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순대국를 첫번째 쓰신게 무의식때문이라면 그걸 먹어야죠 ^^"
점심시간이 다가와 "점심메뉴로 뭘 드실까요? 순대국, 냉면...아니면 다른 걸로?"라고 보낸 문자에 대한 답이다.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다 좋아서 고민중이서 물어 본 것이라고 했고 이내 "그럼 냉면으로 하자"고 한다.
그가 꼭히 오래전부터 프로이트나 뇌과학에 심취해있지 않았더라도 처음과 같은 답이 돌아왔을 것이다. 예의, 배려, 겸양, 신뢰라는 우리가 소위 미덕이라 일컫는 사람이 사람답게 혹은 살만하다 느끼게 하는 것들의 경계와 정도를 알 수는 없지만 기준은 언제나 자신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 역시 가보지 않은 수도권의 이름난 냉면집을 안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좋아하지만 그는 나보다 좀 더 정도가 심하지 않나 싶다. 예상한 메뉴의 선택이다. 내가 문자를 보낼 때 먼저 떠오른 것이 순대국의 하얀 김이었듯....
이미 다녀갔었고 검증된 맛이라 만족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그에 비하면 추가로 시킨 녹두지짐은 좀더 개선이 필요해보인다. 함께 한 ㅇ과장이 "저번보다 모양이 좀더 잘나왔네요"라고 하는 걸 보니 주인장도 전혀 모르고 있지는 않구나 싶어 다음을 기대해도 좋을듯 싶다.
사무실 맞은 편에 새로 오픈한 햄버거 가게가 화제에 올랐다. 나와 그는 아직 가보지 않았다. ㅇ과장은 다른 직원과 다녀왔다고 했다.
"패트도 얇고.... 제 꺼는 빵이 거꾸로 뒤집혔더라구요. 맛도 별로고.... ㅇ이사님은 다른 가게 조사해보지 않고 식당 열었다는데 오른팔을 건다고... ㅎ"
ㅇ과장은 햄버거가게 주인이 건물 주인 아들일거라는 추측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딱히 내세울 것도 없이 이 시국에 새로 식당을 오픈하지는 않았을거란 게 근거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 충분히 설득력있게 들린다는 사실이 슬프다.
절판된 책이 인천에 있는 중고서점에 있다고 뜬다. 지도 앱으로는 1시간 30분정도 걸리는 거리다. 망설이다 사무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면 떼기 힘들까봐 커피 한 잔만 마시고 나왔다. 일종의 학습효과다. 1권 밖에 없는 책은 가는 도중에도 사라져서 허탈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독서가 취미십니까?" 혹은 "책을 많이 읽으시나보죠?"라고 물으면 "아닙니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 역시 기준과 정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인데 정직하게 내가 느끼는대로 답한다면 그렇다.
질문을 바꿔 "책 욕심이 많으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 밖에 없고 읽는 것보다 사는 걸 더 좋아한다고 할 것 같다. 지나치다가 들러도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일부러 먼 걸음을 해서 책을 사러 나오면 설사 찾던 책이 없어도 다른 책을 사게 된다. 흡사 아내의 심부름으로 계란 한 판을 사러 마트에 갔다가 이것저것 장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그래도 유일하게 후회가 안되는 무절제한 과소비다.
책방에 도착해 우선 사려던 책부터 선점을 했다. 이미 앞 부분은 소개로 읽었던 터라 아무데나 펼쳐서 잠시 읽어보니 역시 기대 이상이다.
그러면 다음 순서는 검색대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다른 책이 있는지 찾아본다. 서너권이 뜬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주머니를 더 털릴 판인데 이럴 때는 내가 좀 모자란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시간이 쫓기지 않는다면 항상 이런 식으로 책 쇼핑을 하니 일부러 비우고 온 백팩을 무겁게 지고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놓고 읽지 못한 책빚에 시달리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반복된다.
오후 일정이 따로 없어 스터디 카페로 방향을 잡았다. 가장 빠른 경로를 택해서 서점을 찾았는데 돌아가는 길은 가장 느린 경로를 알아본다. 대개 오후 2~3시의 버스는 빈 좌석으로 돌아다닌다. 가끔 환기가 안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거나 사는 게 고달프고 막막하게만 느껴져서 아무 버스나 올라타는 시각도 이 즈음이다.
나는 지하철보다 버스를 애용한다. 가로수, 유모차를 끄는 엄마, 바쁘게 걷는 직장인. 운이 좋으면 비닐하우스나 밭, 강변이 나타나기도 한다. 차창 밖에 정경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많은 이야기와 위로를 건넨다. 그러면 한결 마음이 누그러지고 신선한 공기를 들인 것같은 기분이 나아진다.
가끔 지체없이 바로 읽고 싶은 책을 만나도 우회하는 노선을 택한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책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되도록 환승을 하지 않는 노선이어야 한다. 아무리 재미있는 TV드라마도 중간 광고가 삽입되는 순간 맥이 끊기는 것과 같다. 그러고보면 순위를 정하는 오디션프로에서 MC가 외치는 "잠깐만요. 광고 보시고..."멘트가 시청자를 우롱하는 간악한 상술로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실망하지 않을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고, 다행히 예상에 벗어나지 않는 좋은 책을 사서 읽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행복한 삶이다. 어쩔 수 없는 밥벌이 고민을 싸안고 산다해서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있을 지도 모를 기회를 앞당길 방법은 없다.
가끔은 잔잔한 시간에 나를 태워 흘러갈 필요도 있지 않을까. 엉뚱한 데 나를 내려놓지만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