고 나면, 대구의 모든 매장을 다 돌았다. 버스값은 그 친구가 댔고, 가끔은 밥도 샀다.
아직도 정확히 기억한다. 우린 사실 보편적 세상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옷을 찾고 있었는데, 이 자식은 결국 그 옷을 찾아냈다. 각기 다른 옷에서 추출한 디테일들을 조합해 그 녀석이 만든 궁극의 코트는 다음과 같다.
짙은 카키색의 모직 코트.
그런데 뒤트임은 두개일 것.
싱글버튼에 허리끈도 있을 것.
주머니에 덮개가 없을 것. 주머니 입구가 수평이 아니라 사선으로 되어 있을 것.
카라는 체스터필드 코트와 비슷하지만, 위쪽 카라는 접힌 채로 직각으로 서 있고, 동시에 아래쪽 라펠도 존재할 것.
(그러니까, 어디로 보나 클래식과는 거리가 먼 괴랄한 디자인이지만, 그렇다고 얼토당토하지 않은 옷은 아니되, 부분부분마다 희한한 지점이 있는, 얼핏 갱장히 트랜디해 보이지만 과하지 않고, 동시에 너무 싸보이지 않는 최신 보세 옷.)
대백, 대백프라자, 동아쇼핑, 보세골목, 경대 앞, 영대 앞, 동네 보세집 등등을 다 뒤졌다. 갔던 곳을 또 가기도 하고, 그런 옷이 들어오면 말해달라고 했다. 1주일이 지나자, 놀랍게도 짙은 회색에 카라만 검은 색이란 것을 빼면 나머지를 모두 충족시키는 옷을 찾았다. 하지만 그 녀석은 사지 않았다. 우린 사실 조금 고민했다. 하지만 그 녀석은 카키색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그제야 말했다. (아마 그 코트가 카키색에 다른 게 달랐다면, 바로 그 다른 점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을게다.) 다시, 카키색을 최우선으로 놓고 옷가게를 뒤졌다. 하지만 만족할만한 코트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동네 단골 보세집에 그런 옷이 들어왔다. 나는 한동안 그 가게 주인 아주머니가 그 옷을 직접 만들지는 않았을까 의심했다.
흰 셔츠는? 그건 조금 더 간단했다. 와이셔츠처럼 빳빳한 카라에 주머니가 없을 것. 가슴을 가로지르는 절개라인과 그 가로줄을 손톱만한 두께 정도로 한 겹 더 덧댄 디테일이 있을 것. 단추가 노출되지 않게, 채우고 나면 그 위로 덮여지게 된 모양일 것. 도대체 이 자식은 어디서 그런 레퍼런스들을 찾아내는 것일까. 그 셔츠도 결국 존재했다.
정확한 밑그림. 그런 옷이 있을때까지 발품을 팔기. 이건 쇼핑의 중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S와 나는 심심하면 옷을 구경하러 다니며 궁극의 옷에 대해 떠들기를 즐겼다. (아마 동대문이나 동묘나 부산 깡통시장의 존재를 알았다면 파산을 하지 않았을까. 아님 사입삼촌이 되었을까.) 지금도 나는, 누구와 어떤 옷을 사러 같이 따라나서도 지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 (발바닥이 아프지만 않다면, 의자에 잠깐 앉아 쉬고 다시 걸을 상태가 되기만 한다면,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 있다.) 마음이 뺏긴 옷의 구입을 단념시킬 자신도, 무심코 손에 든 옷을 곧바로 사게 만들 자신도 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그래야 한단 말인가?
이래나저래나, S는 그야말로 궁극의 카키색 코트와 궁극의 셔츠를 구입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그 옷을 아주 마음에 들어한 것은 당연하고, 사게 된 경위부터 시작해서, 그가 애초에 사고자 했던 옷이 부합했어야만 하는 디테일들의 목록과, 그 실물을 보여주며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도 한동안은 재미있어 하는 듯 했다. 당연한 수순으로, 미팅(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업무상 미팅 말고, 젊은 남녀가 마주앉아 눈을 흘기는 그 미팅)에 몇 번 입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코트를 입을 계절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 옷의 수많은 요소들은 '유행이 지났다.' 그 친구는 다시 또 다른 수십가지의 디테일 리스트를 새로 마련해왔다. 그가 그렇게 새 옷 사냥에 나서는 것을 학창시절 내내 보아왔다.
디테일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이 경우, 목적이 없는 디테일은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디테일을 파고드는 것 자체가 목적이니까. 그렇게, 옷은 입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된다.
세세한 사전조사와 타협없는 자세로, 일시적이나마 궁극의 옷을 손에 넣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 말고 또 다른 길은 없을까? 단 하나의 오답 말고 여러 오답을 노트에 빽빽히 적어놓고 소거법을 써야할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 명백히 오답으로 보이는 것과, 일견 일리있어 보이는 오답이 있을 것이다. 나의 오답이 나에게만 오답이며 남에게는 정답일지 모른다는 인식도 중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분부터 살펴 정리해 놓는 것이 좋다.
뜯어보면 볼수록 정교한 피규어를 찬찬히 오랜 시간 구석구석 들여다 본 적 있는지. 미치지 않고서야 저렇게까지 할 줄 몰랐다 싶게 자세하게 만들어진, 내부 깊숙히 들어앉아있어 부품 여러개를 덜어내지 않으면 그 내부가 보이지도 않을 작은 부품들, 거기 더해 이건 어떤 미친 자가 해놓은 건가 싶게 정교하게 도색까지 되어있다면 금상첨화다. 얼마 전 내가 팔로우 하던 어떤 이가 의뢰받은 피규어 작업에는, 12:1 비율 정도 되는 크기의 스파이더맨의 양쪽 눈에 뉴욕 야경을 그려넣는 것까지 포함되었다.
