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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민 Apr 12. 2019

이것만 하면 되죠?

Week 5.5 망중한(忙中閑)

어릴 때는 학습에 대한 동기가 뚜렷하게 없었다. 엄마의 잘했다는 말 한 마디나 나에게 오롯이 주어진 컴퓨터 게임 1시간이 최고의 공부 동기였다. 그때는 거기까지만 하면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때 숙제를 하고 나서나 시험을 친 뒤, 결과를 보며 나를 보던 부모님의 표정이 내가 공부하도록 해 준 가장 큰 동기가 아니었나 지금도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 수능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부모님들이나 학교, 학원 선생님들이 으레 하시는 말씀들이 있었다. 대학 가면 살이 빠지고 피부는 깨끗해지며 이성이 줄을 설 거다. 지금 고생하면 나중에 고생 안 한다. 에이, 설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품으며 열심히 공부했다.


재수를 하면서는 나 자신에게 혼자 다짐했던 것이 하나 있다. 혹여나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더라도, 나 자신을 너무 탓하지 말자. 이런 말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납득할 수 있게 노력을 하자.(노력에는 양도 중요하지만 질 또한, 어쩌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번 주는 병원 전체가 이사하는 관계로 실습학생들은 일주일 정도 휴가(돈을 내고 다니니 휴가는 아니다ㅠㅠ)를 부여받게 되었다. 주변에서는 가까운 해외로 여행을 많이 갔지만 나름 피곤했던 나는 아무 고민 없이 본가에서 푹 쉬었다. 쉬는 동안 이제까지 5주 동안 돌았던 과에 대한 세부적인 지식 복습은 기본이고 6주째에 실습할 과에 대한 예습까지 하려고 했지만, 당연히 불가능했다. (계획은 세우면 반도 못하는 것 같다.)


의대를 다니기 전까지는 한 번도 밤을 새본적이 없었고, 내 머리가 이토록 멍청한지도 몰랐으며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것도 학교를 오래 다니면서 깨닫게 되었다. 지식은 마치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할수록 생각나는 코끼리 같아서 기억하기 싫은 것일수록 오랫동안 똬리를 틀고 머릿속에 남아 있었고, 정작 중요한 것들은 기억하려 하려고 하면 할수록 책 몇 페이지 왼쪽 셋째 문단의 네 번째 줄의 중간쯤에 있는데! 와 같이 알고 있어도 쓸데없는 자질구레한 정보로만 흘러들어왔다.


의학에서 잘못된 정보의 습득이나 최신 지견의 늦은 습득은 환자의 치료 성과와 깊은 관계가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까지 임산부들의 입덧 치료제로 쓰이던 탈리도마이드는 부작용으로 기형아 출산이 대두된 이후로는 다발성 골수종의 치료에만 조심스레 쓰이고 있다. 또한 HIV 바이러스 감염 시 고강도 항레트로바이러스 요법을 시행해야 하는 적응증도, 예전에는 C형 간염 동시 감염자, RNA copy수가 10만 개 이상, 50세 이상 등등 수많은 기준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HIV 감염이 확인됨과 동시에 고강도 치료를 시행한다. 


예전 본과 1, 2학년 때 시험기간 때 방대한 공부량에 치여 의욕이 나지 않을 때면, 동기들끼리 힘내랍시고 서로 해주던 말 중에는 이런 말들이 더러 있었다. "환자 죽이기 싫으면 공부해야지! 일어나 어서!" 그때는 웃으면서라도 넘길 수 있었지만 병원에 와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의학에서 무지는 죄와 동일시된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공부는 혼자서 해야만 한다. 2천 년 전 기하학의 대가였던 유클리드 역시, 쉽게 공부할 수 없는 방법이 없냐고 묻는 이집트 왕에게 단호하게 "기하학에 왕도는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한 걸 보면 불변의 진리임에는 틀림없다. 스카이캐슬에 나오는 것처럼 수백만 원짜리 코디를 붙이면 누구나 공부를 잘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분명 아이든 부모님에게든 문제가 있다. 공부는 스스로, 능동적으로,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비단 의학에서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나 학문에서든, 세상은 언제나 빠르게 변하고 있다. 다른 어떤 대학을 가서 무엇을 했든, 또 다른 나 또한 역시 똑같은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고 똑같은 다짐을 수백 번 했겠지.


출처 : EBS 학교란 무엇인가


유명한 에빙하우스의 망각 곡선.(에빙하우스는 망각보다 지식 보유에 초점을 맞추어 저 곡선을 '보유 곡선'이라 명명했다.) 지식이 점점 잊히는 데 걸리는 시간 역시 갈수록 짧아진다는 내용이다. 가지고 있는 지식도 저렇게 되는 마당에 새로운 지식까지 꾸준히 익히기는 까다로운 일이다.


배움은 평생 이어져야 하며, 그렇기를 거부하는 것은 죽음과 같다.


망중한 : 바쁜 가운데 잠깐 얻어 낸 틈



대문사진 출처 :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5477683&memberNo=22718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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