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아 리 Oct 11. 2021

동화 창작은 처음이라

잠잠이 노트와 24색 색연필, 그리고 드로잉


    어린 시절, 잠자리에 엄마가 세계 명작 동화 같은 카세트테이프를 틀어준 기억이 있다. 하도 책을 읽어달라 조르는 나의 성화에 지친 엄마가 낸 묘책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통 동화에 대한 기억이 없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으니 동화책도 많이 읽었겠지 싶지만, 어째 동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사람 치고 동화에 관련된 멋들어진 추억 하나 떠오르지 않는다.


    집 근처 도서관에서 주말 사서로 일한 적이 있었는데, 이따금씩 어린이 도서가 종합 자료실로 잘못 반납되어 오는 경우가 있었다. 동화책 두께가 얼마나 얇은지, 책 등에 붙은 청구기호 스티커가 한눈에 보이지 않아 어린이 자료실 선생님들은 책 정리하기가 참 힘들겠다 생각했다.


    잠잠이의 첫 동화책 <Guess How Much I Love You>에는 아빠와 아기 밤색 토끼가 등장한다. 아기 토끼는 자신이 아빠 토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끊임없이 표현한다. 아기 토끼의 두 팔 만큼, 아기 토끼의 점프만큼, 저 멀리 있는 강에 닿을 만큼. 그럴 때마다 아빠 토끼는 자신의 긴 두 팔 만큼, 아기 토끼를 훌쩍 뛰어넘을 만큼 높은 점프만큼, 강 건너 언덕 너머에 닿을 만큼 아기 토끼를 사랑한다고 응답한다. 졸린 아기 토끼는 마지막으로 하늘에 뜬 달에 닿을 만큼 아빠 토끼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잠든 아기 토끼 옆에 누운 아빠 토끼가 말한다. 하늘에 뜬 달에 닿았다가 다시 돌아오는 만큼 아기 토끼를 사랑한다고. 아, 이토록 짧은 이야기 안에 엄청난 감동이 담겨있을 수 있구나. 잠잠이를 낳고 동화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I love you right up to the moon AND BACK.






    예전에 구상했던 짧은 이야기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고양이와 고슴도치에 관한 이야기인데 당시에는 동화를 구상하는 스스로가 어쩐지 부끄러웠다. 그런데 그 짧은 이야기를 쓰며 나는 참 행복해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기는 부끄러워 혼자 끄적이고 말았지만. 그리고 그로부터 더 오래전에 비눗방울을 소재로 동화를 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피스 웍스에 가서 드로잉 노트 한 권과 24색 색연필을 사 왔다. 당시 내 머릿속에는 '동화 = 그림책'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기 때문에 동화를 쓰기 위해서는 그림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동화책을 쓰려면 그림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여겼던 거다. 그러나 창작 그림엔 영 소질이 없었다. 머릿속에는 그림이 그려지는데 도화지만 펼치면 말 그대로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어버렸다. 인터넷을 검색해 귀여운 그림이 보이면 따라 그리는 걸로 그림 연습을 해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 속도면 평생에 내 이름을 건 동화책 한 권 못 내지 싶다.



오피스 웍스에서 구매한 드로잉 노트와 24색 색연필. 인터넷을 보고 따라 그려 본 고슴도치 드로잉 네 컷.



    잠잠이가 태어난 후 약 3개월 간은 서너 시간마다 잠에서 깨서 우는 잠잠이를 먹이고 재우느라 바빴다.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뜨문뜨문 이야기가 떠오르면 휴대폰에 기록했다. 아이디어의 대부분은 잠잠이의 행동 속에서 얻었다. 이도 아직 나지 않아 잇몸으로 엄마의 손을 앙 무는 모습에서, 세상 평온하게 잠을 자는 모습에서, 아빠를 보고 반기는 모습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림은 도통 엄두가 안 나는 바람에 연습을 소홀히 했다. 어쩌다 한 번씩 잠잠이를 모델로 스케치를 하는 식으로 연습했다. 자는 모습을 보며 크로키를 하듯 쓱 그려보기도 하고 휴대폰에 찍어놓은 사진 중에서 하나를 골라 따라 그려보기도 했다.



잠잠이를 모델로 그린 '좀비 아기' 스케치 (왼), 스와들 속에서 자고 있는 잠잠이 드로잉 (오)



    잠잠이가 6개월이 되자 육아가 비교적 수월해지면서 '육퇴'가 가능해졌다. 이때 즈음에는 그림 연습에 완전히 시들해져서 주로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블로그로 육아일기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그림 하나 완성해보고 싶단 의욕이 생겼다. 창작 동화 삽입 일러스트가 아니어도 좋으니, 아무 그림이나 딱 하나만! 마음을 먹고 육퇴 후 이삼십 분씩 그림에 몰두했다. 그리는 과정을 보면 정말 대중없었다. 휴대폰에 찍어놓은 잠잠이 사진을 보고 노란 색연필로 얼굴과 몸통을 뭉뚝하니 그리는 걸로 시작했다. 밝은 색으로 시작해서 점차 어두운 색으로 명도를 높여가며 얼굴과 머리색을 메꿨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의구심이 들 때마다 아무렴 어때, 하며 용기를 북돋았다. 진전이 없는 것 같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얼추 그럴싸해졌다. 비록 사진을 보고 따라 그린 그림이지만 전문가용 종이나 값비싼 색연필 없이도 얼마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구나, 자신감이 생겼다.



그럼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남편이 액자에 넣어주었다.



    동화 일러스트레이터가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이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다.

이전 01화 라이프 오브 마'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