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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 Mar 12. 2021

퇴사 통보하는 나를 울린 한 마디

그만두는거 억울하지 않아?


며칠 전, 회사를 그만두겠노라 통보했다. 그동안 주기적으로 퇴사 욕구가 찾아왔지만 이렇게 실행에 옮기는 일은 드물었다. 몸도 정신도 힘들어질 때가 종종 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일이고 잘하는 일이니까. 게다가 벌써 8년째 다니는 회사다. 따지고 보면 지금 우리 집보다 익숙한 일이고 사람들이기에 이곳을 그만두는 것은 여간 염두 나지 않는 일이다.

 

버티고 버티다 결정한 일이었다. 그동안 팀 내외적으로 업무 분배에 문제가 많았다. 프로젝트 담당자를 정하는 데 있어서 눈치만 보고 있는 게 싫어서 '제가 할게요.'를 버릇처럼 내뱉었고 그 결과, 나는 늘 다른 이들의 곱절은 되는 프로젝트를 굴리게 되었다. 처음엔 할 수 있는 사람이 더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마음이었다. 내가 먼저 ‘배려’하면 다들 그럴 거라고 쉽게 생각했다. 이걸 당연하게 여길 줄은 몰랐지. 

그 결과, 누군가는 휴가 일정이 있어서 프로젝트를 못 맡겠다고 하고 나는 휴가를 반납해가며 프로젝트를 맡아야 했다. 빨리 알아챘어야 했는데. 그래 봤자 호구1이 될 뿐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더 이상 이렇게 일할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있다가도 눈물이 흘러나왔고 고질병인 역류성 식도염이 도졌다. 여기까진 뭐 직장인이라면 겪는 흔한 증상이니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 또한 흘러가리라. 월급만 생각하자고. 

그러다 새벽에 호흡 곤란을 느끼며 잠에서 깬 어느 날, 그제야 스스로에게 무심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테이블을 두고 마주한 대표님께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이 순간을 상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낯선 문장이어서 그런가 텀이 길어졌다. 

-무슨 말을 하려고 뜸을 들여? 

-저 그만두겠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그만두겠다 내뱉었다. 퇴사를 미끼로 흥정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가타부타 말을 얹고 싶지 않았다. 뭐랄까. 자포자기의 심정이었고 대책 없이 쉬어야 하는 것도 이제는 나쁘지 않게 여겨졌다. 


대표님은 그래도 이유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냐 하시기에 가감 없이 말씀드렸다. 솔직히 대표님이 모르고 계셨을 리 없었다. 역시나 알고 계셨다고 했고 그 부분에 대해서 이미 영업팀에도 얘기를 꺼냈었다 하셨다. 예상은 했지만 그럼 더 문제였다. 윗선에서도 알고 있었지만 바뀐 게 없었다는 것은 개선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단 거니까. 그런데 대표님은 내 퇴사의 이유가 '고작' 이거였어? 싶은 눈치였다. 회사에서 짬밥깨나 먹었다는 놈이 저 이유로 그만둔다고? 갑자기 대표님의 말투에 화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안개, 너는 이걸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어? 

이 말은 굉장히 공격적으로 느껴짐과 동시에, 솔직히 나의 정곡을 찔렀다. 업무 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데 있어 가장 문제는 나의 직속 상사였다. 그분이 1을 하지 않고 나는 3을 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분과 직접 이야기를 나눴어야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이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고 해서 바뀔 거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같이 오래 일한 만큼 나는 그분을 잘 알고 있었다. 바뀌지 않을 거다. 

그리고 회사에서도 알고 있었지만 바로 잡지 않았으면서 나에게 따져 묻는 게 웃겼다. 왜 그랬는지 빤히 보이는데. 내가 그분보다 일처리가 빠르고 일 욕심이 많은 걸 이용했지 않은가.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회사 입장에서는 더 효율적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 나를 갈아 만든 효율을 누리기 위해 묵인하고 있었던 거다.

그래 놓고 나를 탓한다니?


-알고 계셨으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거랑 같은 이유죠. 제가 노력해도 안 바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만두겠다는 거고요. 저에게 화내실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체념한 듯한 말투에 진짜로 그만둘지도 모르겠다 생각하신 걸까? 대표님의 눈빛과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근데 억울하지 않니? 이 일 좋아하잖아. 


아뿔싸. 눈물 버튼이 눌렸다.



이 한 마디였다. 그저 이 한 마디에 무장해제된 느낌이랄까. 맞다. 나는 너무 억울했다. 내가 뭘 잘못해서 그만둬야 하나. 일을 열심히 한 것 밖에 없는데... 눈물이 퐁퐁 솟아났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하염없이 쏟아져 나오는 눈물은 마스크 속으로 타고 들어가서 입술까지 스며들었다. 그 와중에 참 짰다. 

몇 분 동안 그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쉴 새 없이 휴지로 눈물을 찍어내는 꼴을 대표님은 가만히 지켜보셨다. 


젠장. 분하고 짜증 났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만두자 정말 어렵게 다잡은 마음이었는데. 기어이 가둬 놓았던 억울함이 억울하지 않냐는 물음에 펑하고 터져버렸다. 그동안 회사 생활하면서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인적이 있었나.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두 번 있었나 싶은 일이다. 연차가 쌓일수록 강해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는데 하필 이런 자리에서 치부를 들키다니. 나도 놀랐다. 내가 이만큼이나 이 일에 애정이 있었구나 싶어서.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고 해야 하나 그냥 없던 일로 해버릴까. 한바탕 울고 나니 속은 시원한데 내 마음은 더 헷갈렸다. 


아마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는 나를 대표님은 알아차리신 것 같다. 

-그만두겠단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자. 오늘 말 나온 것들은 개선할 수 있게 노력할 거고. 


나는 결국 그만두지 못했다. 아직은 잘한 결정인지 잘 모르겠다. 예상한 대로다. 바뀐 것은 없다. 여전히 나의 상사는 1을 하는 동안 나는 3을 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만 써놓으면 '역시 호구..ㅉㅉ' 소리 들을까 봐 노파심에 덧붙인다. 나 역시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 자. 낳. 괴 한 마리일 뿐. 회사에서 내어준 당근책에 흔들렸다. '나를 몰라주는 건 아니구나.' 하는 정도의 위안은 되었다. 


그래서 오늘도 출근을 했고. 그나마 내일이 토요일이라 다행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쩐지 쓰고 보니 뭔가 내가 더 초라해지는 것 같지만...(언젠 안 그랬나)

오랜만에 찾아온 격동의 시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넘겼다고 얘기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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