대학 시절, 춤추는 동아리에 속해 있었다. 같은 학부 선배이자 동아리의 조상님 쯤 되는 형이 한 명 있었다. 축제 공연 몇 주 전에 한 번씩 불쑥 찾아와서, 우리가 따 놓은(녹화 테잎을 반복재생하며 동작을 카피하는 것을 말한다.) 춤을 체크하곤 했는데, 수십 번 뺑뺑이를 돌리다 애들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 쯤, 노래의 어느 한 부분에서 모두를 일시정지 시켜놓고, 힘이 빠져 살짝 쳐진 한 명의 팔의 각도 따위를 콕 집어내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 양반은 '필립스'의 캐치프라이즈를 말했다.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듭니다.' 지랄맞지만, 군무에서 그건 사실 중요한 게 맞다. 멀리서 풀 샷으로 보면, 한 명의 각이 쳐지면 모두가 오합지졸로 보인다. 반대로, 그런 것까지 다 맞아떨어지면 전체가 격이 올라가 보인다.
케케묵은 '기능 vs 모양' 논쟁을 차치하고, '만듦새' 하나만을 놓고 보더라도 눈길을 휘어잡는 아우라를 발하는 것들이 있다. 화려한 색깔이나 패턴 같은 표면적인 요소 말고, 한땀한땀이라는 단어의 현현과도 같은, 흔히들 말하는 '마감의 퀄리티'의 측면에서 말이다. 우린 그런 차이와 사려깊은 품질, 혹은 강박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고집과 집착의 결과값 등에 감동을 받는다. 그러니 그 말은 맞다.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 우린 그런 물건을 '명품'이라 부른다. (뭐가 명품이냐, 무슨 브랜드가 명품이냐, 아니냐 등등의 골 아픈 얘기는 건너뛰자.)
그러니, 이건 정답 아닌가? 만약 4륜구동 suv를 사야 한다면, 유치원생에게 '찦차'를 그려보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크레파스로 단숨에 슥슥 그려놓을 그 모양 그대로 사출성형한 것 같은, 바로 그 '지프 랭글러'를 사야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에게 가방이라는 단어를 던져주면, 각 나이와 성별에 따라 열에 아홉은 떠올리는 바로 '그 가방'을 사야하는 것 아닐까. 머리가 희끗한 노신사는 '아타셰 케이스'(영화 '인턴'에서 드니로가 가지고 있던 바로 그 서류가방)을, 30대 유니섹스를 지향하는 세련된 도시남녀는 이를테면 '르메르 범백'을, 단정함을 보이고 싶은 여성은 '셀린느 클래식 박스'를 말이다. 가을엔 아무래도 누구라도 '바바리 코트'를, 젊은 신사라면 '페라가모 홀스빗 로퍼'를, 여행을 간다면 아무래도 '리모와 캐리어, 그 중에서도 알루미늄이지.'...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런 물건들은, 다소 불편한 면이 있더라도 그걸 상회하는 압도적 장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아니, 다소 불편한 점 따위라곤 없는 경우가 대부분일 게다. 그러니 이것들은 '돈 값을 한다.' 원단이 비싼 옷은 당연히 비싸고, 비싼만큼 좋은 옷이라 불리는데 거리낌이 없다. 여기 무슨 애매한 점이 있을라고. 안목이 높아질수록, 자신의 식견에 견주어 인정해줄만한 물건의 목록도 늘어날 게다. 그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 궁극의 명품이 너무 마음에 드는 나머지 색깔별로 모아놓으면 어떻게 되는가. 혹은 이 브랜드의 궁극의 보스턴백과 저 브랜드의 궁극의 보스턴백이 둘 다 너무나도 궁극궁극 거리며 내 마음을 두근대게 만드는 명품인데다가, 수많은 브랜드 중 나의 취향에 부합하는 단 두개의 브랜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그 보스턴백을 만들어낸 빌어먹을 바로 그 두 브랜드란 생각이 들 땐? 보스턴백이 두개인게 어때서...? 걍 두 개 다 있음 좋은 거 아니냐고? 그래, 그럴 돈이 있다면 좋겠지. 그런데 그게 문제다.
누군가는 지금쯤 나의 이 긴긴 잡소리가, 그럴 능력이 안되는 이의 핑계요, 변명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돈이 무한정 있을 때를 상상해보면 눈 앞이 아득해진다는게 문제다. 좋다. 하나하나 주옥같은 명품들이 끝없는 평원에 에펠탑 높이로 쌓여있고, 그것들 모두 하나같이 탁월하고 압도적이고 아름답고 오묘한 신물들이라 그걸 다 가져야겠고,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고 하자. 우린 언제 그 대평원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있는가. 언제 그 포장을 다 뜯을 수 있는가. 그러니까, 백화점 1층의 보스턴 백과 토트백과 캐리어와 크로스백과 클러치를 모두 샀다. 그걸 사려고 열심히 살았고 그래서 다 샀다. 캐리어에 짐을 싣고 언제 여행을 갈 수 있나? 아, 그럴 시간과 여유가 충분하다고? 쇼핑은 퍼스널 쇼퍼가 해준다고? 그럼 다시 물을 수 밖에 없다.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나요? 아, 좋은 것을 좋아하고 구린 것을 싫어하시는군요. 그럼요. 지당하신 말씀.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하늘은 파랗고, 지구는 둥글군요. 네, 제 눈에도 그리 보입니다만. 영 재미가 없군요.'
