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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Feb 14. 2021

만두를 빚다가

오늘의 수다

"너도 이제 음식 하는 걸 좀 배워야 하지 않겠니?"


차분하게 앉아 조물조물 음식 만드는 걸 잘 못하는 엄마와 다르게 나는 제법 만두와 송편을 빚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였던가. 생전 내게 명절 음식 만드는 것을 거들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던 큰아버지께서 이젠 음식 만드는 걸 큰엄마 곁에서 좀 배워두라고 하셨던 게 계기였다.
그랬다. 그전까지 나는 다 만들어진 음식을 먹기만 했다.


시작은 송편이었고, 그다음 명절엔 만두를 빚었다.
우리 집안은 다들 손이 커서 만두도 송편도 전부 왕만 했는데, 만들며 알게 된 사실은 우리 집안이 손이 커서가 아니라 그걸 만드는 오빠들의 손이 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랬다. 우리 집안은 모든 음식을 남자들이 다 했었다. 대단하고 거창한 이유는 없다. 집안에 아들들만 많았기에 그리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송편과 만두를 사촌 오빠들에게 배웠다.  같은 반죽으로 빚어도 손이 작은 내가 만든 게 보기에 예뻤다. 그래서였을까. 다들 감탄 반 놀림 반으로 했던 말이라는 게, "너는 작은엄마 안 닮았네!?"였다.


송편과 만두를 어느 정도 마스터하고 난 후, 나도 여느 여자들처럼 전을 배울 줄 알았다.
사실 큰아버지의 의중도 그러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성인이 되고, 언제 시집을 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이니 집안의 음식을 미리 배워놔야 상대 집안에서 책을 잡히지 않는다는 게 큰아버지의 생각이셨다.  하지만 나는 송편과 만두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큰엄마가 전 반죽 곁으로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었다.
내가 결혼하던 날, "가서 잘 살 거라." 속삭이셨던 큰엄마. 어차피 시집가면 그 집안 문화에 맞게 늙어 죽을 때까지 주야장천 부쳐댈 것들이라며, 벌써부터 이런 것에 손을 대지 말라고 하셨던가. 그래서였을까. 항상 기름을 쓰는 음식은 큰엄마와 새언니 몫이었다.


그 후로 14년 후에야 나는 결혼을 했다.
첫 명절이 추석이어서 맵쌀 가루를 준비해 시부모님 댁에 갔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어머니는 일을 하러 가셨고, 집에는 나와 시아버지 그리고 남편과 시동생이 있었는데, 남자 셋이 송편 반죽 하나를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대충 반죽 치대는 척하던 남편이 시동생과 커피 마신다고 사라지고, 내가 그냥 손을 놓고 있자 마지못해 시아버지께서 반죽을 쳐 주셨던 게 생각난다.
이런 건 여자들이 하는 거라며, 이걸 왜 만들어 먹느냐 하셨던 시아버지.
그 말씀을 들으며 "저희 집안에서는 남자들이 다 하는데요?"라며 꼬박꼬박 말대답하던 새 아가.
반죽을 만들고 안에 넣을 설탕과 깨를 찾으러 주방을 뒤져서 흙설탕인 줄 알고 꺼낸 게 알고 보니 고향의 맛 다시다였던 것도 이제는 소소한 추억이 되었다.

그날, 결혼 후 첫 송편을 만들어 큰아버지께 사진으로 보내드렸다.

결혼을 한 이후로도 나는 전을 부칠 일이 없었다.
평생을 장사하느라 바쁘게 사신 시부모님은 명절 음식을 적당히 사서 드셨었고, 밉상 며느리가 되어 명절 음식을 독차지할법한 시기에는 독하게 연을 끊어 아예 가지 않았으며, 시아버지도 돌아가신 이후에는 남편이 어머니를 도와 음식을 하니 말이다.

