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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 Nov 24. 2022

장기요양급여비용과 삥땅

장기요양급여비용과 삥땅

시골에 계신 아버지에게 아주 은밀한 전화가 왔다. 엄마가 밭에 나가고 없는 시간이다.

"너한테 아무래도 어려운 부탁을 해야겠다."

그다지 심각할 일도 없으신 분이 무슨 일인지 한숨이 섞여 있다. 사연인즉슨 할머니 간병비가 이번달에 14만원이 나왔다는 것. 골절로 다리를 잘 못쓰시는 할머니가 방문 간병을 받고 계신데 그 비용이 갑자기 두 배로 올랐다고 한다.  아, 아버지가 좀 부담이 되시는구나. 삥땅도 눈치 안 채게 해야 하는데 매달 15만원은 좀 버겁겠구나 싶었다. 명절날 어머니가 마당 한 귀퉁이에서 기도 안 찬다며 푸념하던 게 생각났다.

"두 노인네가 어찌나 쿵짝이 잘 맞는지 서울로 니네한테

택배보낼때 만원씩, 오천원씩 빼서 간병비를 모아서 내드라. 내가 그거 안 줄까 봐? 할일이 없으니까 머리를 그런 데 쓰고 있다."

그순간 나는 삥땅을 치는 아버지가 왜 그리 순진하게 느껴졌을까. 재작년 된통 앓고 나서 경제권을 엄마에게 빼앗기신 아버지는 농사에서도 손을 떼시고 낮시간을 거의 할머니와 보내신다. 100살이 넘도록 며느리 눈치 보이게 죽지도 않는다는 할머니. 그런 노모와 낼모레면 여든이 되는 아내 사이에서 아버지는 아직도 갈팡질팡이다. 하지만 60여년 된 노하우가 있긴 하다. 어머니가 없을 때는 할머니 방문 턱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문턱을 괴고 낮잠도 자는데, 어머니가 들어오면 무심한 척, 무정한 척 연기를 한다.

각설하고, 갑자기 두 배로 뛴 간병비에 아버지가 내게 SOS를 쳤다.  자식 중에서도 만만한 자식이 있으시니.

일단 간병비가 두 배로 뛴 사연을 알아야겠어서 건강보험관리센터와 노인복지센터로 바삐 전화를 돌렸다. 문제는 나였다. 내 부양가족으로 부모님과 할머니를 새로 올렸더니 내 소득 비례로 보험 적용이 50%에서 15%로 떨어졌단다.

"잠시만요잉~ " 여유롭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안내하던 그 지역 건강보험센터 직원이 할머니만 따로 지역건강보험으로 빼면 간병비 지원을 원래대로 50%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오키. 일사천리로 할머니를 지역 보험으로 바꿔놓고, 건강 보험이 얼마나 나올지 물었다. 2000원 정도 나온단다. 부담없네. 따로 용돈도 못 드리는데 아버지 걱정 덜어드릴 겸  노인복지센터에는 고지서를 서울로 보내라 하고 건강보험료는 콧노래 흥얼거리는 그 직원에게 내 통장에서 자동이체해 달라고 요청했다.

두 달 뒤, 간병비는 원래보다 다운이 됐는지 69,810원이 나왔다. 그런데 건강보험료가 통장에서 안 나갔다. 전화해 보니 장수할머니라 군청에서 1년간 대신 내준다고 한다. 오래살고 볼일.

똘똘하게 다 처리했다고 시골집에 전화를 했다. 물론 어머니가 없는 시간에. 어머니가 알면 불호령이다. 어머니 당신이 좀 고까워도 서울살이 버거운 자식한테 쓸데없이 짐지우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기저기 잔소리할까봐.

아버지는 매우 감격하셨다. " 너한테 큰 부담을 줬다. 그래도 니가 나 봐줘야지." 하신다. 스피커폰으로 할머니도 추임새를 넣으시며 "고맙다, 고마워!" 하셨다. 서울서는 술한잔 값이지만 두분에게는 나름 한달 시름이었을 것이다.

물론 할머니는 현재 정신도 맑으시고, 몸도 크게 아프신 곳 없고, 음식도 잘 드신다. 다리는 좀 불편하시지만 맘만 먹으면 대문밖에도 나가실 수 있다.

"내가 지금 꼭 간병이 필요한 것은 아닌디, 나중을 생각해서 끊지도 못하겄다."

훗날(?) 정신도 흐려지고 대소변도 못 처리하실 때가 되면 며느리한테 그 뒷수발까지 맡기고 싶지는 않으시단다. 60여 년 늙은 시어머니 모시고 살았고, 벌써 여든이 낼모레라 짠하고 미안하단다. 따로 간병보험을 든 것도 아니고, 어렵사리 장애등급 받아서 간병수발 혜택을 받고 있으니 당장 돈이 조금 들더라도 끊지 말고 잇는 게 낫다는 것이 할머니 생각이시다. 글쎄, 나는 어떤 게 이득인지 모르겠다. 일단 '맘 편한 것이 최고'라는 게 우리 집 신조다.

"그래요. 할머니 돌아가실 때까지는 내가 간병비 낼 테니까 눈치 보지 말고 걱정도 하지 마요."

이 말을 하면서도 할머니가 과연 앞으로 몇 년을 더 사실까 생각했다. 명절에 내려가겠다 하면 매번 당장 두세 달 뒤인데도 "내가 그때까지 살까?" 말씀하시는데, 이 말만 벌써 5년 들은 것 같다. 그러다 보니 100세가 넘었다.

효자 아들을 두시고도 사는 게 고역이라고 하시는데... 아흔이 다 될 때까지 일하시고 남들보다 뒷방으로 늦게 들어갔는데도 왜 남은 생이 버겁고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하는 걸까. 100세가 축복받기보다 눈치를 먹으니 삶이라는 게 참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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