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제가 이럴 줄은 몰랐는데요
"저 퇴사하기로 했어요."
쭈뼛거리며 주변인들에게 퇴사 소식을 알리고 나면 대부분 두 문장이 따라붙었다. 축하해! 그럼 앞으로 뭐할 거야?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는 어서 거창하고 있어 보이는 계획을 내놓으라고 재촉한다.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잘 다니던 회사를 관두나 싶을 테니까. 당연히 궁금할 거다. 왜냐면 나도 앞으로 내가 뭐할지 궁금하거든.
나는 기본적으로 계획형 인간이다. 요즘 핫한 MBTI를 예로 들자면, 파워 J 인간이다. 개인을 하나의 유형으로 특징짓는 것은 어렵다 생각하고 실제로 테스트를 할 때마다 다른 유형이 나오기도 하지만 J는 절대 불변이다.
J는 판단형으로 계획을 세워 목표를 이룰 때 성취감이 크고 예상치 못한 상황을 싫어한다. 나 역시 무척이나 그러하다. 꼼꼼하게 시, 분 단위로 하루 계획을 세워두고 행하는 편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해야 할 일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있고 이를 해치워가면서 하루를 보내는 편이다. 업무는 무조건 마감일 전에! 5일이 주어졌다면 가능한 3일 안에 끝내고 4일째는 마무리를 한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뒀다가 몰아서 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저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다.
그만큼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고 변수가 일어나는 것은 나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이며 가장 취약한 점으로 작용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불안을 생각한다. 음.. 더 정확하게는 최악을 생각하는 것 같다. 변수가 될만한 것(안 좋은 쪽으로)을 미리 준비해, 변수로 작용하는 것을 차단해두는 것이다. 한마디로 선수 치는 것!
나의 아주 별로인 점 중 하나인데 확신이 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안되면 어떻게 하지?' 이 질문을 스스로 질릴 때까지 한다. 안다. 아주 사람 돌아버리게 한다. 그래서 B 안을 준비하고 간혹 B-1, B-2까지 만만의 대비를 해두기도 한다. 정신이 피폐해지고 몸이 피곤한 것 빼고는 나름 괜찮은? 대응방법이다.
이러니... 나 같은 인간이 퇴사를 한다고 하면, 당연히 잘 짜인 퇴사 후 계획이 있어야 마땅하다. 퇴사야 말로 내가 예상하지 못한 불안이 사방에서 몰려올 것이 자명하니까.
그런데 나조차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계획이 없다. 그저 더 이상 회사를 위해 살지 않겠다 다짐했고 또 쉬고 싶었으며 마음껏 방황하고 싶었을 뿐이다. 당장 이직 계획도 없다.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의 영역을 먼저 만들어보고 싶다는 다소 낭만적인 꿈을 꾸고 있다. 그 영역이 어디까지일지도 알지 못하며 방식도 정해두지 않았다.
답은 단순하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까!
다른 건 잘 몰라도 이것만은 명확하게 알고 있기에 결심할 수 있었다. 살아보니까 그렇더라고. 내 인생의 변곡점은 내가 계획한 대로 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웠던 병환과 죽음도 20대의 나이에 결코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었고(아버지 역시 그랬겠지) 첫 회사를 그만둔 것도 예상보다 3개월 정도 빨랐다. 심지어 계획했던 업계로의 이직이 확정되고 출근을 일주일 앞두었을 때, 생각도 안 해본 직무를 제안한 회사에 덜컥 입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8년을 일했다. 또, 내가 책을 내겠다고 미리 계획해 두었을까? 버킷리스트에나 끄적여둔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렇게 내 인생은 어쩌다 보니 생긴 일들 투성이더라고. 간절히 원했건 또 원하지 않았건 말이다.
퇴사를 고민하던 시점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퇴사 후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계획이 선명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 큰 불안이겠지만... 반대로 이것저것 도전하다 보면 미처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인생이 흘러갈 수 있지 않을까?
지금껏 인생은 결코 계획대로 되지 않았지만 새로운 도전 없이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드라마판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비록 고생은 했으나 당시의 이야기를 가지고 글을 쓸 수 있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작사가 공부를 했던 것도 그렇다. 돈은 돈대로 쓰고 작사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 걸 어려워했지만 공개된 플랫폼에 글을 올렸기 때문에 책을 출간할 수 있었고 글 쓰는 일을 이어갈 수 있었다. 결국, 그 경험들은 지금 나에게 퇴사할 용기가 되어 주었다.
이게 바로 실패가 익숙한 내가 도전을 좋아할 수 있었던 이유다. 도전은 새로운 기회를 가지고 온다는 걸 충분히 경험했으니까. 이걸 믿고 계획형 인간은 무계획 퇴사를 실행하기로 했다.
계획이 없는 것이 어쩌면 계획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당분간, 아니 어쩌면 오랫동안 내 삶이 조금 느려지거나 어지러워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 또한 즐겨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