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라(Anora) – 션 베이커
행복을 바란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부여될 수 있는 권리다. 다시 말해서 행복 추구권이란 보편적 권리다. 고대 서양 철학에서의 행복의 의미는 인생의 목표이자 좋은 삶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래된 교훈에 따르면 사람은 행복(이때의 행복은 지금의 의미와 다르지만) 하기 위해 산다. 모든 것은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언가를 위해 산다’라는 문장에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기 힘들다(불가능하진 않지만). 사랑을 위해 산다는 말은 어떤가. 너무나 엄숙한 나머지 누군가에겐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가치를 위에 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동의할만한 전제일까? 플라톤의 『향연』에 따르면 옛날에 인간은 양성을 동시에 지녔고, 신이 이를 반쪽으로 분리해서 그때부터 서로 반쪽을 찾으려고 헤멨다고 한다. 밀란 쿤데라는 이를 두고 사랑이란, 우리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욕망이라 정의한다. 때문에 우리의 사랑이 좌절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발버둥 칠지도 모른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우리 모두가 바랄 수 있는 것이 행복이고 사랑이라면, 그에 대한 단절은 얼마나 잔인한 구조일까?
영화 <아노라>의 구조는 흥미롭다. 초반에는 주인공인 애니의 인생이 한 남자로 인해 크게 역전하는 상황을 그린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로, 모든 것이 수월하고 모든 것이 희망차다. 다르게 말하자면 영화의 초반 장면들은 직관적인 쾌락의 연속이다. 애니는 뉴욕의 어느 바의 스트리퍼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불리길 원치 않는다. 그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녀는 사람들의 그러한 인식을 거부한다. 영화에서 애니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녀의 직업이 사회적으로 어떤 인식으로 인식되었든 그녀는 그 직업에 충실한 사람이다. 어느 날 그녀는 이반 반야라는 러시아 재벌 2세를 바에서 만나 그와 정기적으로 만나게 된다. 반야는 돈이 넘쳐났고, 그녀는 그에게서 돈을 받고 서비스를 한다. 하다못해 반야의 제안으로 그녀는 일주일 동안 그의 여자친구 역할을 맡는다. 반야의 생활은 호화로움의 극치였다. 마음에 드는 것은 모두 살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라스베가스로 가서 호화로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돈을 원했고 그는 그녀의 육체를 원했다. 한껏 고취된 향락과 도시의 광경 때문이었는지 그들은 즉흥적으로 결혼하게 된다.
반야는 섹스를 마친 후 애니에게 마치 진실된 사랑을 맹세하는 것처럼 침대에서 청혼을 한다. 둘은 이미 발가벗은 상태였고, 청혼은 그들의 정사 후 침대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라스베가스에서 올린 조촐하지만 화려한 결혼식. 그들은 카지노를 정처 없이 뛰어다니며 자신들의 사랑에 대해 심취한다. 하지만 반야가 단순히 자신의 부모를 골탕 먹이기 위한 이 의미 없는 결혼은 반야의 대부인 토로스의 등장으로 점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반야의 부모님의 등장으로 그들의 결혼은 맥없이 막을 내린다.
만약 애니의 사랑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그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가늠할 수 있다면 프로이트의 리비도에 따른 유형 중 성애적 유형에서 애니의 사랑을 비교해볼 만하다. 성애주의자들의 주된 관심은 사랑으로 향해 있다. 이들에게는 사랑하는 것, 특히 사랑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애니는 영화의 초반에서 그저 스트리퍼와 고객의 관계로 반야와의 관계를 정립하지만, 그녀는 반야의 청혼에 의해(그 청혼이 정사 후라는, 다소 당혹스러운 청혼일지라도) 사랑을 꿈꾸게 된다. 사실 애니의 사랑은 낭만적 사랑의 유형과는 사뭇 다른 결을 지닌다. 그녀는 이반과의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 인생역전이라는 낭만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그들의 결혼 근거를 서로의 사랑으로 진술한다.
