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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형 Jun 22. 2022

_야간산행-3

: 첫번째이야기, 에필로그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도 아니고 생생히 기억하는 편도 아니다. 다만 재미있는 것은 마치 게임 속에 맵이 존재하는 것처럼 각각의 꿈마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서너 개의 세계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세계관에는 반드시 발생하는 사건이 꿈을 꿀 때마다 아주 조금씩 변형되어 나타난다. 그렇게 꿈을 꾸고 난 뒤 현실에서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은 결국 어떤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관에서 반드시 발생하는 사건을 통해 느꼈던 감정 그 자체이다. 이야기가 없으니 구성은 뒤섞이고 장소는 배경이 아닌 하나의 무대가 된다. 그 안에서 나의 솔직한 감정은 하나의 인상이 되며 시간이 지난 뒤에도 또렷이 남는다. 나의 경우가 당신들에게 얼마나 공감이 될지 알 수 없기에 그중 한 세계관을 예로 들고자 한다.

 


한 고층건물이 있다.
그곳은 나의 집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직장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그 곳이 어떤 곳이며 내가 왜 그곳을 가려고 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 건물이 몇 층짜리 건물이며 외관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다만 꿈속의 나는 그 고층건물에서 늘 엘리베이터를 탄다.

내가 탄 엘리베이터는 매번 말도 안 되는 고장을 일으킨다.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최상층까지 올라가서는 지붕을 뚫고 날아가려는 찰나에 멈춰버린다.
아니면 반대로 승강로 최하단을 향해 급격하게 떨어지다가
 지하 어딘가의 어중간한 곳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버린다.
그리고 그 안에는 늘 공포에 질린 내가 있다.

심지어 이러한 고장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사실을 꿈속의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또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하지도 못할 층수를 향해 버튼을 누른다.
당연하다는 듯 엘리베이터는 다시 한 번 미친 듯이 솟구치기 시작하고
꿈속의 나는 체념한 듯 ‘또 시작이구나.’ 라며 되뇐다.
그렇게 불안함과 두려움 속에서 나는 안전하게 탈출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끊임없이 허우적거린다. 

한참을 시달리다가 잠에서 깨면 나는 아무 맥락도 기억하지 못한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은 오직 엘리베이터라는 구체적인 공간뿐
그리고 그 안에서 느꼈던
 불안,
 공포,
 위기,
 걱정,
 희망,
 안도,
 등의 격렬하고 생생한 감정뿐이다.



    이번 글에서 나는 앞서 말한 꿈과 같은 글을 쓰려고 했다. 시간과 장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짜임새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느낀 감정만을 오롯이 전달하고 싶었다.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기에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다양한 캐릭터를 등장시키거나, 일어나는 사건들을 치밀하게 구성하는 것은 지양하였다. 몰입감을 높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써 구체적인 공간을 펼쳐놓고 그 안에서 내가 느꼈던 생생한 감정과 순수한 감상만을 솔직하게 적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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