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三代)

by 진경


그는 식민지에서 태어났다.

조선어는 집 안에서만 속삭였고,

교실에서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대신

입에 붙지 않는 창씨개명으로 불렸다.


해방을 맞았지만

혼란스러운 대립이 시작되었고,

열여덟,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징집되었다.

기억보다 명령이 먼저였고,

죽음은 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총을 놓고 돌아왔을 때

전쟁은 끝났지만 폐허만 남았다.

재건과 산업화, 그리고 생존.

공장에서, 거리에서

새로운 나라와 가정을

동시에 일으켜 세우는 일.


그는 종종 화를 냈지만

거의 울지 않았다.

말을 삼키는 데 익숙했고,

정치는 믿지 않았으며

자식에게는 ‘사는 법’만을 가르쳤다.

‘사는 이유’는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의 아들은 군인들의 시대에 태어났다.

반공과 규율, 순종이 곧 숙명이던 시대.

아버지는 “정치 얘기 하지 마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웠다.


그러나 아들은 결국 거리로 나아갔다.

최루탄 냄새와 함께 자랐고,

대학과 공장에서 혁명을 꿈꾸었다.

민주화를 이루어냈지만,

IMF가 왔을 때 모든 걸 잃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싸우지 않았느냐고,

왜 침묵했느냐고.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눈을 감고

어딘가 먼 곳을 보는 것 같았다.


아들은 아버지와 다르게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먹고사는 일 앞에서 비겁해질 때,

아이에게 “현실을 받아들여”라고 말할 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아들의 아들은 세기말에 태어났다.

새천년의 희망을 말하던 때.

인터넷은 모두의 일상이 되었고,

휴대폰이 손바닥 안에 접히기 시작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개인이었다.


할아버지의 전쟁 이야기는

게임보다 재미없었고,

아버지의 민주화 투쟁담은

유튜브보다 지루했다.


그는 질문하지 않는다.

의심도, 저항도 하지 않지만

체념하지도 않는다.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자유롭다고 믿는다.


하지만 밤이 되면

무한 스크롤 속에서 길을 잃고,

좋아요를 받지 못한 게시물 앞에서

할아버지처럼 말을 삼킨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고독 속에서

아버지처럼 분노한다.


연결되어 있지만 외롭고,

자유로우면서도 갇혀 있다.

그의 침묵은 다르다—

선택한 침묵이지만,

더 깊은 침묵이다.



삼대는 서로를 닮았지만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다.

한 사람은 생존을 위해 침묵했고,

한 사람은 변화를 위해 외쳤으며,

한 사람은 자유를 위해 도피한다.


아버지의 전쟁은 그의 입 안에 남아

아들의 분노가 되었고,

아들의 분노는 그 아들의 고독 속에서

또 다른 침묵으로 변했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같은 상처를 물려받았다.

다만 그 상처가 아무는 방식이

세대마다 달랐을 뿐이다.


유예된 말들은

여전히 공중에 떠 있고,

누군가 그 교차의 실마리를

다시 찾아내기를 기다린다.


*眞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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