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스스로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는 판타지 소설 같은 경험담
9급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2번의 시험을 거친다. 1차 필기, 2차 면접. 면접보다는 필기에서 당락이 결정되므로, 일단 필기 합격을 하게 되면 98퍼센트 이상은 합격이 확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면접에서 뒤집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본인의 필기 점수가 합격선에 아주 근접해 있지 않은 이상은 보통 합격을 확신한다.
여기서 면접에서 뒤집힐 일이 없다는 것에 주목하려 한다. 즉, 면접은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므로 올바른 공직관을 가지고 책임감 있게 일을 하려는 사람을 걸러내는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모두 같은 문제를 받아 똑같은 답을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는 객관식에 비해 평가를 개개인의 면접관에게 맡기는 면접이라는 형식은 아무래도 덜 공정해 보이고, 면접자가 이의를 제기했을 때 속 시원하게 모두를 납득시킬만한 답변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잘 보이기 위한 만반의 준비 후 면접을 보는 딱 10분 정도만 무난하게 보내면 필기시험 점수 그대로 최종 순위가 결정된다.
공무원의 인기가 높아지고 시험이 어려워진 후에나 그나마 필기라도 지원자를 거르지, 2000년대 이전에는 필기시험마저 제대로 된 변별력이 없었다고 한다. IMF 전까지만 해도 사기업들에서는 대학 졸업생들을 서로 데려가기 위해 신입사원 OT에서 현금을 주기도 했었다고 하니 말이다. 안정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필요성이 지금만큼 높지 않았던 시대에 봉급도 적고 인식도 좋지 않은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큰 매력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연령대가 어떻게 되든 같이 일하기 참 힘든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바로 공무원 조직이다. 쉬운 시험을 보고 들어왔다고 해도 원래 좋은 사람은 그대로 좋은 사람인 것처럼, 어려운 시험을 거쳐도 면접에서 거르지 못하니 이상한 사람도 충분히 들어올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만 귀신같이 골라냈을까 감탄이 나올 정도로 이상한 것으로는 어디 내놔도 절대 지지 않을 공직사회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최초의 인물은 발령 첫 해 같은 팀에서 근무했던 A다. 시간이 흐르고 다른 사람들도 많이 겪고 나니 이 정도면 양반이었구나 싶었지만 아무래도 처음이니 임팩트가 좀 있었다. 나보다 스무 살이 많았는데, 자신의 일을 나에게 그냥 시켰다. 본인은 자리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집에 갔다. 외근도 항상 혼자 나가라고 시켜서 일을 시작한 지 1개월도 채 안된 시점에 혼자 무거운 짐을 끌고 여기저기 외근을 다녔다. 하루는 부서장이 왜 담당자가 가지 않고 너 혼자 나가느냐고 물어서 A는 일이 있어 혼자 가기로 했다고 답했다. A는 그대로 나를 끌고 나가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냐며 쏘아붙이기도 했다(사실이니까요?). 해당 사업의 결과는 당연히 좋지 않았고 A는 그 모든 탓을 나에게 돌렸다. 그 후, 업무분장표 상 그 일은 여전히 A의 업무였지만 A는 그 일의 예산집행과 사업계획, 결과보고까지 내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몇 개월 일을 해 본 나는 더 이상 그런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일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고 내 탓을 할 거면 직접 하라고 되받아쳤다. 그리고 앞으로 이 업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A는 따라 나오라고 하더니 팀장님을 불러 누구 잘못인지 가려달라며 화를 버럭버럭 냈다. 결론은 내 잘못이었다. 일을 다 했지만 어쨌든 선배니까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어 차라리 그 업무를 나의 업무분장에 넣어달라고 요청했고, 내가 맡은 이후 해당 업무는 2년 간 꾸준히 서울시에서 최우수구라는 평가를 받았다.
참고로 이때 나는 업무계획 문서편집 및 프린트를 못하겠다는 50대 여직원(부서 총괄 서류 작업 담당), 주간회의자료를 만들기 귀찮고 싫다는 또 다른 50대 남직원(팀원 중 가장 고참), 일이 힘들다며 돌연 육아휴직을 들어간 40대 남직원의 업무와 더불어 본래 내게 주어졌던 새끼서무 업무와 각종 자잘한 사업까지 하고 있었다. 반년이 지나자 서울시에서 평가를 받는 또 다른 업무 총괄을 추가로 맡았고, 해오던 업무는 계속해서 최우수구로 유지하라는 압박까지 더해졌다. 이 와중에 퇴근 후 집에 갈라치면 저녁 자리에 따라가서 과장님의 기쁨조가 되어라, 1박 2일 주말 워크숍에 필수로 참석해라(할아버지 생신이어도 과장님 퇴직이 더 중요하다), 설거지는 이제 너 혼자 다 해라, 청바지를 입고 출근하지 마라 등의 말을 들었다. 또 한 번은 동 주민센터 직원의 실수로 구청 총괄인 나를 패러 오겠다는 민원인의 으름장을 듣고 팀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 웃기다"가 전부였다. 덩치부터 위협적인 정신지체장애가 있던 민원인은 실제로 사무실로 찾아왔고 날 보더니 팀장 나오라고 해!라고 소리를 질러서 깔깔 웃던 팀장이 그를 온전히 감당하게 되는 엔딩이었지만 말이다.
