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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개국에서 보낸 크리스마스이브

2019년 인천-핀란드-탈린에서 맞이한 크리스마스이브

by missnow

2019년 12월 24일 인천공항에서 헬싱키 행 오전 11시 15분 비행기를 탔다. 크리스마스에 큰 의미를 두진 않지만 그래도 기왕 크리스마스 시즌에 떠나는 여행이니 제대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여행지는 세계 최초로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진 장소이자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유명한 에스토니아 탈린이었다. 기왕 핀란드에 가는 거, 핀란드에서 페리를 타고 2시간이면 도착하는 탈린에 가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었다. 다소 무리한 일정일지라도..


덕분에 여행 첫날의 주요 일정은 [이동]이었다. 핀란드에 도착해서 하루 쉬고 탈린으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어설프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 그렇게 시작된 첫째 날. 9시간 비행기를 타고 온 게 분명함에도 시차의 마법으로 핀란드 반타 공항에 도착하니 출발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간이었다. 24일 오후 2시.

핀란드 반타 공항에서 페리를 타기 위해 헬싱키 중앙역으로 이동, 중앙역에 내려 느낀 헬싱키의 첫 감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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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다! 비가 온다! 아직 오후 4시밖에 안 됐는데 한밤중처럼 캄캄하다였다.

이때 한국은 24일 밤 11시 26분. 헬싱키는 오후 4시 26분이지만 밖이 캄캄해서 한밤중이나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시차 적응을 따로 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이미 지난번 북유럽 여행에서 오후 3시만 돼도 캄캄해지는 하늘을 체험했지만, 몇 년 만에 다시 느껴보는 이 오후의 밤하늘은 여전히 낯설게 느껴졌다.

크리스마스 이브라 유럽은 분위기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헬싱키는 떠나온 한국보다 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지 않아서 서글퍼졌다.

예정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이 어긋나는 순간 일정이 꼬이는 날이라 헬싱키 중앙 역을 나와 거리 풍경을 감상할 여유도 없이 역 앞에서 바로 트램을 타고 페리 터미널로 이동했다.

그나저나 핀란드에서 눈이 왔으면 왔지 비가 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해서 난데없이 맞게 된 겨울비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날씨도 서울보다 춥지 않았다. 원래도 추위를 잘 타지 않는데 바리바리 싸 온 핫팩은 참으로 짐스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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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램을 타고 스케치하듯 눈에 담은 헬싱키 시내는 확실히 좀 한적한 느낌이었다. 거리 풍경뿐만 아니라 내가 탄 트램이 아마 헬싱키 사람들 입장에서는 퇴근길의 트램이나 다름없을 터였는데도 채워지지 않은 좌석이 더 많을 정도였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게 아무 이질감이 없으면서도 또 몇 시간 전에 회사에서 철야하던 그곳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곳의 나와 이곳의 나. 몇 시간 만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곳에 와있었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매번 참 신기하고 새삼스러웠다. 옷을 갈아입듯 내 신분을 회사원에서 여행자로 바꿔서 나는 또다시 낯선 이곳에 당연한 듯이 와있었다.


오후 5시 56분 페리 안.

후쿠오카 여행 때 탔던 페리도 꽤 크고 안에 대 욕탕부터 해서 상점까지 흡사 작은 건물 하나가 바다 위에 떠 있는 느낌이었는데, 헬싱키-탈린 가는 이 페리는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복합 쇼핑몰 같은 느낌이었다.

일단 배 안에 큰 면세점이 있었고 (헬싱키보다 탈린의 물가가 싸기 때문에 헬싱키 사람들은 쇼핑을 위해서 탈린을 자주 간다고 한다) 등급별로 나누어진 객실, 레스토랑, 바, 게임룸 등 얼추 둘러본 시설만 해도 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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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석은 별도의 좌석이라는 게 없고 큰 패밀리 레스토랑같이 여러 개의 테이블이 주류 및 간단한 스낵류를 제공하는 바와 작은 무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빈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페리까지 무사히 타고나서야 좀 여유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나처럼 크리스마스를 즐기러 탈린에 가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테이블을 채우기 시작했고, 배가 출발하자 페리 안의 작은 무대에서 라이브 밴드 연주가 시작됐다. 이동수단인 페리가 작은 라이브 홀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라이브 밴드가 크리스마스 송을 연주하고 가수들이 노래를 시작했다. 온종일 이동하는 스케줄에 기껏 이곳까지 떠나왔음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내심 심신이 지쳐가고 있었는데 라이브 밴드의 크리스마스 송을 들으니 그제야 내 여행이, 크리스마스이브가 시작된 기분이었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꼭 크루즈 여행을 하고 싶다. 여정 자체도 여행의 일부가 되는 게 페리 여행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라이브 밴드의 음악 들으며 바에서 술을 마시며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를 여기서 보내도 좋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여행을 가지 않으면 할 일이 없다고 그래서 여행이라도 가는 거라고 한 친구가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공감이 안 됐었는데 지금은 무슨 의미인지 알 것도 같았다.

떠나오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기분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떠나오지 않았다면 그곳의 나는 지금 이 시각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방구석에서 맥주 한 캔 마시며 혼자 TV나 보고 있었겠지... 여하튼 지금과 같은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도 그녀처럼 그래서 연말에 여행을 다니는 건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의 행복이 이곳에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즐거워 보였고 그래서 그들을 보는 나도 즐거웠다. 즐거워하는 그들에 물들어 나 또한 내가 떠나온 그곳의 안부와 평화를 바랐다.


그렇게 3개국에서 보내는 2019년 크리스마스이브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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