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의 아우라와 미적 주목 (1)

발터 벤야민의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중심으로

by 김지민




들어가며


본 칼럼은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Aura의 붕괴를 중심으로, 기술적 복제가 예술의 본질과 감상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현대의 영화를 보는 방식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아우라의 의미에 대해 탐구해 보고자 한다. 아이맥스나 스크린X, 돌비 시네마 등 여러 영화관들에서 영화를 본다는 의미에 대해서 우리는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붕괴라기 보다는 새로운 아우라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칼럼은 전반적으로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다뤄 볼 것이다. 하지만 들어가기에 앞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자 벤야민의 논문에서 필수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개념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다루기로 한다.


이 칼럼이 어떤 학술적인 관점에서 심도 있게 영화와 미학을 다루지 않는다는 점을 미리 당부한다. 그만큼 이 글은 지극히 일반적인 관점에서 서술되었으며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벤야민의 아우라


예술 작품의 진본성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복제 기술이 발달한다면 예술 작품의 의미는 사라지는 것인가. 탁월한 미술작품이나 뛰어난 배우의 연기를 감상할 때, 우리는 종종 이를 ‘아우라가 느껴진다’라고 표현한다. 이 아우라Aura라는 개념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자. 우리는 어떤 것에 아우라를 느끼는가? 아우라란 무엇인가?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유일무이함, 그 장소, 현재 ‘여기 있음’에 대해 권위를 갖는 예술 작품에 대해 우리는 아우라를 느낀다. 어떤 영혼적인 에너지, 후광, 그리스어로는 숨[αύρα]을 의미하는 뜻에서 파생된 아우라는 우리가 흔히 원작에 대해 느끼는 경외심과 같은 감상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이러한 아우라가 붕괴에 이르렀다는 주장을 한다. 현대에서도 심심치 않게 사용되는 아우라는 어떻게 붕괴된 것인가? 아우라는 여전히 유효한 개념이 아닌가? 하지만 벤야민은 복제 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진과 영화의 등장으로 기존에 전통적 예술에서의 아우라는 유효하지 않고 예술의 제의적 가치가 상실되었음을 면밀하게 분석한다. 그가 말하는 아우라의 붕괴는 부정적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예술이 대중화될 수 있는 점에서 기술적 복제에 관해 서술하고 예술의 함의에 대해 제언한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글에서 기술의 발달로 인한 기술적 복제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 번째는 “기술적 복제는 원작에 대해, 수공적 복제보다 훨씬 높은 자립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진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시각과 보지 못한 새로운 관점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장면들은 특수한 기법으로 카메라는 담아낼 수 있다. 슬로우모션이나 여러 촬영 기법들은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보다 극적으로 혹은 미적으로 다른 시각들을 제공하고 있다. 다음으로 두 번째는 “원작의 모상을 원작 자체로서는 도달될 수 없는 상황 속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점이다. 복제가 가능해지면서 우리는 집 안으로 베토벤을 초청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살바도르 달리나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거실 텔레비전에 전시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이러한 지각 매체의 변화는 사회적으로 큰 변화였다.


예술작품은 이제는 소수의 전유물로만 향유되지 않는다. 기술적 복제는 예술작품을 관객의 눈앞으로 가져다주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바로 복제라는 말의 의미에 있다. 복제는 일회적이지 않고 다량으로 생산이 가능함을 내포한다. 일회성은 전통적 예술작품에서 아우라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하지만 사진의 등장으로 이 일회성은 결국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했다. 사진에는 원작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모두 사진을 가지면, 그 원작을 가지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사진이라는 개념에서 파생된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 등도 동일한 효과를 갖는다.


예술작품은 크게 두 가지의 가치를 지닌다. 하나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가지는 제의적 가치이며, 하나는 보여지기 위한 것의 의미인 전시적 가치이다. 어떤 종교적 의미에서 예전 예술작품은 신성한 의미를 지녔다. 전시하는 것에 의미가 아닌, 신에게 바치는 의미로 그 예술작품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제사장이나 사제들에 의해서만 접근되었던 예술작품은 그 제의적 의미에서 벗어나 전시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나아갔다. 신전에 고정되어 있는 신상보다는 옮길 수 있는 흉상은 신상보다 전시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예술작품의 전시적 가능성은 비약적으로 커졌다. 박물관에 미술품들을 전시하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굳이 박물관에 가지 않아도 예술작품은 곳곳에서 전시된다. 하지만 벤야민은 제의적 가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제의적 가치의 최후의 보루는 바로 사람의 얼굴이다. 고인의 얼굴이 찍힌 사진에 대해 우리는 단순한 복제품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아우라를 가진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존재 자체만으로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여전히 전시적 가치의 비약은 부정될 수 없다. 사진의 등장과 더불어서 영화의 등장은 제의적 가치의 상실, 아우라의 붕괴를 이끌며 예술의 새로운 기능들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의 예술(벤야민의 시대 기준에서)에 대해 우리가 가늠해야 할 부분들을 드러냈다.


정리해보자면, 아우라의 붕괴란 그 예술의 고유적인 가치들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범위가 늘어났고, 새로운 형태의 예술의 등장을 알렸다. 벤야민의 관점에서 영화는 제의적 가치가 아닌 순수한 전시적 가치의 형태의 예술이다. 배우의 연기는 무대에서와는 다르게 관객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고 카메라를 통해서 전달된다. 관객과 호흡을 맞출 필요 없이 배우는 순수히 그 감정 자체에 몰입한다.


그리고 그 감정은 기계 장치를 통해 온전히 관객의 앞에 전시된다. 물론 이러한 위화감은 사뭇 배우를 수단으로서만 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루이지 피란델로는 연극과 영화의 대립에 대해서 서술하며 영화가 배우의 아우라를 박탈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벤야민도 이를 소개하며 배우가 어떤 생산과정의 생산품처럼 소비되는 부분들에 대해서 분석한다. 배우의 고유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연기는 영화 촬영 현장에서 독립적인 지위를 갖지는 않는다.

배우는 카메라 스태프들과 비슷하게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며 결국에 영화가 영화적인 의미의 작품성을 획득하는 순간은 편집이 완성된 순간이다. 하지만 여기서 벤야민의 분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소소한 부분들에서 현대의 우리가 차이를 느낄만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벤야민은 영화가 연극과 달리 배우가 온전히 한 호흡으로 끝까지 극을 끌고 나갈 수는 없고 해당되는 장면마다 그에 따른 연기를 하기 때문에 배역에 몰입하는 정도가 다를 것이라 분석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뛰어난 영화배우들이 보여주는 메소드 연기는 배우들에게 꽤나 심각한 후유증을 안겨줄 때도 있다.


배우 최민식이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몰입한 연쇄살인마의 배역 때문에 일반 사람에게 잠깐이나마 살의를 느꼈던 적이 있다는 경험은 특기할만하다. 영화배우들의 몰입은 벤야민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밀도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잘한 부분들까지 거론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하자. 이러한 부분들을 일일이 거론하는 것이 오히려 벤야민의 견해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하는 꼴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벤야민이 분석한 배우의 아우라 상실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는 내용들에서 벤야민을 발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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