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은 간단해. 동시에 일어서면 죽는 거야.
모니터의 시계가 6시 29분에서 30분으로 바뀌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고했어요.
-내일 봐요.
손을 흔들며 퇴근하는 직원들에게 인사한다. 차례차례 동료들이 퇴근한다. 보통은 3-4년 차 직원들이 정시가 되면 제일 먼저 퇴근하고 1년 차인 막내들이 3-5분 정도 뜸을 들인다. 그 사이, 나는 괜히 인터넷 창의 뉴스 기사를 몇 개 클릭해서 심각한 표정으로 들여다본다. 기사 내용이 정말 궁금해서 클릭한 것은 아니다. 그저 막내들과 퇴근을 놓고 눈치게임을 하는 것일 뿐.
차라리 일이 바쁠 때는 30분 정도 퇴근이 늦어지곤 해서 이럴 필요가 없는데 요즘같이 한가한 때, 나도 칼퇴하고 싶을 때는 이렇게 눈치싸움을 하게 된다. 그냥 다 같이 정시에 일어나 퇴근하면 되지 웬 눈치게임이냐고?
애석하게도 막내들과 내가 귀가하는 방향이 같아서 그렇다.
회사가 있는 빌딩은 지하철역과 지하통로 하나로 연결이 되어있어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나면 보통 역까지 같이 가게 되는데 (따로 가는 게 더 머쓱하다), 문제는 지하철을 타고서는 내가 내리는 역까지 먼저 내리는 이가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내릴 때까지는 영락없이 같이 가게 된다.
사무실을 나서며 귀에 에어팟을 닮은 콩나물(..)을 끼는 순간, 나의 업무 모드도 종료된다. 종일 열심히 굴려 대느라 지끈거리는 머리에게 이제 쉬어도 좋다고 허락을 건네는 순간이다. 집까지 걸리는 시간은 총 30분 정도. 유튜브도 보고 쇼핑몰 구경도 해야지라며 신이 나기 무섭게 엘리베이터 앞에서 동료들을 만나면 어색하게 웃으며 에어팟을 귀에서 뺀다. 아무래도 유튜브는 집에 가서 봐야겠네. 나의 OFF 모드도 다시 ON으로 전환. 퇴근하다 말고 사무실로 다시 복귀하는 느낌이다.
사실 나는 막내들과 퇴근길을 같이 하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사무실에서는 그들과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일이 거의 없으니 이런 기회에 좀 친해질 수 있겠다 싶어 반갑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그 반대 입장을 생각하면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친구들도 나처럼 사무실을 나오는 순간, 이제 좀 쉬면서 집에 가볼까 할 텐데 하필 상사를 만났으니. 윽. 내가 막내일 때를 생각하면 쉽게 답이 나온다. 저 앞에 팀장님의 모습이 보이면 괜히 딴청 피우며 발걸음이 느려지곤 했던 어린 시절의 나. 함께 나란히 걸을 때면 어떤 말을 걸어야 하나 고민했고 팀장님이 건네는 웃기지도 않은 말에 억지웃음을 짓느라 팔자주름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말이다. 내가 얼마나 반갑지 않겠어. 나도 잘 알고 있는 게 문제라면 문제.
그래서 나름대로의 배려랍시고 막내들이 퇴근한 뒤 5분 정도 자리에 앉아 있다가 나왔음에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자꾸만 마주쳤다. 아니면 지하철 역 승강장 앞에서 만났다. 일찍 나가지 않았냐고 하니 화장실을 다녀왔단다. 아니면 약속이 있어 화장 좀 고치고 왔다고… 애들아, 내가 미처 거기까진 계산하지 못했구나. 그렇게 마주치면 뭐 어쩔 수 없다.
어색한 퇴근길을 함께 해야지 뭐.
처음엔 내가 말을 안 거는 게 차라리 나을까 싶어 말을 안 하고 핸드폰만 봤더니 오히려 막내가 나한테 무슨 말을 걸어야 하나 고민하는 게 느껴졌고. 그래서 내가 시답지 않은 말이라도 붙여 봤더니 대꾸하기가 애매했는지 더 어색해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기 바쁜 만원 지하철에서 진지한 얘길 할 수도 없지 않은가 (하고 싶지도 않고). 함께 가는 30분이 3시간 같았다. 그러니까 막내들만 힘든 것이 아니라 나 역시 힘들었다. 일할 때보다 더 기 빨리는 그 기분. 몇 번 그런 일이 있어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우리는 함께 퇴근해서는 안 되는 사이라는 것이.
오늘은 불금인 만큼 정시 퇴근을 앞두고 있다. 눈치게임에서 꼭 승리해야지.
우리 모두의 상큼한 퇴근길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