다른 예로 바꿔보자. 우리 집 앞에는 시립도서관이 있다. 거기엔 장서가 4만권 쯤 있다고 했었나, 아무튼 그렇다. 뭐, 정확하진 않다. 몇 십 만권이 있단 소린 못 들었으니, 차이 나봤자 기껏 몇 만 권 차이겠지. 그 차이가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이렇다. 거기 있는 책 대부분이 고르고 골라 살아남은, 인생에 도움이 될지언정 방해가 될리 없는, 이른바 양서라는 전제 하에, 내가 그걸 평생에 걸쳐 다 읽을 가능성은 제로다. 칸칸에 들어찬 그 책들의 목차를 일일히 읽지 못한 것이, 내 천추의 한이 될까?
뭐, 내겐 그렇단 거다. 명품이 항상 정답이 아닌 이유. 오답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게 느껴지는 이유. '걍 자칫 삐끗하면 재미가 없어진다는 점.' 무엇이? 그 물건이? 아니, 내가. 나 자신이.
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과정이, 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선호하게 되는 이유가, 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말의 논리가, 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시도할 때의 태도가.
고심하고 가려서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까지 감수하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행위라면, 그럴 필요가 없는 필드에서 행하는 일체의 행위가 재미있을리가 없다. 비교와 강박과 중독과 반복만 낳을 뿐이다. 다 그렇게 된다는 건 아니고 그럴 가능성이 확연히 높아지는 환경이라는 말이다. 끝맺음이 잘 되기가 어렵다. 습관이 되긴 쉬울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손쉽게 충족을 얻을 수 있으니, 그걸 할 수 없게 되면 좌절 또한 쉽게 찾아올 것이다. 반대로,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만큼 김 새는 일이 또 어디있는가. 마치 노트북에 설치된 지뢰찾기나 카드게임 같다.
다시 물을 수 밖에 없다. '보편타당, 비교우위, 가능한 많이, 가능한 좋은 것으로, 가능하면 가능한만큼, 전부 다, 그 중 제일, 최대한, 최고로...같은 단어 말고. 당신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개인적으로 커스터마이징 되지 않은 개념은, 아까 말한 것처럼, 하나마나한 말처럼 공허하게 느껴진다. 입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말이 며칠 사이에 읽은 책이나 사설의 인용일 뿐인 사람과 대화하는 것과 비슷하다.
가성비라는 말. 이건 길게 말할 것도 없다. 최신가요 안무를 16분의 1박까지 죄다 꼼꼼하게 따놓고, 기껏 네마디에 한 번씩 정도로 포인트가 되는 쭉 뻗는 동작의 팔의 각도만 잘 맞추면 얼추 춤 잘추는 애들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춤을 추잔 건지 못추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말자는 건지 분간이 안되는 지점. 이게 가성비라는 댄서의 태도다.
되는대로 더 떠들어보자. 스파 브랜드의 옷은 잠재적 폐기물이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곧 쓰레기가 된다. 아, 물론 우리 아버지의 그 스웨이드 봄버 자켓도 쓰레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은 시간이 더 걸렸다. 나는 유니클로나 자라에서 산 자켓도 그렇게 물려입을 수 있길 애초에 바라지 않는다. 이 말에 기분 나빠할 사람은 스파 브랜드 종사자 뿐일지도 모른다. 사는 우리도 그걸 알고 산다. 파는 사람들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을 과소평가한 것이 된다. 생각해보니, 그들도 알고 있다는 것이 더 일리가 있어 보인다. '편한 마음으로 와서 가볍게 집어가세요.' 싸고 질 좋은 것은 없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다. 중고차 허위매물 글에나 존재하는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도 없다. 우린 다 알고 적당한 물건을 산다. 아는만큼만 만족한다. 우린 그 정도만을 바란다.
겸허해서가 아니다. 귀찮아서다. 몸이 귀찮아서도 아니다. 생각을 덜하기 위해서다. 다른 중요한 생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생 전반에 쉬엄쉬엄 편히 임하고 싶어서다. 물론, 많이 피곤해서 그렇다. 우린 세상 편한 자세로, 세상 편한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너무도 쉽게 누군가의 내밀한 배설을 스크롤하며 지나친다. 찌꺼기 같은 것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쉽게 쌓여도 소멸에는 오래 걸린다. 쌓인 감정의 찌꺼기들을, 그늘에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덮어놓기에는, 콜라보레이션한 일러스트가 프린트된 2만원짜리 티셔츠만한 것도 없다. 하지만, 이제 티셔츠도 쌓여간다.
어쩌면, 우리가 워낙에 몸이 무거워일수도 있다.(나의 경우엔 확실히 그렇다.) 앉았다 일어서면 머리가 핑 돌기 시작한게 몇 년 째라거나, 조금만 걸으면 땀이 나고, 일하며 마주친 사람들 대하느라 질릴대로 질렸는데 또 사람들 마주치면서까지 '내돈내산'에 불필요한 귀찮은 소통의 과정을 거치는 것도 싫고, 그러니 인터넷으로 여러 개 골라놓고, 바구니에 든 것들을 빡치면 하나씩 해치워준다. 몸이 불어 지치니, 단 거, 기름진 거, 간단히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이라고 쓰고 '네 캔 만원'이라 읽는..), 에어컨 아래 영화를 틀어놓고 후딱 야식도 해치운다.
내일이면 택배가 올 것이다. 내일이면 또 다시 새로운 각오도 설 것이다. 스크롤을 더 하고, 좋아요와 하트를 더 써서 마음을 추스려본다. 마침맞게 딱 필요하다 싶은 광고가 부드럽게 재생된다. 부담없이 휘리릭. 쌓이는 게 뭐가 대수일까, 버리는 것도 그렇게 편한데. 가성비란 그런 거 아닌가. 용도폐기마저 깃털처럼 가볍게 처리해준다. 걱정근심이 즉각,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그러고 보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의 마지막 대사가 이렇지 않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거야.'
