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함께 사람이 있다.
나와 함께 술을 마신 사람들. 나와 함께 취한 사람들.
그들은 친구, 동료, 상사, 선배, 후배들인 것 같지만 정확하게는 친구, 동료, 상사, 선배, 후배들 중의 일부이다. 술을 마시며 마음속에 응어리 진 사연을 털어놓기도 하고 맨 정신으로 말하기는 껄끄러웠던 것을 슬그머니 술기운 인양 꺼내기도 한다. 술에 취해 너그러워진 상대는 뭘 그런 걸 갖고 고민하느냐며 흔쾌히 내 망설임과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해 준다.
술자리 대화는 그래서 흥겹고 유쾌하고 묵은 고민과 오래 망설였던 청탁이 해결된다. 어색했던 관계가 친밀해지고 반목하던 이가 흉금을 털어놓는 사이가 된다.
과연? 진짜?
나는 술자리의 우정이나 술 마시며 오케이 했던 중대한 약속들이 바로 다음 날 술이 깨면서 곧바로 ‘술 먹고 한 소리’로 치부되며 ‘없었던 일’로 되는 일을 종종 경험했다. 처음엔 이걸 모르고 순진하게 믿었다가 ‘그걸 곧이곧대로 믿었단 말이야?’라며 술자리에서 나눈 말의 유효기간은 술이 깰 때까지였다는 것을 몰라서 면박을 했던 일이 있다.
좋게 말하면 술자리의 마법이고 냉정하게 말한다면 술 먹고 한 말들의 가벼움이다.
술자리에서는 다 용서가 되고 술자리에선 반대로 다 무효가 된다.
무책임하고 사려 깊지 않은 자리가 바로 술자리이다.
우리는 거기서 사람을 사귀고 사람과 약속을 하고 사람을 신뢰했다. 그리고 자주 후회했다.
나는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80년대 중반 학번인 내 시대에는 국내 대학에 영화학과가 없었다.
겹치는 부분은 연기 말고는 별로 비슷할 것도 없는 연극과 합친 ‘연극영화과’라는 희한한 학과를 개설한 대학이 전국에 네댓 개 있을 뿐이었는데 그래서 영화를 공부하고 싶은 학생은 원하지도 않는 무대 미술 같은 걸 공부해야 했고 연극도 마찬가지여서 연극배우가 꿈인 학생이 필름 카메라 렌즈의 특성과 심도에 대한 시험 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그게 싫어서, 그리고 서울대 연고대 등 일류대학에는 아예 개설조차 되어있지 않고 한 수 아래라고 할 수 있는 후기 대학들에만 개설된 ‘연극영화과’가 시시해 보여서 국내 진학을 접고 할리웃이 있는 캘리포니아에 가서 공부를 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어렵게 미국으로 건너가 학사 석사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미제’ 학위와 국제영화제 입선 타이틀을 들이밀 수는 있었으나 한국 사회에 진입하는 데에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으니 바로 ‘학연’과 ‘지연’이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영화 현장에서 알아주는 ‘성골’은 문광부 산하 영화진흥위원회가 만든 1년제 영화학교 ‘한국영화아카데미’와 역시 문광부가 만든 국립 예술대학 ‘한예종’이 있었고, ‘진골’은 기존의 연영과 대학들인 중앙대, 한양대, 동국대라 할 수 있었다. 좁디좁은 영화계에서 ‘선배들’ ‘동문들’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어드밴티지였다. 서로 초면인 사이인데 한쪽에서 인사를 꾸벅하면서 ‘선배님, 저 00학번 아무개입니다’하고 자랑스럽게 인사를 하면 인사를 받은 프로듀서나 감독은 나를 대할 때 하고는 완전히 다른 미소와 친밀감으로 즉각적인 연대감을 형성했다. 그러면 역시 대기하고 있던 줄에서 한둘이 일어나면서 저는 00학번 누구입니다 하며 손을 내밀면 나 혼자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말았다. 일찍 와서 부지런히 줄 서 있는데 새치기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은근히 드러나는 그들끼리의 친근함은 영남 사투리끼리, 호남 사투리끼리에서도 나타났다. 서울 출신인 나는 영호남과 충청, 강원, 제주에도 끼지 못하고 외로웠다. 서울 출신들도 적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20대와 30대 초반을 보내고 돌아온 나는 온전한 서울 출신으로의 자격도 얻지 못했다. 아버지는 황해도 출신이고 어머니는 서울 출신인 내 처지가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잔뜩 주눅이 든 나는 오후 늦게 쯤에야 이들 사이에서 내 존재감을 드러내고 머리를 들이미는 방법을 알아냈다.
서먹했던 이들은 모두 술자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술자리라면 나는 자신 있게 나를 소개하고 집필 중인 시나리오 얘기도 거침없이 들려주고 미국에서 공부했던 프로덕션 스토리를 과장되게 전해줄 수 있었다.
