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의 관계가 으레 그렇듯, 내가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엄마는 내가 나 같은 자식을 낳아서 기르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엄마의 바람과 달리 나는 그렇게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결혼 후 남편과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씀드리자 아쉬워하셨던 기억이 난다. 내가 아이를 낳아서 기른다는 것이 공상과학소설처럼 느껴지면서도, 또 한편 문득 엄마의 이야기가 생각날 때마다 아이가 생긴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궁금하곤 했다. 전혀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가족이 생긴다는 것, 남편처럼 동등하게 말다툼하면서 싸울 수도 없고, 사랑스럽지만 밉고, 그럼에도 책임져야 하는 아이가 생긴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아이를 갖는 것과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르완다에서 두 마리 강아지를 입양해 기르며 나는 종종 나를 향해 소리치던 엄마의 목소리와 만난다. 처음 동물병원에서 유기된 강아지를 입양하던 그 순간에도, 작은 동물을 기른다는 것에는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한 일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이제 막 일 년을 넘긴 강아지와, 태어난 지 5주 된 어린 강아지를 각각 입양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품에 안고 온 것이 아님에도 그랬다. 사람과 교감하며 의젓하게 집을 지켜주리라 생각했던 강아지들은, 매일 새벽 놀아달라며 우리를 깨우고, 어쩌다 한쪽으로 관심이 쏠렸을 때는 다른 강아지가 질투하며 삐지곤 했다. 어느 날은 반찬투정을 했고, 또 어느 날은 집안 곳곳에 볼일을 보았다. 매뉴얼에 맞추어 훈련을 시키면 며칠간은 말을 잘 듣는 듯하다가, 경계가 좀 느슨해졌다 싶으면 우리의 음식을 몰래 뺏어먹고 혼나는 일도 다반사였다.
어릴 적 서운하게 느껴졌던 부모님의 말과 행동이 나를 통해 강아지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장녀로 자랐던 나는 왜 항상 나만 어린 여동생을 챙겨야 하는 어른스러운 언니여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 또한 같은 일에도 어린 강아지보다 이제 한 살 된 강아지를 더 많이 혼내고 있었다. 보호받던 어릴 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무언가를 책임지기 시작하니 서투른 모습으로 표출되고 있던 것이다. 둘 다 어리고 사랑받아야 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한 살이라도 많은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신경쓸거리를 덜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내 생각처럼 되지 않는 아이들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도, 아껴주고 챙겨주었음에도 말이 통하지 않아 서운한 감정도 모두 조금씩 내 것이 되고 있었다.
엄마와 오랜만에 통화하며 강아지를 통해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니, 그새 철이 들었다고 웃으셨다. 강아지를 기르는 일은 생각보다 서운하고 화나고 속상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순간 행복하다. 잠시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신나게 맞아주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또 하루를 열심히 살아야 하는 책임감이 생기기도 한다. 털뭉치 속에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나니, 나의 삶 하나조차 너무 벅차서 그 누구도 내 삶에 들이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던 나에게도 가족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