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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탈린에서 떠나는 중세 유럽 여행

3만 보 끝에 다다른 탈린 구시가지의 비밀스러운 풍경

by missnow

크리스마스 시즌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여행자를 위한 팁.

유럽은 연말에는 관광명소나 상점이 쉬는 곳이 많다. 특히 크리스마스 기간에는 대부분 문을 열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나는 연말 여행이 내가 있던 곳과 그곳의 나에게서 벗어나 한 해를 정리하기 최적의 시기라 늘 연말에 여행을 떠나고 있다. 하지만 겨울, 그것도 연말의 유럽은 다른 사람에겐 그다지 추천할 만한 여행지는 아니다.


탈린은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관광지였기에 그나마 관광에 제약이 없는 편이었다. 이 도시 풍경을 오롯이 눈에 담고 오는 것 자체로도 여행을 올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이번 여행지로 탈린을 선택한 이유도 있었다.

또한 탈린은 작은 도시이기에 바지런히 돌아다니면 유명 관광지는 반나절 안에 볼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도시다. 물가도 저렴하고 가성비가 높은 여행지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여행자가 탈린 자체만으로 관광을 오는 경우보다는 나처럼 핀란드에 관광하러 왔다가 당일치기로 페리를 타고 여행을 오거나, 러시아나 다른 국가를 가기 전에 잠시 들르는 여행지로 탈린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어젯밤 그리고 오늘 하루 오롯이 그리고 내일 점심까지 나는 여행 초반 3일을 탈린에서 보내게 됐다.

탈린을 당일치기로 여행한 사람들의 기억에 탈린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나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는 여행지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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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가 돼도 어둑어둑했던 하늘은 탈린 구시가지를 향해 걷다 보니 다행히 점차 밝아지고 있었다. 길을 많이 헤매는 편이어서 도보로 걸을 수 있는 거리라면 대중교통조차 잘 타지 않는 뚜벅이 여행자인 내가 발을 붓 삼아 하루 만에 3만 보를 걸으며 탈린이라는 도시를 스케치한 느낌은…

우선 중세 유럽 건축물들이 아주 잘 보존되어 있었다. 재미있는 게 구시가지라는 특정 구역에 건물들이 주로 보존되어 있고 관광지로 형성되어 있긴 한데, 그 구역이 꽤 넓다.

그래서 8차선 도로 뒤는 분명 현대의 건축물이 펼쳐져 있는데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면 바로 중세 유럽의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기묘한 시공간 감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걷다 보면 내가 이 시공간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느낌. 나와 이 공간이 정교하게 합성되어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든다. 현대 탈린을 걷고 있던 내가 뚜벅뚜벅 좀 걷다 보면 어느새 중세 탈린을 걷고 있는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게 탈린은 여러 시대 배경을 가진 영화 세트장을 여러 개 이어 붙여 놓은 듯한 도시였다. 거대한 퀼트 작품을 보는 것처럼 각각 시공간 배경이 다른 지역이 뭉쳐서 만들어진 도시의 느낌. 분명 크지 않은 도시임을 알고 있고 실제로도 3만 보를 걸으며 거의 주요 관광지는 다 구석구석 살펴봤을 정도로 작은 도시였는데도 다양한 시공간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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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탈린의 대표 관광지인 구시가지는 건물 자체가 주는 중세풍의 느낌뿐 아니라 간판이 매력적인 도시였다.

어떤 언어를 쓰는 여행자가 간판만 봐도 어떤 가게인지를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간판은 너무나도 효과적인 광고판이자 예술적인 조형물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가게마다 문지기처럼 인형이나 갑옷 기사 상이 장식되어 있어서 관심 없던 가게마저 한 번은 되돌아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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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당일치기를 하는 대다수의 많은 여행자가 구시가지의 전망대에서 전경을 바라보고 여행을 급하게 마무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만 봐도 탈린의 주요 관광명소는 다 봤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이것 이상 뭐가 더 있냐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랬을 것이다. 내가 크리에이티브 시티까지 여행하고 바로 숙소로 돌아갔다면 말이다.

온종일 뚜벅뚜벅 걸어서 탈린을 스케치하고 숙소까지 돌아가는 길. 다리가 너무 아파 핸드폰 앱으로 오늘 걸은 걸음 수를 세어 보니 그때가 거의 2만 5천 보 정도 걸었을 때였다. 이제 좀 숙소에 가서 쉬자는 마음으로 낮에 걸어온 길을 거슬러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길옆에 구시가지가 보였고 나는 이미 낮에 다 보고 온 그곳으로 무의식적으로 다시 걸어갔다.

모르겠다. 그때의 기분은. 그리고 나는 낮의 풍경과는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내심 볼 건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낮에는 못 본 골목이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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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지의 골목을 홀린 듯이 걷기 시작했고 상형문자로 가득했던 성벽이 있던 그 기묘한 느낌의 골목과 상점들을 보고 중세 유럽을 여행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 축에 잘못 흘러들어 그 시간에 스며든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아침에 봤던 사랑스러웠던 골목과는 다소 다른 신비스럽고 기묘한 느낌의 골목과 그 주변에 이어진 상점들. 마치 밤에만 열리는 새로운 공간에 발을 디딘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밤의 구시가지 그 골목을 내가 가보지 않았다면, 탈린은 내게 아기자기한 유럽 도시로만 남아있었을지 모르겠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충분히 그만큼으로도 아름다운 도시였다.

하지만 종일 탈린을 걸으며 느꼈던 을씨년스러운 느낌과 함께 밤의 그 골목 풍경으로 인해 내게 밤에는 마치 마녀가 살고 있을 것 같은 기묘한 도시라는 인상으로 남아있다.


어떤 여행을 할지 그건 정말 많은 선택의 변수가 존재한다. 시간, 돈 등등

하지만 때로는 정말 가성비를 따지지 않고 그곳의 구석구석을 발품 팔아가며 체험해보는 여행도 추천한다. 누군가에게는 시간과 돈 낭비의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겠지만

또 아는가. 정말 가이드북에는 없는 나만의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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