뭐 이런 주장도 가능하다. 비싼 걸 하나 사서 그것만 주구장창 입고 쓰다가 어차피 수선비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을 맞이하느니, 적당한 가격의 것을 사서 잘 쓰다가 자주 바꾸는 게 더 낫다고. 혹은 돌려가며 로테이션으로 사용하면 여러 물건이 고루 더 오래 쓸 수 있게 된다고. 맞다. 예를 들어, 등산화의 경우도 그런 것에 속할 수 있다. 정작 등산을 자주 하지도 않는, 어디 한 번 등산이라는 걸 해볼까...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종종 4-50만원을 호가하는 가죽으로 된 중등산화를 고른다. 눈을 돌려보면, 일주일에 두 번은 산에 오르는 양반이 10만원도 안 하는 등산화를 사서 신다가 반년 뒤에 실컷 신어 다 터진 등산화를 새 걸로 교체한다. 그렇게 쓰는 건 옳다. 진정한 의미의 가성비다. 그런데, 여기서의 포인트는, 싸고 나름 괜찮은 걸 샀느냐, 비싸고 엄청 좋은 걸 샀느냐가 아니다. '쌓아두느냐, 주구장창 쓰느냐.'의 차이다. 그럼 가격으로 '가성비'를 따질 게 아니다. 내가 무엇에 얼마나 시간을 쓰는 인간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먼저다.
'아끼다 똥 된다.' 아무래도 140만원짜리 한정판 에어조던은 농구할 때 신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사시사철 캔버스 단화만 신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캔버스 단화가 뭐가 어때서 그러냐고 묻는다면, 난 발바닥이 아파 못 신는다고만 해두자. 누군가에겐 20만원짜리 스니커즈가 적당한 가격이라 느껴질지 모르고, 누군가에겐 비싼 것일게다. 게다가, 그 20만원짜리 스니커즈를 1년 내내 신다보니, 1년이 채 못 가 뒤축이 다 뜯어지고, 알고봤더니 그 신발은 아웃솔의 이음새와 발뒤꿈치 컵의 내구성에 관해 다소 아쉬운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더라는 소릴 듣게 된다. 하지만 그 신발을 신어본 뒤로는 도저히 다른 신발은 신지 못할 것만 같은, 소위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그 편안함을 결코 포기할 순 없다면? (콕 집어 '호카 오네오네 본디5'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안 신어봤다...)그럼 20만원이 '가성비'에 속하는지를 따질 게 아니다. 내가 발바닥의 안녕을 위해 얼마까지를 써야하는 인간인지를 내가 규명하는 것이 먼저다.
가성비를 따지지도 않고, 명품에 목 매지도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어떤 것에 시간을 쓰는지를 잘 알기에, 다시 디테일한 안목이 개발되고, 수시로 그 안목이라는 것이 발동되는 케이스가 이제 등장할 차례다.
이 길고 긴 글은 우습게도 다시 첫 파트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내 친구 S, 궁극의 쇼핑 공작께서 그런 케이스였던 것이다. 그 녀석은 무턱대고 싸구려를 사지도 않았고, 살 때마다 자신이 이 옷을 과연 몇 년에 걸쳐 몇 번을, 어떤 때에 입을 것인지조차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을 즐겼다. S의 사전에 충동구매나 패닉 바잉은 들어선 바 없었다. 카키색 코트와 흰 셔츠 사냥 건에 대한 반전을 말하자면,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한 열 번 쯤 입겠지.' S는 무섭게 흥정했고,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아직 눈으로 보지도 못한 그 옷에 대해 미리 책정해놓은 금액을 넘기지 않았다.
이 경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대대손손 물려줄 가보'나,'궁극'이라는 개념만 제거하면, 그야말로 완벽한 옷 쇼핑 아닌가?
이쯤되면, 궁극의 옷이라는 엔딩은 없고, 궁극의 쇼핑이라는 오프닝만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힌트는 안목을 키우는 것에 대한 고찰에 있다. 지뢰찾기 이야기를 한 것 기억나는지. 컴퓨터를 켜면 메일함부터 여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매일 아침 일어나 드립커피를 한 잔 내리는 평화로운 루틴이 나를 그런 함정에 빠트릴 수도 있다. '자연스럽게'나 '원칙없이 그때그때' 에 위배되는 속성. 집착, 강박, 의미화 없는 습관.
내가 어떤지를 규명해줄 요소들이 많아지는 것이, 나를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항상 옳은 방향은 아니다. 우린 언제든 이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저, '나는 이런 거 싫어하는 사람이야.'라거나 '나는 어떤 때에 꼭 이런 걸 해야 돼.'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뿐일 수도 있다. 무엇을 왜 하는지 매번 스스로에게나 남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설명할 내용은 있어야 한다.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 행위라는 그릇에 내용이 비어 있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좋은 내용물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건 그저 나 자신에게만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인식 또한 중요하다. 내 정답이 남에겐 아무 효용이 없을 가능성을 항상 첫째로 전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에펠탑 높이로 쌓인 명품 대평원에서 영원히 떠도는 혼이 될지 모른다. 내게만 적용되는 것일지라도, 내용이 있는지 없는지. 중요한 것은 그게 전부다. 까딱하면 그냥 내뱉은 말에 따르려고 내 몸과 마음이 따라간다. 내가 만들어 둔 상에 부합하려고 그 실체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익숙하지 않나? 카키색 코트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물론, 정말로 그렇게 생긴 코트가 실재했으니 그건 문제가 되지 않지 않냐고 묻고 싶을테니 사소한 장면 하나를 보충하겠다.
