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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ythingbut Jan 26. 2024

어떤 수영장


하얀 사막에 맑은 물이 고인다. 야트막한 언덕들 사이로 패인 커다란 웅덩이에 고인 물은 일렁이지 않는다. 평화로운 공기의 흐름이 투영된 듯한 잔잔한 물결이다. 그것에는 짠맛이 없다고 한다. 수영을 하다 벌컥 들이마시게 되는 - (그러므로) 미각을 치명타를 입히는 - 염도가 없다는 의미였다. 모래뿐이다. 발바닥을 콕콕 찌를 만한 껍질류도 보이지 않는다. 언덕의 꼭대기에서 아래로 무게를 실어 슬라이딩을 하면, 모래보다도 보드라운 물의 질감이 피부에 닿을 법도 했다.  


'아주 작은 입자마저도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저곳이 바로 파라다이스인가' 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그곳은 실제 하는 장소이다. 내가 미처 가보지 못한 먼 나라의 일부였다. 풍경을 담은 카메라맨과, 그의 앵글에 담긴 수영을 즐기는 이들의 온화한 표정이 산-증거였다.

여행 프로그램이 몹시 반갑던 코로나 시국에, TV에서 보게 된 어느 이국의 모습이었다. 나는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입이 떡 벌어졌고, 목구멍에서는 언젠가는 가보아야겠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수영의 장소는 분명 하루키의 소설 속 장면보다 멋졌다. 구체적으로 소설(에세이일지도 모른다)의 제목이 생각나지는 않지만, 어느 고대 유적지의 이끼가 낀 석조의 수영장이었다. 읽으며 나도 모르게 시간을 거스르며 헤엄을 치는 나 자신을 상상해 버리는 바람에, 그곳은 내가 아는 가장 멋진 수영장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곳은 소설에 존재하는 환상이기에, 티브에서 본 그 장소는 어떠한 이견을 달 수 없을 정도의 최고의 무엇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상적인 장소를 마음에 품은 채로, 나는 수영장에 간다. 


아파트 단지 내의 수영장이다. 붕세권은 아니지만 수세권인 탓에 휴관일을 제외한 날이면 수영을 갈 수 있다. 날마다에 준하는 수준으로 헤엄을 치러 간다.


월요일의 수영장은 몹시 북적인다. 새해초 다짐처럼 의지를 불태우는 사람들로 넘쳐흐른다. 그렇지만 이내 수그러든다. 수요일과 목요일 즈음이면 그 마음들이 물러나며, 물은 더 깊고 넓어진다. 아마도 작심삼일의 원리가 작용하는 게 아닐까 싶다.

 

라인도 달랑 셋 뿐인 수영장에는 별다른 특별한 점이 없다. 그저 집에서 가깝다는 것이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날이 미치도록 맑을 대면 지상으로 향한 창을 통해 밖의 기운이 물속까지 파고드는 착각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 동네 수영장의 풍경의 팔 할은 할머님들이었다.


수영보다는 걷기를 선호하고, 걷기보다는 수다를 더 선호하는 할머님들이 주인공이다. 


잠이 덜 깬 채로, 물속을 허우적거리노라면 할머님들의 치명적인 자태가 수경을 쓴 양 눈에 스친다. 소녀처럼 사뿐하게 걷는 발걸음과, 무게를 지탱하는 엄지발가락 끝에서 시작되어 엉덩이를 스치며 허리로 이어지는 곡선이 고스란히 수중의 신비처럼 다가온다. 몸이 물 밖으로 통통볼처럼 튀어 오르는 동작도 자주 보인다(그러니까 풀장 벽면이나 라인을 잡고서 제자리 뛰기를 하는 동작 같은 것이다). 


귓가에 찰랑거리는 물소리 너머로 이런저런 말들이 들려오기도 한다. 수영을 해도 살이 빠지 않는 미스터리와 수영이 늘지 않는다는 불만들이다. 나는 이유를 알듯도 하지만 딱히 입 밖에 내지는 않기로 한다(앞으로 그럴 예정이다).


