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누운 사람

by 문성훈

노트북을 펼치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자정을 넘겼지만 쓰다 만 글이 있어 마무리를 해야 했다.
해를 더해갈수록 노안만큼 노뇌가 두드러지는 것 같다. 문장이나 기억이 떠오를 때 써두지 않으면 금새 증발되고 만다.
“언제 들어올거야?”
“좀 이따…”
거실 컴퓨터를 쓰던 아내가 여느때처럼 먼저 침실로 들어간다. 딸이 등장했다. 한참동안 미러리스와 DSLR카메라의 차이를 두고 옥신각신했다. 나는 확인을 위해 검색을 했고 딸은 쪼르르 엄마에게 달려갔다. 고자질을 겸한 수다를 나눈다. 문을 닫고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당신 언제 들어올거야?”
“아니 왜~~~?” 불현듯 튀어나온 날카로운 응대에 짜증이 묻어있다. 대답하고서 흠칫한다.

아내가 왜 나를 찾는지 안다. 나는 쉰을 넘긴 여자의 몸을 알지 못한다. 손발이 자주 저리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일 때 주물러주면 쉽게 잠이 든다. 그러니 내 대답은 귀찮거나 하기 싫다는 대답을 대신한 것에 불과하고 신경질이나 다름없다.
뭔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 주의를 흐트리는 상황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고질병이다. 완화되고 신경을 쓰는데도 가끔 내 안에 잠복된 그것이 돌출되곤 한다.
방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노트북을 끄고 덮는다.

이 장면만 끊어놓고 보면 자상한 남편의 모습같지만 실은 그렇지 못하다.
평생 무뚝뚝했고 어머니께 다정한 말을 건네는 걸 보지 못했던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예정된 죽음에도 세상 어느 아내보다 헌신적이셨던 어머니께 사랑한다거나 고맙다는 말을 남기지 않고 떠나셨다. 내 유전자 안에도 아버지의 잔재가 남아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장자였기에 두 분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는 다른 부부였음을 알고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누구에게나 강한 성품으로 비춰졌을 아버지는 정신적으로 어머니께 의지했으며 깊이 사랑하셨다. 다만 표현이 서툴고 때로는 어긋나서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그 이유도 분명히 알고 계셨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 당신들의 부부생활은 내게 교과서나 다름없었다. 쫓아야 할 것과 지우거나 적힌 것과는 반대로 할 것을 분류해서 공부했다. 때로는 적힌 것보다 새로 써야 할 부분이 많았다.
어머니는 남편에게서 느끼는 아쉬움과 부족함이 아들에게 전승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와 당부를 하며 나를 키우셨다. 가르침대로 따르고 있는지 자신할 수 없고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아내의 몫일 테니 말이다.

우리 두 사람은 나고 자란 지역만 같을 뿐 많이 다른 가정환경과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성격과 취향, 좋아하는 음식과 생활 습관까지 정반대에 가깝다. 게다가 결혼 적령기까지 독신을 고집하던 나와 어릴 적부터 행복한 결혼을 꿈꾸던 아내가 부부의 연을 맺고 산다는 게 신기할 때가 있다.
부부가 닮아간다는 말은 옳지만 더 정확하게는 닳는다는 표현이 맞지 않을까 싶다. 예민하고 거칠던 나는 뭉툭해졌고 다듬어졌으며 조용하고 연약하던 아내는 좀더 외향적으로 변하고 강해졌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의 삶도 영향을 끼쳤을 게 분명하다.

나는 늘 아내에게 감사하다. 남든 모자라든 현재에 만족하고 검소하다. 사소한데서 행복을 찾는 자질은 탁월하다 못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누구에게서나 상대의 장점부터 발견하는 눈과 늘 친절하고 배려하는 마음씀씀이는 나로서는 따라할 수 없다.
누구나 그러하듯 아내 역시 나와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단점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언급할 수가 없다. 나부터가 한 인간으로서 턱없이 부족한 부분이 많은데다 단점 투성이고 시대에 뒤쳐친 남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부딪치는 문제의 대부분을 양보하는 쪽은 아내였다.

나 역시 아내에게 불만이 없을리 만무하지만 농으로라도, 아무리 편한 자리에서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다.
이미 부모님의 부부생활 교과서로 공부해서 다짐했던 바였고,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배우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까운 사람들이 배우자의 흉을 들춰내거나 우스개소리의 소재로 삼는 것조차 흔쾌히 지나치질 못한다. 정도가 심하다싶으면 멀리하거나 관계를 끊은 적도 있다.
자신보다 더 귀하게 대접받고 인정받게 해야 할 사람이 배우자다. 누워서 침뱉기란 말은 부족하다. 그 침을 대신 맞는 한이 있더라도 배우자는 피하게 하는 것이 남편과 아내가 된 도리고 결혼식에서 지키겠다고 한 모든 다짐의 최소한이라 믿는다. 어쩌면 내가 턱없이 모자란 남편이어서 가지는 열등감의 발로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부정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해서 내 태도가 바뀌지는 않을 것 같다.

이전까지 알지 못하던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일은 새로운 탐험이고 발견이며 어쩌면 창조적이기까지 하다. 그 여행의 닻을 어디에 내릴지 어떤 결말로 마무리될 지 알 수는 없다.
다만 확실한 건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잔잔한 바다에 행복을 느낄 때에도, 예상치못한 폭풍우와 높은 파고에 부서질 듯 위태로운 항해를 하는 중에도 그 배에는 단 두 사람밖에 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여전히 가보지 않은 독신으로서의 삶을 그려보기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적응하고 만족해하는 내 자신을 보며 놀랄 때가 있었다. 그러다 이 글을 만났다.

“내가 혼자 사는 데에 흠뻑 빠져 있을 때조차 무언가 이상하게 부족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별이 빛나고 움직임이 없는 침묵 속에서 누군가 동반자가 있어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곳 가까이 누워 있었으면 했다.
왜냐하면 함께 지내는 것이 혼자 사는 것보다 훨씬 평온함을 가져다주며 고독을 완성시키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남자가 자연 속에서 사랑하는 여자(혹은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와 사는 것은 모든 생활 방식 가운데 가장 완전하고 자유로운 삶이다. <시벤느에서 당나귀와 함께 한 여행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그의 다른 소설 <보물섬>에 닿기도 전에 나는 이미 보물을 싣고 있고,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내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젊은 날, 나의 다소 막연했던 독신주의는 자유와 고독을 향한 동경에서 비롯됐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누군가와 함께 평온함 속에서 고독을 완성시키거나 자유로운 삶이 가능할 거라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했다. 만약 내가 느끼는 일단의 만족감이 고독의 완성이나 자유로운 삶에 근접해서라면 이는 아내의 공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내에게 그런 존재에 미치지 못할 것 같다. 아직 항해는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고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을 뿐이다.
물론 완벽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나 역시 그녀를 자연 속으로 끌고 들어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 밤엔 반항하지 말고 고이 중전의 침소에 들어 기꺼이 팔 다리를 주물러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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