프로이트가 묘사하는 성애주의자들의 유형에서 애니가 어느 정도로 들어맞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애니의 행동들은 성애주의자들과 동일하게도 사랑받는 것을 중요시 여기고, 늘 사랑을 잃지 않을까 불안해한다. 특히나 사랑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강한 의존성을 보이는데, 이는 반야와의 관계에서도 나타나는 의존성이었다. 반야는 애니와의 관계를 그저 일주일의 기간을 둔 계약 관계의 유형으로 여긴다. 당연하게도 그는 돈이 많고 돈으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다. 반야는 그저 애니의 몸에서 성적 쾌락을 느끼기 위해(그가 그녀와 하는 섹스 동안 격렬하고 빠르게만 했던 것을 떠올려보자) 그녀와 관계를 이어나간다. 하지만 애니에게는 그 청혼의 의미가 반야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녀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돈이라는 이유로 그와 섹스를 하고(그중에도 쾌락이 있었겠지만) 반야와의 호화로운 생활에 쾌락을 느끼며 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애니는 반야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의 청혼으로 인해 그녀는 직업을 그만두고 반야의 아내로 살기로 결정한다. 그녀의 삶은 반야의 부유한 삶처럼 여러 선택이 존재하는 삶이 아니다. 반야에 비해 애니는 더욱 실존적으로 결혼이라는 관계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쾌락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그 둘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을지 모르지만 애니에게는 그 쾌락의 의미가 양가적으로 드러난다. 그녀의 쾌락의 무게는 반야의 쾌락의 무게와는 전혀 다른 수치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반야의 부모님이 등장하는 파트부터 애니는 반야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부모님에게 설명하라고 애원하지만, 그는 애니와의 관계를 단순한 계약의 관계라 단언한다. 그는 술에 취한 채로, 혹은 섹스에 취한 채로 애니에게 사랑을 약속했지만, 정작 맨정신(그마저도 숙취 상태였지만)에선 그녀와의 관계를 단순히 돈으로 매매한 관계 정도로 끊어버린다. 애니는 라스베가스로 결혼을 취소하러 가는 비행기 안에서 반야에게 분노를 표출한다. 그들의 가족에게까지도 분노를 표출하지만, 그녀는 사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애니에게 사과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들은 반야의 어머니는 더러운 창녀에게 사과할 이유는 없다고 대답하기까지 한다. 애니는 자신을 창녀라고 말하는 것에 모욕감을 느낀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그 말의 의미가 자신의 존재를 비참하게 만드는 말임을 알고 있다. 토로스에게 창녀라는 말을 듣고 분노했던 그녀의 모습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녀는 사회적으로도 그러한 경멸의 의미를 받아야 하는 무력한 존재였다. 애니가 반야의 가족들에게 모욕적인 말을 한다고 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그녀는 그토록 무력하게, 단 며칠 만에 자신의 사랑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애니의 직업이 스트리퍼라는 점에서 두 가지의 양상이 그려질 수 있다. 스트리퍼는 사회적으로 그리 우호적인 시선을 받는 직업은 아니다. 자신의 신체, 성이라는 것을 돈으로 사고 판다는 행위에 대해 우리는 일종의 거부감을 느낀다. 성이 소중한 가치라기보다는 성을 존엄성의 최후의 보루 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성 노동자들의 극단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들의 인간 존엄성의 최후의 보루를 최후의 자본으로 활용한다는 점은 비극적인 상황이다. 애니 또한 그리 순탄한 가정 속에서 태어난 인물은 아니다. 어린 나이에 집세와 언니를 돌보기 위해 일을 해야만 했고, 그녀가 단기간에 그러한 비용을 부담하기 위해선 스트리퍼가 가장 최선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비하하고 존엄성을 판다는 행위 자체에 경멸을 느낀다. 애니가 받은 경멸의 의미는 그녀가 반야의 가족에게까지 받았던 경멸과 모멸까지 이어진다. 사실상 애니는 영화의 마지막까지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던 연약한 존재다.
영화에선 그렇다고 스트리퍼를 노골적으로 동정하는 시선은 찾아볼 수 없다. 애니가 스트리퍼라는 의미는 스트리퍼라는 직업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애니는 오히려 무력한 노동자 혹은 무력한 개인의 대변인에 가깝다. ‘빛’과 ‘밝다’라는 원래의 이름 ‘아노라’를 숨기는 애니는 그러한 무력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토로스의 피고용인인 이고르 또한 아노라와 비슷한 부류로 그려진다. 이고르는 단순히 보디가드의 측면에서 고용된 자다. 그는 애니만큼이나 평범한 위치에 있는 남자다. 애니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겁쟁이로 분류되지만,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고르는 애니와 비슷한 부류임에도 무력함을 드러내는 인물은 아니다.
애니는 이고르가 자신을 제압하던 때에 주변에 사람이 없었더라면 자신을 강간했을 것이라 장담한다. 하지만 이고르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 대답한다. 애니가 어째서냐고 묻자 그는 담백하게 말한다. 나는 강간범이 아니니까. 애니의 시선에서 강압적인 남자들이란 바에서 보던 남자들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녀의 세상은 그런 것이다. 이고르는 수호자의 의미를 갖고 있다. 애니는 자신의 반려자이자 의존할 수 있는 인물로 반야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그녀는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녀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켜준 것은 이고르였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눈이 내리는 차 안에서 자신의 결혼반지를 찾아준 이고르를 애니는 유혹하기 시작한다. 영화의 초반에서 어두운 클럽 안에서 남자들을 유혹하던 애니의 몸짓이 그대로 이고르의 차 안에서 재현되었지만, 그 몸짓의 의미는 오히려 비참할 지경의 유혹이었다. 그녀가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춤이나 관능적인 동작들뿐이었다. 이고르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려고 해도 그녀는 그녀의 몸에 있는 것들로만 그러한 표현들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 그러던 중 이고르는 아노라에게 키스한다. 키스를 하자 아노라는 갑자기 이고르를 때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울분을, 폭력을, 자신을 유일하게 지켜준 남자에게만 풀 수밖에 없는 그녀의 주먹질은 갈수록 아련해진다. 결국에 그녀는 이고르의 품 안에서 울기 시작한다. 반야와의 거친 섹스 중에도 조금만 천천히 템포를 맞춰 사랑을 즐기려던 아노라는 모든 것을 잃은 채로, 멸시된 시선 채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지켜준 유일한 남자 안에서 비로소 그녀는 최후의 보루를, 그것도 연약한 폭력적인 형태로 결국에는 폭발시킨다.
자본가들이나 여러 기회가 많은 자를 우리가 분노해야 한다는 의미로 영화를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노라라는 약자에 대해서, 빛이라는 의미가 무색할 정도로 그 흔한 사랑 하나 제대로 해보지 못한 아노라라는 인물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단절의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억제된 자아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 주변에는 극히 드물지만 자아를 억제할 필요도 없는 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고 우리 삶에 대한 여러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결국에 아련하고 무력했던 사랑을 찾아 헤맸던 아노라에게 있어서 사랑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아노라에게는 우리의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고통과도 결부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