‘학연’과 ‘지연’이 없었던 나는 그들만의 카르텔을 뚫고 들어갈 방법으로 그들과 함께 삐뚤어지도록 술 마신 인연을 만들어서 나와 그들 사이에 ‘주연’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나는 아카데미 출신들과 술을 마시고 다음 주에는 한예종과 마셨고 그다음 주에는 부산 출신들과 술을 마셨다. 별로 볼 영화도 감독도 없었던 광주 영화제에 굳이 내려가서 술자리에 합석했고 전주영화제에는 빠지지 않고 내려가서 콩나물국밥에 모주를 마셨다.
이렇게 몸이 상하면서까지 어렵게 ‘주연’을 만들어 ‘충무로’ 사람들과 인연을 만든 노력은 내가 교수가 되어 영화판을 뜨면서 모두 헛수고가 돼버렸다. 가끔 영화제에 가서 먼발치로 이들을 만나게 되면 모르는 척하거나 미소 정도로 목례하고 만다. 언제는 같이 영화하자고 밤새 굳은 약속을 하던 사이였는데 그 사이 버티지 못한 이들은 소식 없이 떠났고, 남은 이들은 또 다른 이들과 술을 마시느라 내 인사를 받지 않았다. 계속 술잔을 주고받아야 유지될 수 있는 인연 ‘주연’은 내가 술잔을 내려놓는 순간 덧없고 싱거운 인연이 되고 말았다.
술을 마시면서 사귄 또 다른 사람들은 산을 다니고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둘째 애와 가족들이 내가 술 마시는 것을 못마땅해 하자 술을 대신할 만한 대안 거리를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등산과 백패킹, 트레킹이었다. 무턱대고 시작했다가 처음에는 조난을 당해 위험한 지경에 처하기도 했지만 나는 곧 산에 익숙해지고 산 다니는 데에 취미를 붙였다. 오래지 않아서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산을 가지 않으면 몸에 좀이 쑤실 정도가 되었다. 이 즈음 블*야크라는 등산 전문점에서 마케팅의 일환으로 전국 산을 다니며 인증을 하는 사업을 시작했었는데 나는 거기서 셰르파를 맡을 정도의 등산 이력을 갖게 되었다. 그 많고 많은 국내 산들을 두루 섭렵하고도 모자라서 히말라야에 원정을 가서 안나푸르나 서킷과 쿰부 히말라야 지역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오르기도 했는데 산을 다니면서 군살이 빠지고 몸도 예전 30대 때처럼 돌아왔다. 폐활량이 커지고 남들이 숨을 몰아쉬는 오르막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힘들게 오른 정상에서 뒤돌아 보는 산그리메와 드넓게 펼쳐진 산아래를 굽어보는 것은 묘한 쾌감이 있었다.
그리고 하산에는... 항상 술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 산악회든지, 동네 친목 산악회든지, 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는 산악회든지 모든 산악회의 끝은 하산이 아니라 하산 뒤 들이키는 하산주였다. 그날 산행이 힘들면 힘들수록 하산주는 달콤했고, 아무리 힘든 산행을 하더라도 산행을 마치고 들이킬 시원한 막걸리와 감칠맛 나게 무친 도토리묵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었다.
히말라야 원정 산행이 힘든 이유는 산행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3,000미터 이상 고지대에서는 고산병이 무서워서 술을 마시지 못하는데 그 고산 지대에 머무는 일정이 4-5일 이상 되기 때문에 그동안 술을 참는 것이 산행을 힘들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카트만두 서쪽의 안나푸르나 산군 주변을 크게 도는 일정인 안나푸르나 서킷 산행에서 최고 지점인 쏘롱라(5,500미터)를 지나면 곧바로 급경사로 묵티나트라는 3,000미터 대 지역으로 하산하게 되는데 내려오자마자 가장 먼저 찾는 것은 다름 아닌 술이다. 며칠을 마시지 못한 술이 고파서 롯지가 나오자마자 맥주를 주문하고는 숨도 쉬지 않고 들이킨다.
캬, 그 맛이란… 네팔 맥주가 그리 맛있는 편이 아닌데도 산에서 내려와 들이키는 맥주는 이 세상 어떤 맥주보다도 달고 시원하다.
