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비 오는 크리스마스이브, 탈린의 크리스마스 마켓 방문기
핀란드에서도 비가 와서 참 아쉬웠는데 페리에서 내리자 탈린 역시 비가 오고 있었다.
여행 오기 전 거금을 들여 고어텍스 패딩을 산 나의 선견지명에 박수를!
항구 앞 2분 거리에 있다던 호텔을 찾지 못하고 비 오는 겨울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30분을 넘게 헤맸다.
(찾고 나니 2분 거리가 맞긴 했다... 엉뚱한 길에서 헤매지 않았다면 말이다.)
숙소에 도착하자 온종일 비행기, 열차, 페리를 타고 이동을 하느라 정말 몸과 정신이 피곤함에 찌들 대로 찌들어 개운하게 씻고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유명한 탈린까지 와서 숙소에서만 시간을 보내기엔 너무 시간이 아까웠다. 비가 와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릴지 열리지 않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었지만 나는 다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탈린의 거리로 나왔다.
중세도시 느낌이라고 해서 탈린 전체가 유럽풍의 건물로 이뤄져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떠나온 그곳과 다르지 않아 나는 좀 당황했다. 한참을 걸어도 중세 유럽풍의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걷다 보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듯 내 주위 풍경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시청광장을 향해 걸어갈수록 콘크리트 건물들이 내 걸음에 맞춰 스쳐 지나갔고 점점 중세 유럽풍의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4차선 도로를 배경으로 뒤에는 내게 익숙한 콘크리트 건물, 앞에는 중세 유럽풍의 건물이 보였다. 나는 시간의 흐름 속 그 중간 어딘가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단 가보자는 생각으로 무작정 거리로 나오긴 했지만, 비가 오고 있었고 저녁 8시라 크리스마스 마켓이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시청 광장에 도착하니 다행히 아직 문을 연 상점들이 있었다. 비가 오고 늦은 저녁이라 그런지 축제의 설렘과 흥겨움보단 차분함과 크리스마스 본래 취지에 맞는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내가 기대했던 크리스마스 마켓의 느낌은 아니었지만 늦은 시각, 비까지 오는데 그래도 크리스마스 마켓을 열어주고 있던 탈린 상인들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고 올데 한자 레스토랑에 찾아갔다. 탈린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인 올데한자. 크리스마스이브지만 마감을 앞둔 늦은 저녁이어서인지 다행히 빈자리가 있었다. 중세 유럽 레스토랑을 모티브로 한 식당이라 그 시대 복장을 한 종업원이 나를 마담이라고 칭하며 빈자리로 안내를 해 주었다. 그때가 저녁 9시 13분이었는데 시차를 계산해보면 한국 시각으로는 새벽 4시 13분이었다. 탈린 시각 기준으로도 늦은 저녁을 먹는 셈이었지만 한국 시각 기준으로는 밤을 새우고 새벽에 밥을 먹는 것과 같았다.
끝나지 않는 24일이 계속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 관광지의 레스토랑에 오는 용자가 나였다. 불과 5년 전 크리스마스 시즌 아이슬란드에서 레스토랑을 들어가지 못해 결국 숙소에 돌아가 컵라면을 먹었던 것에 비하면 나도 참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했다.
어둠에 익숙해서 찬찬히 식당 안을 둘러보니 나처럼 혼자 온 여자가 보였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시켜 먹고 있는 그녀와 나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표정이 가득했다. 그녀와 나는 아마 같은 성향의 사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세 분위기를 십분 살린 인테리어는 조명이 거의 없어서 내부가 몹시 어두 컴컴했다. 마치 횃불로 안을 밝힌 동굴 속에서 있는 밥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메뉴판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할 만큼 영어가 능숙하지 않은 나는 부랴부랴 인터넷을 검색해 사람들이 제일 많이 먹는 메뉴를 찾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먼저 이 식당의 명물 허니 비어가 나왔고 달콤한 허니 비어는 겨울비에 차게 식어있던 몸을 따뜻하고 기분 좋게 만들어줬다.
새벽 텐션이어서 그런지 이 상황이 웃겨서 그런지 아니면 허니 비어를 거의 빈 속에 먹어서 인지는 몰라도 나는 계속 웃음이 나왔다. 이어서 나온 음식도 야생의 고기 어쩌고 쓰여 있었던 것에 비하면 다행히 입에 맞았다.
사실 너무 어두워서 내가 무슨 음식을 먹고 있는지 생생히 느껴지진 않았다. 원재료의 맛을 살린 투박한 맛과 플레이팅만 기억이 날 뿐…
옆 테이블의 남녀(커플인지, 친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분이 무지 수다쟁이였다), 맞은편 테이블의 가족이 다정스레 이야기를 나누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혼자 있는 나와 계단 앞 테이블에 나처럼 혼자 앉아있는 그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그들은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고 우리 역시 우리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느라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서로 각자의 지금을 즐기기 바빴다.
그렇게 혼자 또 함께 보내는 2019년 12월 24일이 지나고 있었다.
다음날 본격적인 탈린 여행을 위해 다시 시청 중앙 광장을 향했다. 다행히 비가 그쳤다. 크리스마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크리스마스 마켓 역시 다시 문을 연 상점들과 관광을 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내가 떠나온 곳에 있는 사람들의 행복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행복을 마음속으로 빈 후 나는 본격적인 탈린 여행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