이 외에도 회식자리에서 50대 기혼 남녀 팀과장이 얼싸안고 블루스를 추거나 사무실에서 썸을 타는 장면도 자주 볼 수 있었다. 회식에서 술을 마시고 번갈아가면서 날 껴안아보겠다고 하는 3,40대 남자직원들도 있었는데, 화가 나서 그들에게 무슨 짓이냐고 공개적으로 문제를 삼아한 소리를 하자 옆에서 그런 정도는 우정의 표시기 때문에 기분 나빠하는 내가 문제라고 훈수를 두는 30대 여직원도 있었다. 30대 되면 바로 살이 찌게 될 테니 지금을 잘 즐겨두라던 기분 나쁜 예언도 함께. 3년 간 이 사람들과 있었던 일의 10퍼센트나 적었을까 싶지만 그냥 이 정도에서 마치겠다.
하지만 진짜는 세 번째 부서장으로 온 B였다. 원래도 직원들을 괴롭히기로 유명했던 사람이었는데 직접 겪어보니 정말 말도 안 되게 나쁜 사람이었다. 간단히 몇 개만 소개하자면, 직원을 따로 불러내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일하지 않으면 앞길을 막아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고, 자기가 괴롭혀서 휴직한 사람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부서장들끼리 모두 공유해 인사 때 불이익을 주겠다는 말을 공공연하고도 자랑스럽게 해댔으며,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첫째가 고작 초등학교 2학년인 3명의 아이 앞에서 그들의 아빠에게 소리소리를 지르며 몇 십 분씩 화를 내기도 했다. 참고로 그는 주말에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어 옆에 아이들을 앉혀놓은 채 사무실에서 밀린 일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 일을 참교육이라고 자랑하듯이 떠벌린 것은 놀랍지도 않다.
이 부서의 새끼서무, 즉 이런 것까지 해줘야 하나 싶을 정도로 자잘한 갑질까지 전부 다 견뎌야 하는 자리에 있던 나도 B의 패악을 피해 갈 수 없었다. B는 하루종일 출근해 아무것도 안 하고 모니터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이상한 직원에게는 한마디 지적을 안 하면서 일이 많아 화장실도 참다 참다 뛰어갔다 오는 나는 그렇게 쥐 잡듯이 잡았다. 한 번은 개인사정으로 하루 휴가를 쓰겠다고 말했다가 부서원 전체가 지켜보는 앞에서 30분가량을 서서 소리 지르는 것을 듣고 있어야 했다. 물론 부서에 급한 일은 없었다. 이 만행들이 놀랍게도 B는 내 또래의 아들이 있었다. 나는 항상 그 아들이 취직을 해서 반드시 똑같은 취급을 받고 집에서 매일 울길 간절히 기도했다.
이 때도 그 부서장 때문에 일을 못하겠다며 옆자리 직원이 한의원에서 떼어온 화병 진단서를 던져놓고 잠수를 타는 바람에 갑자기 3000명에게 보조금을 주는 사업을 떠맡았고, 직제개편으로 인해 해결방법이 없어 악성민원만 하루에 수십 건이 들어오는 업무가 우리 팀으로 넘어와 담당자들이 하루종일 외근을 나가있는 사이에 끊임없이 울리는 그 민원전화들을 다 감당해야 했으며, 위에서 말했던 일들을 모두 거의 그대로 하고 있었다. 물론 민원전화는 나누어 받았으면 좋았겠지만 내가 아니면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받자마자 욕설과 통곡소리가 뒤섞여 있을 테니 막내가 알아서 다 하라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부서에서 일하는 기간제근로자와 사회복무요원 급여 및 관리까지 맡고 있었다. 사기업에서야 외부인력은 문제가 생기면 잘라도 되는 존재지만 공공기관의 외부인력은 잘못보이면 민원인이 되는, 떠받들어 모셔야 하는 존재이므로 이것도 상당한 골치였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전형적인 MBTI T인간으로서 울기는 하냐, 마지막으로 운 게 언제냐는 질문도 받는 사람인데, 이 때는 매일 같이 울음이 터져 나와 하루에 2시간 정도는 밖에서 엉엉 울었던 것 같다. 그나마 부서에 몇 안 되는 정상적인 직원들이 돌아가며 휴지와 신발을 가져다주어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B는 자기 말에 복종하지 않으면 나를 승진에서 영영 멀어지게 만들고 모든 국과장, 팀장에게 소문내서 앞길을 막아버리겠다는 협박을 일삼았기 때문에 겉으로는 그냥저냥 지냈지만 나는 이미 B뿐 아니라 공무원 자체에 오만정이 떨어진 상태였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난 평생 공무원으로 살 것이라고 생각해 왔기에 이렇다 할 결론은 내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어느 날, B는 또 나를 불러서 잠수 탄 사람이 놓고 간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한 것이냐고 물었다. 어느 정도 방향을 잡고 3000명의 보조금을 차례로 처리하고 있던 나는 전년도 해당 사업의 진행상황을 들어 하절기가 지나고 나면 큰 무리 없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며 몇 가지의 방안을 함께 제시했다. 여기서 내 잘못은 B가 상식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던 양, B는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겠냐고, 못하면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시작된 그 조롱조의 말투는 얼마 안 되어 사자후로 바뀌었다.
