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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민 Jun 23. 2019

인간은 정말 평등한가?

Week 15. 가정의학과 실습(이런저런 단상)

인간은 고대 씨족 중심의 부족 사회에서, 절대적 권력을 가진 1인 중심의 군주제를 거쳐 현재 공화제를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까지 (대부분) 도달했다. 근대국가에서 민주주의 기본 이념은 '천부인권' 사상에 근거한다.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자연법('자연'이니 인위적인 법률이나 믿음보다 앞선다) 사상의 영향을 받아 자유와 평등, 종교, 출판 결사의 자유 등 인간의 천부적 권리는 장소와 시간을 초월하여 보편적임을 선언하였다. 1988년부터 시행된 대한민국의 헌법 제10조와 11조에서는 보다 나아가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여기서부터 모든 갈등은 야기된다.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는, 몇 백 년 전 사람들이 듣는다면 유토피아나 다름없는 세상인데 왜 불행한 사건은 끊이지가 않고, 크고 작은 다툼은 항상 일어나는가?


아주 어릴 때부터 '인간은 평등하다'는 교육을 받고 자라지만,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대우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인간이 평등한데 왜 옆집 엄마 친구 아들은 1시간 공부하고 95점을 받고, 나는 1시간 잤는데도 70점을 받는가? 왜 초등학교 4학년은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축구를 먼저 하다가도 늦게 온 6학년에게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하는가? 왜 질병은 하필이면 낮은 사람에서 더욱더 가혹한가?


인간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그렇기에 '평등'이라는 가치는 마땅히 더 존중받아야 하고, 기회의 평등과 같은 형평성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어릴 적 철없이 차별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형평성을 위한 시도들이었다는 것을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외래 참관을 하다 보면 정말 기구한 운명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딱한 처지의 분들을 많이 보게 된다. 왜 종교가 존재하는지, 믿음이 사람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깨닫게 되는 한 주였다.




의료는 다른 재화와 매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환자가 일단 병원에 오면, 특히 응급실에서는 살리고 본다. 이 사람이 어디에 사는 누군지, 병원비를 낼 형편이 되는가 따위는 당장 중요하지 않다. 법정보다는 오히려 응급실에서 모두가 정말 '평등'해진다.


몇 년 전 한창 이국종 교수님의 영웅적 일화가 유행처럼 번질 때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이국종 교수님이 절규하다시피 고충을 토로하고 개선방안을 아무리 요구해도 현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당시 잘 알고 지냈다던 국회의원의 한마디가 일품이다.


대한민국에서 '중증 외상 분야'만 문제인 줄 아세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국방
문제가 없는 분야가 있는 줄 아세요?


그렇다.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의료만 문제가 아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생각의 핀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https://youtu.be/A_zuHvBlvkA

오랜만에 봐도 정말 명강의다


이국종은 존경받아야 할 영웅이 아니다. 쌓아올린 업적과 누구보다 투철한 사명감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다만, 모두가 안타까워해야 할 현실의 분신이다. 의료계 종사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국종이 저 멀리에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를 수 밖에 없음이 정말 안타깝다.


대한민국 응급실에는 수십, 수백 명의 이국종이 있다. 의사를 기계의 톱니바퀴 같은 소비재로 대하다가는 몇십 년 후 국민을 치료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다. 지금 같은 현실에서는 어쩌면 노량해전에서의 이순신과 같은 숭고한 희생이 있어야만 이야기를 들어줄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맞는 길인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해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학생인 내가 봐도 지금의 상황은 지속 불가능하다는 거다. 점점 의사의 역할이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또 하나의 톱니가 될 미래를 마주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허리가 아파 정형외과에도 가보고 한의원에도 가본 적이 있다. 환자 입장에서 느끼기에 치료는 거의 동일했다. 정형외과에서 엑스레이를 찍고, 염증이 조금 있는 것 같으니 2층으로 올라가 물리치료를 받고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다. 공감 능력에서는 차라리 한의원이 낫다. 직접 침을 놓고 말을 걸어주며 똑같이 물리치료를 받게 한다. 사실 그런 단순 염증성 질환은 시간이 약이다. NSAID(비스테로이드 항염증제)를 복용하면 그 기간이 다소 줄어들긴 하겠지만 경험상 크게 영향을 미치진 못하는 것 같다.


그럼 대체 환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대학병원 가정의학과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환자 분류(?)다. 예를 들어 환자가 기침이 멈추지 않아 호흡기 내과에 가고 싶어 왔더라도 다시 정확히 진단하고 해당 과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한다.(사실 이런 역할은 지역 1차 의료기관에서 주로 담당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 기능이 점점 모호해지는 중이다) 가장 강조하는 교육은 EBM(Evidence Based Medicine, 근거 중심 의학)과 환자 면담 기법이다.


한의사와 의사를 가장 명확하게 구별해 주는 것은 근거 중심 치료의 여부다. 한의학의 치료는 마치 사주, 운세를 보는 역학과 큰 틀에서 비슷하다. 수천 년 동안의 경험과 고서를 기반으로 치료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10명 중 9명에게 효과가 있더라도, 1명에게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을 가능성조차 알지 못한다.


임상 통계에서는 근거의 수준이 낮은 순서부터 환자-대조군 연구, 코호트 연구, 무작위 대조 연구(RCT), 메타분석, 통합 분석(Pooled Analysis)까지 많은 연구방법이 있다. 흡연과 폐암 유병률의 연관성을 알고 싶다면, 환자-대조군 연구는 폐암에 이미 걸린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흡연 여부를 살피는 후향적 방식이다. 인과관계 증명에는 유용하지만 연구자가 임의로 환자를 선택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코호트 연구는 현재 담배를 피우는 사람과 피지 않는 사람으로 그룹을 나누어 시간에 따라 폐암 발병률에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는 전향적 방식이다. 임의 선택과 같은 문제는 없지만 시간과 수고가 많이 든다.


환자 선택과 같은 바이어스를 줄이기 위해, 무작위 대조 연구에서는 대조군과 실험군을 무작위로 정한다. 예를 들어 혈압을 떨어뜨리는 것이 심혈관계 질환에 예방이 되는지 알고 싶으면 인구 구성이 비슷한 몇 개의 그룹에서 골고루 100명씩을 뽑아 균질한 A와 B라는 그룹을 만든 후, A 그룹에만 혈압을 떨어드리는 약을 주는 것이다. 그 후 A와 B 그룹에서 심혈관계 유병률의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면 된다. 혈압 말고 심혈관계 질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다.


이러한 무작위 대조 연구들을 한 논문 여러 개를 모은 후 분석한 것이 메타 분석이며, 논문마다 다른 분석 방법을 써 생길 수 있는 결함들을 줄이는 방법이 통합 분석이다. 통합 분석은 메타 분석에 쓰인 논문들의 raw data를 모아 분석을 하게 된다. 대규모 연구에 주로 쓰이는 만큼 자본과 시간이 부족하면 할 수가 없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들을 모두 거친 것들이 현재 의학에서 쓰이고 있는 치료이다. 정형외과에서 그냥 NSAID(널리 쓰이는 항염증제)를 처방해주는 것이 이러한 배경들을 거쳐왔다는 생각을 하면 신기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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