명절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음식을 만들어본 기억이 없는 남편은 나를 만나 만두와 송편을 만들어 먹는 재미를 깨달았다. 같이 앉아 만두를 빚으며 나는 내 어릴 적 기억에 빠지고 남편은 새로운 기억에 빠져든다.
그래서 만두의 모양도 제각각이다. 둥근 복주머니 만두를 만들었던 나는 둥근 만두를 만들어야 마음이 좋고, 명절 만두를 사서 먹었던 남편은 백종원 씨가 티브이에서 보여준 주름 만두를 예쁘게 따라 하고 싶어 열심이니 말이다.




먹성 좋은 아들들이 먹성 좋은 아들들만 낳아, 많이 먹는 아들들이 그득그득했던 우리 큰집은 명절이면 음식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물론 그 산처럼 쌓아둔 음식들은 아이들이 오가는 길에 쏠랑쏠랑 집어먹어 게눈감추듯 줄어들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안 꼬마들은 다들 먹성이 좋아, 문중 시제에서도 자손들 먹으라고 남겨두신 음식을 음식 할머니가 적게 주시면 계속 싸워가며 음식을 쟁취했더랬다. 조카들이 배고프다고 우는 통에 할머니께 따져가며 음식 받아다 줬던 게 생각나는 건 왜일까.

아빠가 마지막으로 생사를 헤매시던 즈음, 큰아버지와 큰엄마도 편찮으셨다.
내가 기억하는 두 분의 모습은, 어느 겨울날 두 분이서 택시를 타시고 중앙보훈병원으로 면회를 오셨던 날이 마지막이다. 평생을 아끼고 아껴 한 재산 마련하신 분들이셔서, 택시라는 건 절대 타시는 경우가 없으셨지만 그날은 예외였다. 중증 치매에 걸리신 큰엄마와 함께 오시려면 그 방법뿐이었던 듯하다.
내 얼굴을 만지시며 "아이고 새댁 참 예쁘네요."라고 하시던 큰엄마는, 그날 아빠를 보시곤 "삼촌 오래 살아요. 아프지 말아요."라고 하셨던가.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각각 어느 요양병원으로 들어가셨다고 한다. 오빠들과는 연이 끊겼고, 어쩌다 한 번씩 내게 걱정하지 말라며 연락을 주시는 큰아버지의 마지막 전화 내용이 그러했으니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큰아버지가 계신 곳을 알면 당장에라도 찾아갈 성미의 엄마인지라, 늘 큰아빠의 당부는 너희 엄마에게 알리지 말라며 전화를 마무리하셨다.

내가 오빠들 틈에서 만들기 작업을 하는 동안 기름을 써야 하는 전 종류를 모두 떠맡아야 했던 새언니는, 오빠가 사업에 실패한 이후 이혼했다. 큰아빠는 돈 보고 시집온 여자라 돈이 사라지니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떠난 거라 하셨는데, 사실 새언니는 결혼한 직후부터 아들 뺐어간 죄인 취급이 가슴에 사무친 사람이었다.



만두를 다 빚고 남편이 찜통에 올리기 전, 사진을 찍어 큰아버지께 문자 한 통을 넣었다.
...
명절이라고 만두를 빚다가 큰아빠 큰엄마 생각이 났어요. 그때 배운 게 아직도 손에 익어 잘 만들어 먹고살아요. 어떻게 지내시는 거예요. 연락 주신다더니. 어디서든 부디 건강하셔요.
...



나는 여전히 전을 부칠 줄 모른다.

아니, 빵이건 전이건 반죽을 해야 하는 건 어떻게 해도 망치는 망손이다. 대체 그 눅진눅진한 반죽 상태라는 게 뭐라는 건지 아무리 봐도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남편이 다 할 줄 안다는 것.
올 명절 연휴에도 남편이 어머니 곁에서 만들어 온 명절 음식을 먹는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만두와 송편만 빚지 싶다.
매번 지난 시절을 추억하며, 새로운 추억을 만들겠지.

이렇게 살아가는 것 같다.





상지 : 商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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