그 코트의 주머니 입구는 사선이 아니었다. 심지어 덮개도 있고 수평이었다. 이미 S의 체크리스트를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 가게 아주머니는 수선집을 알려줬다. 수선집에서는 덮개를 뜯어내고 다시 박음질을 해주겠다고 했다. 내 친구는 결국 수평선을 바라보며 타협했다. 그리고 그 코트는 궁극의 코트가 되었다. 일시적이나마.
우리는 자신에 관한 어떤 것이든 선택적으로 타협하고 합리화하고 난 후, 그 사실 자체를 잊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성공적인 결과처럼 보이는 경험치 덕분에, 우리는 여태 해오던 과정을 반복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S와 나는 안목의 전당에 (스스로를 추대하여) 오르고, 타협없는(적어도 그리 보이는) 디테일의 아레나로 또 다시 출전했다. 집착할 것을 찾아서 강박적으로, 습관적으로.
'전혀 자연스럽지 않게.'
'내가 임의로 만든 원칙을 획 하나 고치지 못하고.'
S는, 자신의 예언을 적중시키기 위해, 열 번 남짓 입은 옷을 더 이상 입지 않았다. 완벽. 이것이 안목의 함정이다. 안목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신에 몰입하는 것.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리는 상에 맞게 자신을 재단하는 것.
좀 전에 적었던 말을 다시 적어본다. '쌓아두느냐, 주구장창 쓰느냐.'
한 줄 더 덧붙인다. '충분히 쓰고 자연스럽게 미련없이 제 때 흘려보낼 수 있느냐.'
젊은 나이에 무술감독으로 꽤나 명망 있는 동생 한 명과 오랜만에 조우했다. 근 몇년 동안, 오랜만에 만난 이들이 모두 덩치가 커져버린 나를 보면 첫마디로 운동을 하냐고 말하는 게 반복되고 있었다. 그 말이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보이는 건지 궁금했던 나는, 그가 나를 보고 첫 마디를 뭐라 꺼낼지 궁금했다.
"형 요새 운동 열심히 하시나 봐요."
너마저... 각종 무술 유단자에 몸쓰는 스턴트맨, 무술감독아! 내 몸이 운동한 몸으로 보이니? 아, 내가 배에 힘을 주고 있구나. 배에 힘을 빼고 편하게 앉아 말했다.
"2년 새에 20키로 넘게 쪘어."
"아. 형, 그럼 차라리 이제 더 먹고 더 운동해서 더 키우세요. 머리도 짧게 걍 투블럭으로 잘라 봐요."
운동했냐는 일반인들의 물음만큼이나 허황된 소리로 들렸는데, 그제야 그는 전문가처럼 보이는 말을 했다.
"형, 예전에 제가 처음 만난 몸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그게 더 쉬울지도 몰라요. 일단 배보다 갑빠가 더 나오게만 키우면 일단 핏은 괜찮아지지 않을까요."
사실 나도 뭐가 뭔지 모른다. 지금도 물건을 샀다 버렸다 한다. 내가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완벽을 추구하지 않으면 꽤 많은 게 쉽게 풀린다는 정도다. 이상적인 지점을 상정하고 그에 못 미치는 나를 몰아붙이지 말고, 지금의 나를 관찰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옷장에 터질 듯 걸려있던 옷을 정리하는 것은 의외로 쉬웠다. 하나만 결정하면 됐다. 지금을 인정할 것이냐, 저 때로 못 돌아가고 있는 지금을 변명하려 애쓸 것이냐. 아시다시피, 급격한 체중증가로 절반의 옷은 맞지 않았으니까. 빠지면 그 때 맞는 것을 사면 된다. 옷의 핏과 실루엣 이전에 내 실루엣을 보면 된다. 지금의 나.
자주 걸어야 하니 높은 굽의 부츠와 구두는 필요가 없다. 걸을 때마다 찌릿거리게 둘 수는 없으니, 로퍼라도 아웃솔이 부드러운 것이어야 한다. 어떤 신발을 신어도 복숭아뼈를 돋보이게 하고 마치 맨발처럼 보이게 해주는, 이름도 솔직한 '페이크 삭스'는 다 버리자. 왜 언제 벗겨질지 모르는 불안감을 계속 지닌 채로 길을 걸어야 하는가. 절대 벗겨지지 않는 페이크 삭스라고 주장하는 모든 광고들에서 관심을 끄자. 발목양말이 발목에 어중간하게 걸쳐져 있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걔는 그러라고 그렇게 생긴 애다. 나만 괜찮으면 된다. 그럼 나는 언제 어떤 옷차림일 때 괜찮은 걸까? 내가 지금보다 좀 더 가벼워지고, 지금보다 덜 아프면 좋겠다. 그렇게 보이려고 슬림핏 스판 팬츠에 셔츠를 밀어넣고 벨트를 졸라매는 것과, 하루빨리 그렇게 되는 것 중에 뭘 골라야 하는가.
대신 발목양말은 회색으로 통일하자. 발목양말은 여름에만 신고, 보통은 운동화를 신을테니, 다른 색은 필요없다. 올이 나가거나 발목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진 양말은 버리자. 긴 양말을 세 가지 색으로 사자. 검은 색, 갈색, 짙은 회색. 겨울에 신을 두꺼운 모양말은 지금 가진 걸로 족하다. 빨래를 널 건조대도 새로 사자. 지금 있는, 관절부분이 헐거운 플라스틱 재질 말고, 튼튼한 금속재질로 사자. 사고 나니 건조대에 빨래를 널 공간이 전에 있던 것보다 좀 작다. 그럼 빨래를 더 자주하자. 여름에 입는 속건성 티셔츠는 두 벌이면 족하다. 씻을 때마다 손빨래를 하면 되지 않나. 아무렇게나 막 입고 막 빨아도 괜찮을만한 것으로 사자. 그럴만한 옷은 그저 엄청나게 싼 옷이면 안 된다. 적당히 꽤 좋은 옷이라야 그렇게 막 입고 막 세탁해도 될 옷이다.