텐트와 매트리스, 취사도구와 먹을 것들을 챙겨 100리터 배낭에 싸 짊어지고 올라가 산에서 하루 자고 내려오는 백패킹은 하산주를 산 정상에서 마시고 한숨 자고 내려오는 변형된 등산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나는 평일 오후쯤에 올라가 느긋하게 텐트를 쳐놓고 노을을 바라보며 들이키는 맥주를 사랑했다. 하룻밤 지낼 모든 살림살이를 갖고 가야 하는 백패킹은 태생적으로 배낭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배낭이 무거워도 술을 빠뜨린 적은 없다. 허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20킬로 배낭을 메고 아슬아슬 비탈길을 오르는 이유는 다름 아닌 정상에서의 황홀한 혼술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산꼭대기에서 이날을 위해 준비한 잔잔한 플레이리스트 음악을 휴대폰을 통해 들으며 조그만 등불 하나 밝혀두고 의자에 몸을 뭍는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면 산 아래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총총한 별들. 치익 소리 나는 버너를 켜면 파란 가스불에 팬이 달아오른다. 작게 자른 한우 등심을 핏기만 가시게 구운 뒤 진로 일품 소주 한잔과 입안에 털어 넣으면 참 달았다.
그 정도로 마쳤으면 좋았을 것을 좋으니 또 마시고, 마시고, 그러니 대취하고..
그 좋은 산행은 시작만 기억날 뿐 백패킹의 마무리는 항상 속 쓰림과 숙취로 괴로웠고 하산길은 위태로웠다.
산티아고는 등산과 트레킹의 장기 버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800킬로미터를 걷는 한 달 쯤의 일정의 카미노 프랑스길을 걷고 나서 나는 트레킹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되었다. 첫 카미노 이후로 나는 수차례 다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는데 낯설었던 스페인 문화와 트레킹에 푸욱 빠져들었다. 순례라지만 한 달간 매일 하는 일이라고는 먹고 걷고 자는 것뿐인 단순한 일과였다. 비행기로 열두 시간이 걸리는 스페인까지 날아가서 한 달을 걸으며 경험하는 새로운 문화와 즐거움이 있었으나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와인'이었다.
식사를 주문하면 음료로 와인을 인당 한 병씩 주는 넉넉한 문화에 감탄했고 술을 시키면 저절로 따라 나오는 이제껏 접해보지 못했던 안주들, 예를 들어 이베리꼬 베요타 하몽과 다양한 핀초스와 타파스는 가히 물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물론 산티아고는 ‘순례’이고 ‘자기 성찰’의 기회를 얻고자 떠나는 트레킹이었으나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고 어느덧 ‘순례’와 ‘성찰’은 사라지고 산티아고는 ‘스페인 와인 시음’과 ‘스페인 식문화 탐구’로 변질되었다.
한국인에게는 영미 문화권과는 또 다른 스페인이 낯설기 때문에 나이가 좀 있는 양반들이나 언어가 안 되는 분들은 나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있었다. 나 역시 혼자 걷는 것보다 길동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몇 해 전 떠난 겨울 카미노에는 떠나기 전 한국에서 몇몇 인연을 사귀게 되었는데 만남부터 술로 시작했다.
나는 새로 알게 된 사람들과 연령 파악해서 바로 형, 동생하고 부르는 문화를 싫어했는데 그런 내가 형이라고까지 부르며 친하게 지낸 이가 있었다. 사는 동네도 가깝고 성품도 좋아서 그랬는데, 같이 걷던 스페인 산티아고 길에서 내가 코로나 감염이 되어 못 걷게 되자 그의 본성을 볼 수 있었다. 내가 형이라고 부르고 나를 동생이라고 여겼던 그는 감염된 내가 더 이상 걷지 못하고 혼자서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 상태에 처했는데 내 상태를 챙기기보다는 자기가 걸어야 하는 일정에 차질이 생긴 것을 염려했다.
해외에서 코로나 감염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일이었고 격리된 상태에서 홀로 병을 치료하면서 기존 항공권을 취소하면서 새로 항공권과 홀로 지낼 수 있는 숙소를 계속 알아보는 것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외로움을 주었다. 내가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너무 외롭고 지쳐서 당연히 그의 위로를 기대했는데 그는 나 때문에 자기도 감염된 줄 알고 트레킹을 포기해야 하는 줄 알고 마음이 무거웠다가 정상이란 걸 알고 홀로 격리 중인 나에게 환호성을 했다.
처음엔 서운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동안 그와의 관계는 결국 술이 이어주고 있었다. 와인을 모르는 그에게 와인 고르는 법을 알려주고 코르크를 따지 못하는 그에게 팩 와인을 알려주니 그는 더 이상 내가 필요 없어졌다. 늘 술과 함께 대화하고 술 마시다 고꾸라진 인연은 맨 정신으로는 만날 일도 없고 만나도 데면데면했다. 친하다고 생각한 건 취했을 때 감정이 과장된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를 만나지 않는다.
술로 맺는 인연이 중요하게 생각된 적도 있지만 그렇게 알게 된 인연은 술이 빠지면 관계가 지속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 관계를 유지하려면 그들과 계속 술을 마셔야 했고 그런 관계는 건강하고 건전한 관계가 아니다.
술과 함께 했던 나의 취미들, 등산, 백패킹, 트레킹…이들과 헤어져야 나는 술을 그만 마실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