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의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중심으로
아우라의 붕괴에 대해 우리가 어느 정도 동의한다고 해도 우리는 아우라에 대한 의미를 여전히 잃지 못한 것 같다. 복제 기술과 영화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예술을 향유할 수 있으며, 새로운 예술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영화만을 놓고 보아도 우리는 여전히 아우라를 놓지 않았다. 벤야민 또한 글에서 배우의 연기에 대해 분석할 때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몇몇 주장들에 대해선 다소 의아한 것들도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윤곽에서 볼 때 그가 종합적으로 영화와 배우의 연기에서 나오는 아우라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시 피란델로의 비판을 상기해보자. 영화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며 무대와는 다르게 마치 자신의 거울을 보는 듯한 위화감을 얻는다. 그리고 이로 인한 배우의 상품화는 자본주의적 생산 시스템과 같이 적용된다. 배우의 아우라는 연극에서는 유효하지만 카메라 기계 앞에서의 배우는 아우라를 상실했다.
그러한 극복을 위해 영화 스튜디오는 배우를 유명인으로 만들고 그 고유의 아우라를 영화 홍보의 또 다른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 전략이 어떤 부정적인 의미에서 배우가 활용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영화가 기존 전통관에 대한 혁명적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요소다.
때문에 벤야민은 아우라의 붕괴와 배우가 상품으로 전락하는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관객 바로 앞에서 상영되는 것에 더 중요한 의의를 부여한다. 여전히 남아 있는 아우라를 활용해서 벤야민은 영화의 혁명적 비판을 지향한 것이다.
벤야민의 시대에서 묘사된 아우라의 붕괴로 인한 효과들은 대중과 작가의 구분이 무너지고 모두가 필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의 도래를 의미했다. 노동자가 직접 영화에 참여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로 인해 영화가 할 수 있는 혁명적인 기능이란, 이제 소수의 작가나 제작자들의 이야기로만 예술이 향유되는 것이 아닌 노동자의 이야기까지 표현되어 예술이 된다는 점이다.
짐작건대, 벤야민의 관점에서 아우라의 붕괴는 예술의 어떤 숭고한 가치의 붕괴라는 부정적 표현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더 나아가 예술이 할 수 있는 기능들, 사회의 변혁과 혁명적 의미의 예술에 대해서 심도 있는 고찰을 내놓았고 그것은 나름의 시대를 초월한 사유였다.
또한 기존의 전통적 예술에서 벌어진 것보다 훨씬 진보적으로 대중들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벤야민은 언급한다. 영화는 회화보다 더 많은 이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계속해서 관객의 시선에 따라 전개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영화의 접근 가능성 덕분에 대중들은 쉽게 예술에 몰입하고 미적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로운 미적 경험과 진보적인 예술관은 복제 기술의 발전이 큰 영향을 발휘했다는 사실에 빚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사소할 수도 있는 질문을 던져보자. 영화는 또 다른 아우라의 대상이 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벤야민의 시기에선 영화가 혁명적인 기구로 작동했을 테지만 지금 시대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영화가 바뀐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 한 번 고민해볼 만하다. 영화는 촬영기술의 발전과 여러 매체의 발전으로 벤야민의 시대와는 다른 형태로 지금 우리 앞에 있다. 예컨대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극장에서만 영화를 보지 않는다. 테블릿이나 스마트폰으로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영화를 보는 방식은 다양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영화를 작은 화면으로 보고 중간에 멈출 수 있는 시대를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시네필들의 독단적인 고집으로만 해석되는 것일까? 어떤 영화는 무조건 아이맥스로 봐야 한다는 고집이나, 몇몇 영화감독들이 여전히 필름 영화에 집착하는 부분이나 러닝타임에 대한 갑론을박들이 오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영화라는 예술도 벤야민이 말한 기존 전통적 예술의 범주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관련해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발언 중 특기할만한 내용을 확인해보자. 그는 여전히 필름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그는 필름이 우리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주기 때문에 여전히 필름으로 촬영하길 선호한다. 어떠한 생생함의 경험, 관객이 스크린에서 마주할 경험에 대해 고심한 그의 답변은 지극히 아우라의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붕괴를 이끌기보다는 자신의 영화가 아우라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굳이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과 더불어 CG 사용을 지양하는 것은 그의 영화가 획득하는 아우라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놀란의 영화가 다른 영화들과 다른 차이점을 두드러지게 하는 부분은 촬영기술과 각본의 참신함이 있다. 이 요소들이 놀란의 영화에서 아우라를 느낄만한 부분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것, 유일무이함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지 않는가? 물론 이러한 촬영방식은 놀란의 예술적 취향과도 결부될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의 영화를 애정하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부분들이 놀란의 영화만의 아우라를 이룬다는 점에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생각하기에 흥미로운 점은 영화 또한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붕괴를 역행해서 또 다른 아우라를 획득했다는 점이다. 놀란의 영화뿐만이 아니라 여타 다른 영화도 마찬가지로 여러 영화들은 극장이라는 새로운 아우라를 획득했다. 흔히들 극장에서만 봐야 느낄 수 있는 영화 감상에 대해 우스갯소리로 말할 수도 있지만, 정말로 그 감상은 존재하는 듯하다. 더군다나 기술의 편의적인 측면과는 상관없이 크리스토퍼 놀란처럼 필름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벤야민의 아우라는 붕괴된 것이 아니라 그저 기술로 전이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필름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질감과 이미지의 구현들은 여러 매니아들의 취향들을 충족시킨다.