덩치가 커졌으니 넉넉한 핏의 맨투맨을 입자. 단추를 잠궈도 사이사이가 벌어지는 핏의 남방이나 빳빳한 카라의 피케티는 이제 입지 않는다. 몸을 구겨넣고 배에 힘을 주지 말자. 편안한 상태로, 다만 깔끔하게 입자. 집에서 막 입을 옷이라는 것들을 두지 말자. 버리기 귀찮아 그냥 둔 옷을 입고서, 살기 귀찮아 대충 버려진 것처럼 있지 말자. 큰 방에서 일어나 작은 방에 편집이나 글을 쓰러 갈 때에도 긴 바지에 티나 셔츠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출근할 것이다. 잠옷을 새로 사자. 단추가 붙은 것으로, 여름용과 사계절용을 따로 사자.
솔직해지자. 혹시 청바지와 티셔츠만 걸쳐도 핏이 사는 몸이 아니어서 옷이 많이 필요한 건 아닐까. 그건 너무 단순한데. 그도 그럴 것이, 몸이 꽤 좋았다고 자부할 때에도 옷은 차고 넘칠만큼 많았다는 반론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뭐가 달라진 결과냐고 물으면, 그 때 줄창 하던 생각에 지금은 전혀 동의하지 않아 그렇다고 답하겠다.
'매 순간, 모두가 나를 보고 있다..라고 생각할 것.'
신병교육대 조교를 하는 동안이나, 막 전역하고 춤을 추고 다닐 때 즈음엔 이 생각이 극에 달했던 것 같다. 아니, S와 주구장창 옷 사러 다닐 땐? 아니, 로라장, 나이트 좀 삐대고 다닐 땐? 그 땐 안 그랬고? 그래, 그 즈음 뿐만이 아니다. 그 생각에 기름을 부어준 환경이었을 뿐이다. 아니, 그런 환경을 스스로 조성하거나 찾아다녔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실 그냥 어릴때부터 관종이었다. 시선이 내게 모이면 재밌어 했다. 멍청한 짓도, 애꿎은 난장도 많이 피웠다. 그러면서 점점 더 상의는 더 타이트하게, 하의는 바람 불면 펄럭이며 양력을 받아 몸을 공중에 띄울 만큼 통이 넓어지고, 주렁주렁 허리춤에 체인이 절그럭거리고, 구두 굽은 갈수록 높아지고, 앞머리는 스프레이와 무스의 도움으로 '에이스 벤츄라'의 짐캐리처럼 휘감겨 올라가고, 뿔테 안경의 알은 형형색색으로 바뀌었다. 순간 나오는대로 큰 목소리로 아무렇게나 지르듯이 말하고 그 말에 푹 찔린 사람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대수롭지 않게 웃어 넘겼다. 짝다리를 짚고 서 있는 실루엣에 집착했다. '매 순간 모두가 나를 보고 있는데 그게 감당 가능한 나' 라는 캐릭터에 몰입했다.
지금은 가급적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길 바란다. 헌데,내가 어찌 비칠지 생각하는 것이 감당이 안되는 상태라면, 그럼 그건 그냥 자기혐오 아닐까? 아니다. 그것과는 좀 다른 것 같다. 말하자면, 내가 맘에 들지 않으니 보여지고 싶지 않다기 보다는, 내가 뭘 입고 어떻게 보여지고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든 사실은 그렇게까지 남이 신경쓰지 않는다는 게 그다지 기분 나쁘거나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 그 사실이 오히려 편안하다. 그걸 신경써달라고 주장하기 위해 나에 대한 세부사항을 만들어내는 것에 질렸다. 간단히 말해, 자기연출을 관뒀다.
내가 어떤 존재가 될지를 그냥 바라고, 그냥 그렇게 되자. 누구의 평가를 의식하는 행위를 멈추자.
나의 내부에서부터가 아니라 나의 밖에서부터 오는 것들로 나를 만들어가려고 했을 때 오히려 모순에 파묻혀 허우적댔던 것 같다. 까다롭고 확고한 나의 선호와 취향이라 생각했던 것들에서, 정말로 '지금의 나'만 남기고 나니, 그제야 겨우, 더 이상 남의 관심을 과도하게 끌고 싶지도, 타인의 평가를 빌미로 분노하고 싶지도, 실제 나보다 후한 선의의 평가에 의지하고 싶지도 않아졌다. 도리어 내 발상과 행동이 나를 놀래키기를 바란다.
직접 쌓은 세부사항들의 합이 나라면, 이제 세부사항이 되도록 없길 바란다. 기호나 취향이 예리하게 벼려지면 좋겠지만, 경향성은 언제든 바뀔 수 있길 바란다. 루틴이 있어 편하지만, 루틴이 없어 불편하지 않기를 바란다. 궁극은 없다. 돌고 돌아 이제 그냥 'simplicity' 가 좋다. 결국 심플한 디자인의 좋은 소재의 옷이 좋다는 말을 하려고 이렇게 길게 떠들었냐 싶을 것이다. 갈래가 난 오솔길들과 대로와 교차로를 지나온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고향땅 '샤이어'에서의 평화로운 나날을 뒤로 한 호빗들이, 한번도 떠나 본 적 없던 마을을 떠나 그 난리통을 겪고, 한참 후 '샤이어'의 한가한 일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을 두고, 결국 돌아와 똑같이 앉아있을 것을 안 해도 될 짓을 하고 왔다고 하진 않잖아.
