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13, 14 부인과 실습
어떤 이들에게 당연한 것이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은 아니다. 어이없게 보이겠지만 가끔 샤워를 하다가도 물이 이렇게 콸콸 쏟아져 나오는 것, 차갑다가도 어느새 더운물이 흐르는 것 등이 손짓 하나에 가능하다는 것에 감탄한다. 그러다가,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에서는 우물에서 물을 긷기 위해 수 km를 걸어야만 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리고 내가 멈추지 않는다면 물이 끝없이 흩뿌려질 샤워기 밑에서 무력감을 곱씹곤 한다.
소아과 실습 때 결핵의 치료 가이드라인이 왜 변화가 없는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있는 것을 외우기에도 벅찬데’라는 철없는 생각을 하며 모르겠다고 했다. 돈이 안되니까 그렇다는 답을 하셨다. 선진국은 이미 관심 없는 병이니 몇십 년째 치료약제가 똑같다는 거다. 실제로 결핵의 치료는 INH, RIF, EMB, PZA 이렇게 4가지만이 잠복결핵인지, 활동성 결핵인지 그리고 소아인지 성인인지, 임산부인지에 따라 몇 가지 방법만으로 쓰인다. 다른 병, 특히 각종 암의 치료방법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데에 비하면 큰 차이가 있다. 정말 과학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영역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의지가 없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2주간 부인과(종양, 불임)를 실습하며 가장 기억에 남은 환자는 터너 증후군을 가진 중학생이었다. 터너 증후군은 선천적 염색체 이상의 하나로, 정상 여성의 성 염색체가 XX인데 비해, X 염색체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각종 증상과 합병증이 발생한다. 작은 키가 특징적이며, 지능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다. 생식기는 여성의 형질을 띠지만, 난소의 발육이 완전하지 못해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는다.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은 불임이라는 말과 깊은 연관이 있다. 2000명에서 2500명 당 1명이라는 꽤 높은 유병률을 가진다.
환자는 평범한 여중생이었다. 이미 에스트로겐 호르몬 치료를 시작한 상태로 가끔 피가 비치는 것 외에는 겉보기에 아무 이상이 없어 보였다. 에스트로겐은 자궁내막을 증식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계속해서 에스트로겐만 투여 시 자궁내막증식으로 인해 자궁내막암 등 각종 암의 위험도가 올라간다. 또한 혈전 생성의 위험도도 몇 배로 상승시키기 때문에 에스트로겐 치료만 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위험하다. 이번 내원은 프로게스테론 치료를 추가해 그러한 부작용도 줄이고, 나이에 맞게 자연스러운 월경을 시작하기 위함이었다.
같이 온 할머니는 손녀가 아이를 가질 수 없냐고 물으셨다. 난소가 없기 때문에 인공수정을 이용해도 자연적 임신은 불가능하며, 골다공증 등을 예방하기 위해 평생 호르몬 약을 복용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몇 번이나 되물으시고 나서야 “생리도 하는데 어찌 그럴꼬? 이런 병도 있나...”며 혀를 끌끌 차셨다. 터너 증후군 환자는 당뇨, 고혈압, 심혈관계 질환, 염증성 장 질환, 대장암, 청력 이상 등의 위험이 있어 계속해서, 오랫동안 주기적으로 해당 검사를 받아야 한다.
타목시펜은 유방암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치료 약제로, 재발을 줄이기 위해 술후에도 계속해서 쓰인다. 타목시펜은 SERM(Selective Estrogen Receptor Modulators)의 종류 중 하나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정말 신기하게도 유방에서는 유방조직의 성장을 저해시키는 길항작용을 하지만, 자궁내막에서는 증식을 부분적으로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본래 에스트로겐의 작용을 줄이기 위한 피임약으로 고안되었지만, 배란을 억제시키기보다는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아 피임약 대신 가장 널리 쓰이는 유방암 치료제가 된 흥미로운 일화도 있다. 이러한 타목시펜의 선택적 작용은 자궁내막암, 고지혈증, 혈전 생성, 일부에서는 인지능력 저하와 같은 부작용을 일으킨다.
유방암 치료의 일환으로 타목시펜 복용 중 아이를 간절하게 원한 분이 계셨다. 폐경에 가까운 나이였고, 자궁내막암의 위험도를 생각하면 의사로서 권고할 수 있는 최선의 치료는 어떻게든 임신을 시도하는 게 아니라, 자궁절제술을 하는 것이다. 타목시펜의 부작용을 생각하면 논리적이다. 교수님은 환자 분에게 몇 번이고 임신이 어려운 이유를 설명하셨다. 어머니가 되는 것, 그리고 그 이후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최선의 치료로 아기집을 영영 없애야 한다는 말하는 의사의 기분은 어떨까.
불과 몇 주 전에는 출산을 앞둔 산모들을 어떻게 하면 잘 케어할지, 또 갓 태어난 아이들을 어떤 방법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게 할지에 대해 공부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여성에 있어 임신은 당연한 일이었고, 선천기형을 가진 아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 그렇게 와 닿진 못했었다.
다른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 사람이 겪은 모든 것을 내가 그대로 겪을 일도 없을뿐더러,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어쩌면 나는 듣는 척, 공감하는 척을 하는 법만을 배우는 것만 같다.
세상을 알아가면 알수록 당연한 것은 절대 없으며 쉬운 것 역시 하나도 없음을 매번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