이때 이 조직에 미래는 없다는 확신과 함께 관두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2년 반이 넘게 이 어처구니없는 곳에서 그냥 당하기만 하던 내 모습이 떠오르며 분노가 차올랐다. 책임질 거냐고 빽빽 소리를 지르고 있는 B를 똑바로 쳐다보며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B는 잠깐 멈칫하는 듯싶더니 다시금 어떻게 책임을 질 거냐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알아서 한다고 말한 후 나는 그대로 뒤돌아 사무실을 벗어났다.
이후 좋은 기회가 생겨 그만두는 대신 다른 자치구로 인사교류를 하게 되었고, 거기선 이렇게까지 비상식적인 상황을 마주하지는 않았다. 남의 팀 회식에 영문을 모르고 끌려갔다가 2시간 정도 자리를 지킨 후 먼저 집에 간다고 한 일로 2년 간 기본을 모르는 인간이라며 앞담 뒷담을 까이며 배척당한 일, 팀원이 모두 놀고 있는데 혼자 일하고 있는 나에게 간식 챙기는 일은 여자가 해야 하는 거라며 재촉을 하던 옆 팀 직원에게 요즘 시대에 그런 게 어딨 냐고 했다가 1년간 투명인간 취급을 당한 일(팀원 중 내가 가장 고참이었다), 민원업무를 수행하던 대직자가 매주 휴가를 내 일을 대신해주어야 했던 일, 나이 많고 연차 낮은 남직원들이 어린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괴롭히던 일 수준이다. 내가 피해자는 아니었지만 스토킹과 빵셔틀, 불륜 등도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글쓴이도 이상한 사람이기에 그런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수도 있지만, 이 자치구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전부 좋게 마무리되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나를 미워했던 사람들에게 용기 내어 내가 먼저 대화를 요청했고, 사과를 주고받은 후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시간이 충분히 흐른 후에는 '남자 직원처럼 묵묵히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직원'이 되었고(이게 무슨 성차별적인 발언인가 싶지만 공무원 사회에서는 최고의 칭찬) 그 자치구마저 떠난다고 소식을 전하니 아쉬워서 어떡하냐고 날 얼싸안기도 했으니 말이다.
나도 너무 사람들이 싫어서 내가 이상한 걸까 고민했던 시기가 있다. 하지만 내가 언급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트러블이 있던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 외의 사람들과는 잘 지내왔다. 또한 두 번째 자치구의 사람들은 내가 떠날 때쯤엔 (어린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괴롭혔던 팀원들 제외하고) 모두 좋은 관계로 전환되었으며 나는 공식적으로 재미있고 꽤 괜찮은 직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게 해주는 너는 좋은 사람이니 의심하지 말라는 말에 대한 믿음도 가질 수 있었다.
아마 지금 이 글을 읽은 사람들 중, 내가 사회생활을 하며 너무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명확하게 부당한 일이라 해도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참고 참다가 말하는 것은 참작사유가 되지 못한다. 바로 말하든 참다 말하든 '결국 말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똑같이 생각한다. 짚고 넘어갈 일은 짚고 넘어가야 조직이 발전할 수 있다. 애초에 그 정도의 행동을 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 조직은 발전할 의지가 전혀 없으므로 구성원들이 그저 조용히 있기를 원한다.
운이 좋게도 서로 조심하고 맡은 업무를 스스로 해결하는 직원들과 2년 연속 같은 팀이 되고 나니 동료직원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0에 가까워졌다. 이렇게나 평온한 나날들이라니 여기 평생 있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간혹 들었지만 나중에 이 생활이 그리워지면 그때 다시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이 불안한 평온함은 그저 단기적인 운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가까운 옆 사람만 봐도 지긋지긋한 사람들에 쉴 새 없이 시달리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