가성비니, 성능이니, 취향저격의 디자인이니, 압도적인 소재니, 멋진 철학을 가진 쿨한 브랜드니, 뭐 그런 건 언제든 새로이 발견된다. 얼마 전 지구를 사랑하는 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투자했다고 알려져 유명해진 '올버즈' 신발도 그런 브랜드일 것이다. 내가 모르면 계속 모를 것이고, 알게 되면 아는만큼 보일 것이다. 예전엔 적당히 알고 그만큼만 만족하기 위해 '가성비'를 따졌다면, 이제는, 잘 아는 만큼을 담보받은 후 그 이상의 만족을 덤으로 줄만한 대상을 시간을 들여 찾고 나서, 더는 따지지 않는다. 일종의 위임장을 내주고, 납득할만한 합의점이 생기면 거기서 멈추고 만족하는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은 기대하되 반드시 원하지는 않는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진은 리바이스 스트레치 진이면 되지 않을까. 지금 신는 로퍼가 못 쓰게 되면 다시 허시파피 매장에 가면 되지 않을까. 다 똑같은 소재의 반바지라면, 내가 좋아하는 'the rock, 드웨인 존슨'의 심볼과 '블러드 스웻 리스펙트'가 촌스럽게 새겨진 언더아머 '프로젝트 락' 시리즈 반바지를 입어 기분이 조금 더 좋아지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터틀넥이든 목도리든 그냥 캐시미어를 사서 오래 쓰자. 지금 입는 긴 트레이닝 팬츠가 다 닳으면 다시 룰루레몬으로 가서 똑같은 것을 달라고 하면 된다. 여름에 운동을 할 때 입는 파타고니아 티셔츠 두 장은 매일 같이 손빨래를 하고 있는데 언제 닳아 없어지려나. 질리지도 않고 세월이 먼저 가고 있으니 좋은 일이다. 얼른 무척 추워져서 롱패딩 안에 저 랄프로렌 가디건을 입어야 되면 좋겠다. 오십이 넘어도, 육십이 넘어도, 춥다 싶으면 어김없이 저 옷을 걸치고 앉아있으면 좋겠다. 가디건이란 물건을 외계인에게 설명하려면 딱 저렇게 그릴 것 같은 모양의 바로 그 가디건이라, 방에 걸어두고 보는 것으로도 기분이 좋으니 퍼즐 액자 못잖은 효과다. 발이 시리거나 눈, 비가 쏟아지면 고민할 필요없이 발을 집어넣을 팔라디움 부츠가 있으니 생각이 없어져 좋다.
더 좋은 것은, 내가 가진 모든 옷가지와 신발, 악세서리가 무엇인지 내가 언제나 다 알 수 있다는 거다. 하나가 수명을 다하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다. 쇼핑몰에 당도해서, 지금 내가 어떤 기능의, 어떤 색상의, 어느 브랜드의 어떤 옷을 사야하는지, 그것을 사면 무엇이 충족될 것인지, 오늘 새로 산 옷을 언제 입을 것이고 그 옷이 어떤 기분을 줄지 아는 것. 이보다 더 나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물론 합의안은 언제든 갱신된다. 앞서 말했듯, '궁극'이나 '완벽'만 버리면 된다. 지금과, 여기와, 나만 생각하면 된다. 내게 고만고만한 추운 날에 신는 신발로 올타임 넘버원에 가장 가까웠던 까만색 나이키 에어포스원 운동화는, 올 겨울 호카오네오네 사의 '본디 레더'로 대체될 지 모른다. 스탠스미스는 여전히 에브리데이 한결같은 스탠스미스이지만, 언제 느닷없이 올버즈와 함께 하는 매일매일이 될지 모른다. 아디다스 오리지널 져지는 영원불멸한 오리지널이지만, 이제 내겐 한 장 밖에 남지 않았다. 가을이 되면 빈 옷걸이 중 하나에 바람막이가 한 벌 걸릴텐데, 그것이 룰루레몬이 될지 파타고니아가 될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색일지는 이미 알고 있다. 오랜 시간 찾아보고 비교하고 가격을 따져보고 나서 나온 결론은 물론 아니다. 그냥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으니 그게 얼마든 정말 필요할 때가 되면 사기로 한다. 비워내야 하는 것이나 채워넣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옷장 문을 여는 순간 큰 노력없이 눈에 띈다. 정말로 필요하지 않으면 물건이 새로 생겨나지 않는 세계관 속에 살고 있는 셈인데, 이 세계관 안에선, 천천히 걸어도 항상 제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기분이 든다.
정리하자면 미니멀리스트들이 자신의 유튜브나 팟캐스트, 다큐나 저서에서 줄기차게 말한 그 내용으로 귀결된 셈이다. 심플하고 좋은 소재의 옷. 유행을 타지 않는 클래식한 옷들이 종류별로 하나씩. 뭐 이와 비슷한 얘기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다. 내가 어떻게 이것을 적용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는지, 나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해석했는지, 그리고 거기서 나의 디테일은 무엇이 첨가되었는지가 의미있다. 돌고 돌아 다시 도착한 곳이라야 진짜 출발지다. 거기서 또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나, 그 중에서도 '지금의 나' 뿐이다.