그 취향의 형성은 아우라의 부활과도 같은 맥락에 있다. 핵심적으로는 영화가 주는 사운드와 서사, 장면들은 극장의 스크린을 위해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극장만의 유일무이함을 드러낸다. 음악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술로 인해서 전보다 더 깨끗한 음질로 우리는 음악을 즐길 수 있지만 노이즈가 있는 음악만의 감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더러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들을 두고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가 다시 성행했다고 보기에도 어려운 점이 있을 수 있다.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의 붕괴는 소수가 향유하는 예술의 붕괴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이러한 현상들은 아우라의 획득으로도 볼 수 있지만, 취향의 확장으로도 볼 수 있게 된다. 혹자는 제의적 가치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더 다양한 측면에서의 전시적 가치들이 생산된 것이라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예술 영화라고 부르고 오락 영화라고 구분하는 형태들에 대해선 여전히 아우라의 부활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이 영화만이 시네마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있고 어떤 함의가 있지 않으면 그건 그저 그런 영화라는 식이다. 소설로 비유하자면 순수 문학이라는 장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현대의 새로운 전통주의자들은 영화뿐만 아니라 예술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들에 있어서도 원칙적인 자세를 고수한다. 소설은 이래야 하며, 영화는 이래야 한다. 이런 필수 요건들이 있어야 비로소 예술이 완성된다는 많은 논리들이 있다. OTT가 등장했음에도 여전히 극장을 찾는 관객들은 아우라를 찾으러 떠난다. 이는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는 것과도 비슷한 맥락이지만, 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경험, 아우라를 느낀다는 점에서 제의적 가치를 지닌 신상을 보러 가는 것과 더 유사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오락 영화나 유치한 영화의 의의는 우리의 미적 경험들을 자유롭게 한다는 점에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하지만 영화를 볼 때 엄숙하게 보는 이들은 벤야민이 말한 제의적 가치를 다시 복귀시키고 싶은 욕구가 있는 듯하다. 그에 맞서서 여러 OTT 서비스들이 극장에서 벗어나 전시 가능성을 높이고 있는 것이라면 이는 흥미로운 해석일 수도 있겠다. 더 이상 극장(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것(OTT)이라면 우리는 벤야민이 말한 대로 자유롭게 미적 경험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언급하고 넘어갈 미적 주목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려 한다. 미적 주목이란 벤체 나너이의 『미학』이라는 책에서 빌려온 용어다. 우리가 한 예술 작품을 볼 때 어느 정보나 어느 부분을 주목하면 그 미적 경험은 달라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 우리의 지각은 한정적이어서 총체적으로 작품을 감상하기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때문에 미적 경험은 자유로워야 하며 그 미적 경험은 미적 주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영화를 감상하는 것에 있어서도 어떠한 미적 주목(영화의 배경, 제목의 의미 등)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영화의 미적 경험은 달라진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맥거핀이나 미장센, 여러 요소를 어떻게 주목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는 풍부하게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경험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벤야민의 표현대로라면 아우라의 붕괴일 것이고 기술의 발전도 같이 따라온 결과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그 아우라로 회귀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어떤 영화관에서 봐야 온전히 그 영화를 경험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숙고해볼 필요가 있겠다. 필자는 미적 주목에 대한 나너이의 의견에 대부분은 동의하지만 그 주목에 있어서 자유란 무엇인지에 대해 나너이가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포도주를 마시고도 맥주라고 한다면 자유로운 미적 주목이라 말할 수 있는가? 자유란 그저 상대의 터무니없는 주장에도 동의하는 행위와 다름 없는가? 미적 주목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최소한의 기준점이란 존재한다. 그 기준점이란 당연하게도 아우라가 될 것이다.
결국에는 아우라에 관련해서 우리는 또 다른 제의적 가치를 부활시킬 수 있고, 또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을 적극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극장의 아우라를 마냥 부정적으로 볼 수도 없다. 그 예술 작품의 제작자의 의도가 극장에 있다면, 우리는 미적 경험의 자유와 관계없이 극장에서만 봐야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스마트폰으로 보는 영화와 극장의 영화는 엄연히 구별되며, 극장의 아우라를 고집하는 것은 예술의 독단이라 보기 어렵다. 오히려 자본주의적 독단으로 인해 예술의 접근성을 차단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자문해야 한다. 극장으로 가는 길이 자본주의적 독단으로 인해 멀어진다면 우리는 극장의 아우라를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그 독단의 길을 무너뜨려야 할 것이다. 이제 관객은 몇 가지의 숙고를 남겨놓게 됐다. 극장에서 벌어지는 아우라의 목도, 그 아우라의 발견과 미적 경험의 발현들에 대해 우리는 즐겁게 관람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