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가지 감정들의 향연
마지막 출근날은 조금 애매한 감정으로 시작했다. 일단 눈을 뜨자마자 엄청나게 신이 날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가 않아 김이 샜다. 몇 달 간의 재택근무 중 사무실 출근이어서 그런지 비몽사몽 한 상태로 잠에서 깨, 출근 준비하기 바빴다. 그러니 마지막 출근길에 대한 감상 따위는 할 틈이 없었고. 그냥 좀 관대해지기는 하더라. 출근시간의 지옥철 안, 눈치 싸움에서 실패해 자리에 앉지 못해도 괜찮았다. 이 짓도 이제 끝이겠구나 싶어서 오늘은 그냥 서서 가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중심을 잡고 섰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날, 지하철 안은 너무 더워 땀이 났다. 본래 겨울철 지하철(출퇴근 한정)은 기온만큼 옷을 갖춰 입으면 안 된다. 한파에도 빵빵한 히터와 가족보다 밀접하게 붙어있는 사람들 덕분에 땀이 날 정도로 덥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되었는데 방심했다. 서서 가는 것은 괜찮았는데 출근길부터 목 뒤를 타고 흐르는 땀줄기는 별로였다. 마지막 모습은 좀 괜찮아야 하지 않겠나 싶어 똥손으로 드라이까지 했는데 망했지 뭐.
이리저리 사람들 틈에서 밀려 떠다니기를 수차례, 지옥철에서 드디어 빠져나오는 순간... 너그럽기는 개뿔, 역시 지옥철은 답이 없다는 것을 되새겼다.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에 다다라서는 시답지 않은 것들을 떠올렸다. 우리 회사는 규모에 비해 과분한 빌딩의 세입자였다. 자력으로는 절대 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대표님 인맥으로 좋은 조건에 들어왔다. 과분하든 어쨌든 직장인 입장에서 회사가 서울 중심부, 지하철 역과 연결된 대형 오피스빌딩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펴지 않고 지하철을 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고 곧 잠들 것만 같은 나른한 오후, 사무실에서 사이렌 오더로 주문하고 1층에서 받아오는 스타벅스 커피는 소소한 행복이었다.
온전히 직장인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감사함이고 행복이지 않았을까?
퇴사를 한다는 건 이런 감정들과도 작별하는 것이란 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깨달았다.
1등으로 도착해 텅 빈 사무실을 보니까 이렇게 넓었나 싶었다. 늘 좁아터졌다고 불평만 하기 바빴는데 아무도 없는 사무실은 이렇게나 컸다. 특히 내 자리는 고개만 옆으로 돌리면 꽤 괜찮은 전망이 펼쳐졌다. 미세먼지가 없는 날이면 저 멀리 산도 보이고 빌딩과 구옥들이 어울려있는 시티 플러스 마운틴뷰랄까? 타자 소리만 타닥타닥 들리는 숨 막히는 일과 중에 한 번씩 바라보는 통창은 직접 나가지는 못해도 숨통을 트여주고는 했는데...
새삼 내 자리 꿀 자리였다 싶어서 누구 주기 아깝더라.
이런 생각을 하고는 너무 쫌생이 같아서 흠칫했지만 솔직한 심정이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J 차장이 내 자리를 노리고 있다 들었는데... 음, 아까워. 비워주기 싫었다. 왜 위인 생가에 가보면 책상 보존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내 자리도 보존해주면 안 될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시부렸다.
본래 우리 팀과 대표님만 출근하는 날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인수인계나 절차상 필요한 인원만 나오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옆팀 동료들이 대부분 출근을 해주었다. 무려 나의 마지막을 배웅해주기 위해서!(... 아련) 나는 안다.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집에서 편하게 출근 5분 전에 일어나 화상 회의만 참석하면 되는 것을, 나 때문에 일어나 씻고 화장하고 옷 입고 지옥철을 타고 출근을 했다.
심지어 휴가 중인 동료도 선물을 사들고 들러주었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내가 뭐라고 이런 황송한 마지막을 선사해주는 것인지.
팀 동료들과는 오전에 티타임을 가졌고, 옆팀 동료들을 회사 뒤 카페로 모셨다.
다들 나의 퇴사가 갑작스러웠다 했다. 언젠가는 올 일이라 생각했지만 재택 중에 그런 소식을 접해 놀랐다고. 내가 고마웠던 것은 나가서 어떻게 할 건지를 묻기보다 축하를 먼저 건네줬다는 것이다. 하나같이 잘됐다 해주었는데 그 진심이 진득하니 와닿아 자주 눈시울이 붉어졌고 결국엔 눈물을 흘렸다. 또르륵.
회사를 그만두면서 가장 아쉬운 것 역시, 이들과의 헤어짐이었다. 진짜로 이들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잘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특히 지금 있는 동료들은 모두 3년 이상 함께 일한 사람들이다. 내가 더 열심히 할 수 있었고 잘할 수 있던 건 동료들 덕분이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고. 이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는데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살면서 안 볼 사람들이라 생각지 않는다. 이 감사한 마음, 차차 갚아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른 퇴근을 하고 남편과 만나, 대낮부터 회사 근처 맛집들을 하나씩 부셨다. 줄 서서 먹는 맛집들을 남들 퇴근 전에 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때서야 좀 실감이 났다. 나 퇴사했구나! 이제 직장인이 아니구나. 그동안 고민이 너무 많았으니 오늘만은 아무 생각 없이 부어라 마셔라 해야겠다 싶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송별회도 못했지만 남편과 둘이 하는 자발적 송별회도 썩 괜찮았다.
집에 돌아와 어두컴컴한 방구석에서 동료들이 써준 카드를 하나씩 읽었다. 알코올에 절여진 감수성이 예민했는지 한 문장이 나를 또 울려버렸다.
‘같이 일하는 5년 동안 일을 사랑하는 팀장님을 보고 많이 배웠어요.’ 라는 한 문장. 이 말이 기어코 나를 울렸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가슴에 남을 것 같다. 이 회사에서 일했던 8년이 이 문장 하나로 완성되는 것 같았다.
맞다. 나는 그동안 일을 참 사랑했고 진심으로 일했다. 그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뿌듯하고 기뻐 복받치더라.
앞으로 내가 어디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 아직은 모르지만 이 마음 하나만은 꼭 변치 않아야겠다. 언제까지나 이런 사람으로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마지막 출근날의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