미니멀 라이프를 시작한 사람의 수 만큼이나 그들이 살아가는 양상은 다양하다. 이들이 만나서 어떤 궁극의 공식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비법노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하는 말이 다 비슷하다고 해서, 그들의 모습이 모두 비슷할 것이라는 것은 큰 착각이다. 이런 다양한 미니멀리스트들이, 그럼에도 비슷한 것 하나가 있다. 남에게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고 예의 바르고 느긋하고 정확하면서도, 결국 자신에게 가장 열광적인 마니아라는 것. 그들은 자신의 가장 집요한 팬이다. 일거수 일투족이 궁금하고, 판에 박힌 모습이 계속되거나 자기복제를 반복하면 어김없이 눈치를 채고, 변화와 도전을 종용하고, 매 순간 처음 본 것처럼 감탄한다. 할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한결같은 루틴에 매번 집중하고 열광한다.
덧 말고 덫
그러니, 단순한 루틴이 반복된다고 해서, 그를 둘러싼 환경이 새로울 것 없어 일견 단순해 보인다고 해서, 매번 똑같이 쳇바퀴를 돌며 점점 무의식적인 습관만 남은 좀비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그렇게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럼 순식간에 껍데기만 남는다. 디테일 심취 놀이, 안목의 함정에 다시 빠진다. '나'는 아무래도 좋게 된다. 보여지는 나의 세부사항에 목 매게 된다. 가진 옷을 다 합쳐봤자 불과 스무벌도 안된다는 팩트로 자랑을 하게 되거나, 더 많은 물건을 버리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보이는 물건 수만 적을 뿐, 곤고한 상태에 빠져 스스로를 공격하는 건 물건에 파묻혀 가라앉는 수많은 이들과 마찬가지가 된다. 누군가가 폭음과 폭식을 할 때, 그는 중독상태로 자기 물건을 버리고 불태울 뿐이다.
나의 가장 열광적인 마니아가 나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스토커가 된다. 그 스토커는 나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집착, 강박, 놓으면 모든게 무너질 것 같아 그저 반복하는 습관. 완벽주의가 그런 식으로 다시 스멀거리며 올라온다. 모든 영역에서 미니멀라이프가 잘 이뤄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할 때 그렇게 된다.
나는 특정 공간에 대해 그런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덧
매일 우리 집 앞 공원에 널부러져 기지개를 켜는 길고양이 일동들은(한마리가 아니다.) 지 털이 무슨 무늬든, 눈동자가 무슨 색이든, 몸매가 어떻든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 우아하게 걷고 앙증맞게 하품하고 머저리처럼 꾸벅꾸벅 존다. 총체적으로는 걍 귀엽다. 가끔은 날렵하고 때로 여유있고 어떨 땐 멋있기도 한데(대부분의 경우엔 그냥 바닥에 떨어진 식빵 덩이 같지만), 그건 걔들 각각이 지닌 특색이라기보단 대체적으로 걍 고양이라 그런 듯 보인다. 고양이가 고양이라서 고양이스러운게, 누구에겐 맘에 들수도 있고 누구에겐 관심 밖일수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양이는 알아서 잘 산다. 고양이답게. 걔들이 어느날부터 내가 우습게 보는 걸 알고 보더콜리처럼 기민하게 총총거리기 시작했다고 생각해보라.
상어가 이루말할 수 없이 오묘한 그 유선형의 생김새를 유지한 건 수만년이 넘었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아는 지금의 상어가, 업데이트 없는 최초 버젼이자 최적화가 끝난 상태란 뜻이다. 진화론이든 창조론이든 그건 모르겠고, 각기 모양을 바꿔가며 세상에 적응해 온 수많은 동물들을 아랑곳않고, 상어는 그냥 난 모양 그대로 그렇게 살아왔다. 난폭해보이는 외관과 달리, 상어는 척추 말고는 몸통에 뼈가 없어서 작살로 찌르면 몸이 푹 뚫리고 꼬치처럼 꿰어진다. 사람들을 까무러치게 만드는 그 이빨은 매일 빠지고 새로 난다. 흉측한 이빨과 달리 상어의 눈매가 어처구니 없이 영롱하단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상어의 눈동자는 송아지의 그것처럼 눈망울이 동그랗다. 사냥감을 물기 위해서 턱을 최대한 벌리면 눈으론 사냥감을 제대로 볼수도 없을만큼 입이 벌어지는데, 그 때 사냥감의 몸부림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빠른 시간 안에 눈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상어의 눈동자는 아래서 위로 닫힌다. 초딩 때 줄기차게 본 내셔널 지오그래픽 상어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나는 상어를 좋아한다. 그러니 저 세부사항들은, 마니아에게만 보이는, 상어에 관한 감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상어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몸서리를 칠지 모른다. 그리고, 나나 그 누군가나, 상어의 살아가는 꼴과 생긴 모양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상어는 알아서 잘 산다. 상어답게.
그러니 결론은 이렇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거창한 뜻으로 해석하려는 건 아니다. 그냥 생긴대로 사는 것. 그리고 그 전에 내 생긴 꼴을 아는 것. 기질대로 움직여 나를 그대로 내보이는 것. 그리고 나면 내게 어울리는 것이 보이기도 하고, 내게 적합한 장소가 보이기도 한다. 의식적으로 노력을 한 끝에, 동물들에겐 저절로 가능한 그 경지를 겨우 알아채는 셈이다. 하지만, 의식해야만 가능한 우리라서, 우리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 있다. '자연스럽게' 를 느끼는 감각이 그것이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감각일까.
'이래도저래도 도무지 나 답지 않을 수가 없는 상태.'라고 느껴지는 기분 아닐까.
다들 한 번쯤은 느껴본 적 있지 않나.
그러니 가자. 다시 그 상태로.
그 마음을 품고, 옷장 문부터 열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