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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 Mar 08. 2022

계획형 인간의 무계획 퇴사

저도 제가 이럴 줄은 몰랐는데요


"저 퇴사하기로 했어요."

쭈뼛거리며 주변인들에게 퇴사 소식을 알리고 나면 대부분 두 문장이 따라붙었다. 축하해! 그럼 앞으로 뭐할 거야?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는 어서 거창하고 있어 보이는 계획을 내놓으라고 재촉한다.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잘 다니던 회사를 관두나 싶을 테니까. 당연히 궁금할 거다. 왜냐면 나도 앞으로 내가 뭐할지 궁금하거든.




나도 내가 이렇게 퇴사할 줄은 몰랐다.

나는 기본적으로 계획형 인간이다. 요즘 핫한 MBTI를 예로 들자면, 파워 J 인간이다. 개인을 하나의 유형으로 특징짓는 것은 어렵다 생각하고 실제로 테스트를 할 때마다 다른 유형이 나오기도 하지만 J는 절대 불변이다.

J는 판단형으로 계획을 세워 목표를 이룰 때 성취감이 크고 예상치 못한 상황을 싫어한다. 나 역시 무척이나 그러하다. 꼼꼼하게 시, 분 단위로 하루 계획을 세워두고 행하는 편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해야 할 일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있고 이를 해치워가면서 하루를 보내는 편이다. 업무는 무조건 마감일 전에! 5일이 주어졌다면 가능한 3일 안에 끝내고 4일째는 마무리를 한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뒀다가 몰아서 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저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다.


간혹 다른 유형이 나오기도 합니다만... 이렇다네요


그만큼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고 변수가 일어나는 것은 나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이며 가장 취약한 점으로 작용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불안을 생각한다. ..  정확하게는 최악을 생각하는  같다. 변수가 될만한 ( 좋은 쪽으로) 미리 준비해, 변수로 작용하는 것을 차단해두는 것이다. 한마디로 선수 치는 !  

나의 아주 별로인 점 중 하나인데 확신이 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안되면 어떻게 하지?' 이 질문을 스스로 질릴 때까지 한다. 안다. 아주 사람 돌아버리게 한다. 그래서 B 안을 준비하고 간혹 B-1, B-2까지 만만의 대비를 해두기도 한다. 정신이 피폐해지고 몸이 피곤한 것 빼고는 나름 괜찮은? 대응방법이다.



계획, 또 계획, 계획만이 살 길 @pixabay



이러니... 나 같은 인간이 퇴사를 한다고 하면, 당연히 잘 짜인 퇴사 후 계획이 있어야 마땅하다. 퇴사야 말로 내가 예상하지 못한 불안이 사방에서 몰려올 것이 자명하니까. 

그런데 나조차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계획이 없다. 그저 더 이상 회사를 위해 살지 않겠다 다짐했고 또 쉬고 싶었으며 마음껏 방황하고 싶었을 뿐이다. 당장 이직 계획도 없다.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의 영역을 먼저 만들어보고 싶다는 다소 낭만적인 꿈을 꾸고 있다. 그 영역이 어디까지일지도 알지 못하며 방식도 정해두지 않았다.




도대체,

계획형 인간이 어떻게 이런 무계획 퇴사를 할 수 있냐고?

답은 단순하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까!

다른   몰라도 이것만은 명확하게 알고 있기에 결심할  있었다. 살아보니까 그렇더라고.  인생의 변곡점은 내가 계획한 대로 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웠던 병환과 죽음도 20대의 나이에 결코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었고(아버지 역시 그랬겠지)  회사를 그만둔 것도 예상보다 3개월 정도 빨랐다. 심지어 계획했던 업계로의 이직이 확정되고 출근을 일주일 앞두었을 때, 생각도 안 해본 직무를 제안한 회사에 덜컥 입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8년을 일했다. 또, 내가 책을 내겠다고 미리 계획해 두었을까? 버킷리스트에나 끄적여둔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렇게 내 인생은 어쩌다 보니 생긴 일들 투성이더라고. 간절히 원했건 또 원하지 않았건 말이다.


퇴사를 고민하던 시점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퇴사 후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계획이 선명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 큰 불안이겠지만... 반대로 이것저것  도전하다 보면 미처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인생이 흘러갈 수 있지 않을까?


지금껏 인생은 결코 계획대로 되지 않았지만 새로운 도전 없이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드라마판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비록 고생은 했으나 당시의 이야기를 가지고 글을 쓸 수 있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작사가 공부를 했던 것도 그렇다. 돈은 돈대로 쓰고 작사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 걸 어려워했지만 공개된 플랫폼에 글을 올렸기 때문에 책을 출간할 수 있었고 글 쓰는 일을 이어갈 수 있었다. 결국, 그 경험들은 지금 나에게 퇴사할 용기가 되어 주었다.


이게 바로 실패가 익숙한 내가 도전을 좋아할 수 있었던 이유다. 도전은 새로운 기회를 가지고 온다는 걸 충분히 경험했으니까. 이걸 믿고 계획형 인간은 무계획 퇴사를 실행하기로 했다. 

계획이 없는 것이 어쩌면 계획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당분간, 아니 어쩌면 오랫동안 내 삶이 조금 느려지거나 어지러워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 또한 즐겨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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