일 년에는 못 미치지만 반년은 훨씬 넘게 아침 수영을 가다 보니, 이래저래 꽤 꾸준히 얼굴을 보아버렸다. 처음에는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고, 갈수록 더 말을 섞게 되었다. 난데없이 이른 시간에 잠이 깨서 수영장에 가면, 왜 이렇게 일찍 왔는지,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가게 되면, 왜 보이지 않았는지 궁금해하신다. 40분 정도(나는 정말로 대게 수영만 한다) 수영을 하다 가려고 하면, 기본이 2시간이라며 의아해하신다(정말로 할머님들은 엄청나다!).


제법 알게 되었을 무렵에는 어떤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는 수영이, 할머님들은 수다가 무르익게 되면 라인의 한 지점에서 원치 않게 만나게 될 때가 있는데, 그날은 열심히 뒤를 돌아보며 걸으시던 할머님 한분이 구령을 외쳤다. "비켜."라는 말 한마디에 할머님들이 무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나는 홍해처럼 양갈래로 나뉜 가운뎃 길로 유유히 헤엄을 쳤다. 다소 부끄럽기도 했지만, 제법 친해졌다고 느끼고 말았다. 


물론 어쩔 도리가 없는 벽도 존재했다. 우선은 염소탕이슈이다. 정확히 어느 할머님에게서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대공원 근처의 염소탕이 맛있다는 말이 들려왔고, 연말 내내 들끓더니 염소탕은 이내 탕후루가 되었다. 급기야는 염소 한 마리를 잡수었다는 과장된 말이 들려왔다. 아, 이 이상으로 친분을 나누려면 염소인가 싶었다(쉽지 않다/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장면을 그려 넣고 싶다).


다음으로 불분명한 나의 신원 문제가 있었다. 어떤 할머님 눈에는 내가 무척 어려 보였는지, (아주 감사하게도) 학교도 안 가고 수영을 왔냐고 물으셨다. 나는 결혼을 했다는 응수로 약간의 충격을 드렸다. 그러고는 이어지는 대화에서 아이가 없다는 답으로 본의 아니게 연이은 충격을 드렸다. 그 후로 나의 포지션은 새댁이 되었다. 결혼을 한지가 수해 되었다고 해도 다시 새댁이 되었다.


세대를 거스를 수 없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나는 여전히 수영이 늘지 않는다는 어느 할머님의 속상한 마음에 살포시 위로를 건네드리며 나름의 친분을 쌓았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단지 내에 사람들이 죄다 수영을 하러 왔는지, 풀장 안이 빽빽했다. 그런데 그분이 또 라인의 정중앙을 가르며 접영을 하고 계셨다. 아침 수영에서도 좀처럼 주변 사람들과 라인을 나누어 쓰지 않는 남성 분이었다. 라인을 독차지하고 뽐내는 접영은 하나도 멋지지 않았는데, 그날은 유독 밉상이었다. 나는 모른 척 그분이 점유한 라인을 침범했다. 유유히 나의 속도대로 수영을 했다. 그러자 그분도 이내 영법을 바꾸었다. 그러자 할머님 한 분이 빙그레 웃으셨다.


무표정하게 있을 때면, 단단히 화가 난듯한 표정인 할머님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더 만개한 듯한 웃음꽃이었다. 라인 침략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가만히 쉬고 있을 때였다. 마침내 그 한마디가 들려왔다. 할머님은 활짝 핀 얼굴로 "같이 걷자" 하셨다. 하하하,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매일의 수영장에는 매일의 할머님들이 실제 했다. 


평상복에서 수영복으로 탈바꿈을 하면, 아이의 표정이 되기도 하고, 몇 바퀴를 쉬지 않고 헤엄을 치며 활력을 뽐낸다. 혹은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며, 이상에 도달하지 않아도 흔쾌히 현실에 머무는 걸음을 고수한다. 그런 그녀들이 아주 가까이에 있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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