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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아 리 Oct 18. 2021

그래, 출산은 동화보단 에세이더라 (3)

호주에서 유도분만으로 출산하기

(사진: 출산 관련 영어 단어를 공부한 노트)


    12시 반 경, 무지막지한 진통과 함께 병실로 들어갔다. 미드와이프 Suzie가 와서 뭘 어떻게 해줄까 물었다. 뭘 어떻게 해주냐니? 당연히 '에피듀럴(무통주사) 맞을래?'라고 물어볼 거라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출산 전에 마취 용어를 공부해놓길 천만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에피듀럴이 있는지도 몰랐을 거고, 미드와이프는 내가 말하기 전에는 마취를 안 해줬을 거 같은 쎄한 느낌. 이게 바로 호주의 자연주의 분만인 건가.


 Drugs in labour (출산 중 약물의 사용)

1. Gas / Nitrous Oxide (이산화질소): 아기에 무해함. 진통 중 고통이 느껴질 때마다 산모가 리모컨을 이용해 필요한 만큼 약물을 투여할 만큼 순한 약물에 속한다. 치과 치료를 두려워하는 아이들에게 사용하는 happy gas / balloon gas 같은 것. 하지만 그만큼 지속력이 약하고 고통의 감소량이 적다. 호기심 강한 파트너들이 의료진 몰래 해보기도 한다고 한다.
2. Morphin (모르핀): 고통이 많이 감소된다. 하지만 아기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3. Epidural (에피듀럴): 임산부라면 제일 많이 들어봤을 무통주사. 고통의 감소량이 크다. 하체의 고통만 줄어들기 때문에 직접 출산이 가능하고, 무통 출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너무 빨리 투입하게 되면 출산 중에 고통을 다시 느끼게 될 것이고, 너무 늦게 투입하게 되면 의사의 지시에도 아기를 푸시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기 때문에 투여할 수 있는 타이밍이 정해져 있다. 때를 놓치면 고통을 다 느끼면서 출산해야 하므로 무통 분만을 원한다면 미리 의료진에게 알려야 한다.


    나는 에피듀럴을 요청했고, 미드와이프가 마취과 의사에게 콜을 했다. 마취과 의사를 기다리는 동안은 해피 가스(아산화질소)를 마시면서 계속해서 병실 안을 걸어 다녔다. 남편이 없었다면 의자에 앉고 일어서는 것도 힘들고, 걸어 다니지도 못하고 혼자서 너무 고통스러웠을 거다. 진통은 계속되는데 해피 가스는 효과가 들질 않고, 아기가 나오려면 아직 멀었다니!


    마취과 의사를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마취과 의사를 부른다고 바로 오진 않는다는 거다. 당시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제대로 기억은 안 나지만 나 전에 먼저 에피듀럴이 더 필요한 산모가 있어 거기에 들렀다 온다고 미드와이프가 말했던 거 같다. 호주에서 출산을 할 예정이라면, 에피듀럴은 반드시 사전에 요청하자!




    드디어 마취과 의사가 왔다. 본인을 소개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에피듀럴을 맞기 위해 침대 끝에 걸터앉아 몸을 앞으로 수그렸다. 의사가 척추에 주삿바늘을 꽂고 에피듀럴을 주입하는데, 진통의 고통 때문에 바늘 꽂는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등을 따라 차가운 물줄기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에피듀럴이 주입된 것이다.


    에피듀럴은 자동으로 일정량이 계속해서 주입된다. 산모가 스스로 주입 버튼을 눌러 일정량보다 더 많은 양을 추가로 주입할 수 있다. 그런데 주입할 수 있는 총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인지, 몇 분당 몇 미리로 제한돼있는지 때문인지는 몰라도 에피듀럴을 매번 추가 주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에피듀럴을 맞고 시간이 조금 흐르자 몸이 편안해졌다. 조금씩 웃음을 되찾았고, 이게 바로 천국이라는 거구나 싶었다. 내진 결과 3cm가 열려있었다. 양수를 터뜨리기로 했다.


    그런데 한 시간 정도 에피듀럴 효과가 있더니, 차츰 그 효과가 떨어지고 진통이 다시 시작됐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인생 최고의 고통이었다. 허리가 부러진 듯이 아프고 자궁을 누군가 마구 칼로 헤집는 듯한 고통이 들었다. 한두 번이야 어떻게든 이 꽉 물고 참는다지만, 진통이 몇 시간 동안 계속되니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한 번의 진통이 지나가면 다음에 밀려올 진통에 미리 겁부터 먹고 눈물이 났다. 이러다 정말 죽는 거 아닐까, 혼절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사람들이 죽을둥해야 아기가 나온다고 하던데 과장이 아니었다. 정말로 '아, 이젠 정말 죽는구나' 싶을 정도가 돼야 아기가 나오더라.


    2시경, 마취과 의사가 다시 와서 에피듀럴을 추가 주입했다. 효과가 있기까지 10분가량이 걸릴 거라고 했다. 효과가 들기 전까지 진통이 있을 때마다 해피 가스를 마시라는데, 해피 가스를 마시면 입이 텁텁해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거 같아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생 공기를 마시며 호흡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아파 죽겠는 와중에도 정신은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미드와이프가 계속해서 해피 가스를 마시라고 했다. 지금 당장은 효과가 없는 거 같지만 계속하면 있을 거라며.


    그러던 중, 갑자기 아랫부분에 아기의 머리가 아주 꽉 끼는 느낌이 들었다. 아기가 나오려나보다 싶었다. 아기가 나올 거 같다고 말하자 미드와이프가 내진을 했다. 9cm가 열려있었다. 이제 아기를 낳는 거냐고 묻자, 그렇다고 했다. 3cm에서 9cm까지 한 시간 만에 급속하게 열렸다며 놀라는 투로 말하는 걸 들었다.


    2시 반부터 본격적인 푸시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에피듀럴이 제대로 들었다. 자궁 수축이 느껴지지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이제 아기만 밀어내면 되는데, 아기를 밀어내는 것도 쉽지가 않았라. 대변을 보듯이 힘을 주라는데, 화장실에서 끄응하는 수준으로는 턱도 없었다. 한두 번의 푸시로 아기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시계를 보면서 3시까지 낳자, 3시까지 낳자 혼자 생각했던 거 같다.




    출산 전에 산모 수업을 통해 출산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영상 속 산모들은 아랫도리를 가리지도 않고 미드와이프 앞에서 적나라하게 아기를 낳고 있었다. 저 모습의 내 미래의 모습이라는 생각에 불쾌감이 먼저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미드와이프 딱 한 명만 붙어서, 내 다리 위에 천이나 가운을 덮고 덜 창피하게 낳아야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아기를 낳을 때가 되니까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미드와이프들이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어줘서 벌거벗었다는 수치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기를 낳느냐 마느냐에 내 생사가 달려 있었기 때문에 가리고 말고 할 정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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