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저만금(家书抵万金)
어느 날, 한국에서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고향의 이웃 한 분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결코 슬픔의 크기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안타까운 감정이 더욱 극대화되는 느낌이었다.
돌아가신 이웃 아저씨는 어눌한 말투와 느린 걸음걸이를 가졌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시는 분이었다. 아저씨는 동네에서 폐지 모으는 일을 하셨는데, 우리 부모님이 운영하는 슈퍼에 매일 들러 폐지를 가져가셨다.
아저씨는 더운 날에는 잠시 가게에 들어와 쉬었다 가시고, 추운 날에는 난로를 쬐다 가시곤 했다. 특별히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부모님과 아저씨 모두 이미 익숙해진 생활이었다. 간식을 먹고 있을 때 들어오면 부모님께서는 아저씨가 먹을 복이 있네,라고 말하며 같이 먹자고 권하시곤 했다. 나도 몇 번 마실 것을 가져다 드린 적이 있다.
어느 날은 부모님이 가게를 며칠 비우고 외출에서 돌아오셨는데, 가게 앞의 식물들이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말라죽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알고 보니, 집을 비운 것을 알고 아저씨께서 공중 화장실에서부터 몇 번씩이나 물을 담아와 식물에 물을 주셨던 것이다.
이렇게 서로 도움을 주며 이웃사촌으로 지낸 지 몇 년, 부모님뿐만 아니라 우리 자매들과도 자연스레 친근해졌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내리면, 길 위에서 마주친 아저씨는 너무나 환한 미소로 우리에게 인사해주셨다. 언니는 이전에, 우리가 고향에 갔을 때 동네에서 제일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 아저씨인 것 같아,라고 말할 정도였다.
폐지가 쌓인 리어카를 끌다가 음주차량에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왜 선한 사람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안타깝고 원망스러웠다. 연락을 받을 당시, 내 옆엔 친구가 함께 있었지만 나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좋은 분이셨는데, 너무 안타까워”
“네가 이렇게 먼 곳에서도 눈물을 흘리는 걸 보면 분명 좋은 분이셨을 거야”
‘가서저만금(家书抵万金)’
이 성어는 타지에서는 가족들의 소식이 더욱더 반갑고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먼 곳에 있는 동안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감정이 더욱더 애틋해지고, 그들의 소중함을 몸소 느꼈다. 그 반대로 슬픈 소식은 더욱 슬프게 느껴졌다. 가시는 길 인사도 드릴 수 없다는 사실에 죄송스럽고 안타까웠다.
시간과 공간의 유한함은 가끔 우리의 감정을 극대화시킨다.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우리들은 언젠간 이별해야 하고, 항상 같은 곳에 있을 수 없으니, 곁에서 함께하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유학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다시는 그분의 웃음 섞인 환영을 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